1980년대를 방환하는 우리들의 추악한 공범의식 ‘살인의 추억’

정성일의 영화세상
정성일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잔치는 끝났다고 푸념한 지가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갑자기 80년대가 돌아오고 있다.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시대가 우리 주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처음에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변방에서 80년대를 이야기할 때만 해도 우리들은 깡패새끼들만을 보았지, 그 풍경을 보지 못했다. 그 다음에는 서울 변두리의 80년대를 다룬 「해적, 디스코 왕이 되다」가 나타났다.

그리고 80년대 ‘고삐리’들의 연애활극 「품행 제로」와 80년대 ‘중삐리’들의 음담패설 「몽정기」가 등장했다. 1982년 11월 14일 맞아죽은 권투선수 김득구가 「챔피온」으로 부활하고, 거의 동시에 서울 가서 성공하겠다고 권투하러 떠난 80년대 섬 소년들 이야기 「남자, 태어나다」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삼청교육대 러브스토리’라는 기괴한 ‘純正哀歡劇(?)’ 「나비」와 함께 80년대 미해결 사건인 경기도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 지금 상영 중이다.

1980년대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이유

그러니까 80년대가 지금 우리에게 무언가 말하는 중이다. 때로는 낄낄대면서, 때로는 음란하게, 때로는 비장한 말투로, 때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을 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사건을 지금 다시 말해야 하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는 그 사건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보고 싶은 유혹을 참지 못하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유명한 이야기. 범인은 현장에 다시 돌아오는 법이다.

1987년 10월 26일. 경기도 화성 논밭 근처의 농수로에서 강간당한 다음 브래지어로 목을 졸리고 스타킹으로 손발이 묶인 채 팬티를 머리에 뒤집어쓴 이향숙의 시체가 발견된다(이하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본 다음에 평을 읽으실 것). 동네 경찰서의 박두만 형사(송강호)와 조 형사는 대충 사건 조서를 꾸민 다음 이향숙을 쫓아다닌 동네 고기집 바보 막내 백광호를 ‘感으로’ 체포한다.

그리고는 지하실로 데려와 겁도 주고 달래기도 하면서 범행 일체를 자백받는다. 서울에서 서태윤 형사(김상경)가 파견되어 내려오고, 그는 백광호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에 의한 추리로’ 안다. 둘이 범인 여부를 놓고 다투는 사이에 새로운 희생자가 발견되고, 이미 벌어진 범행의 예전 희생자도 찾아낸다.
서장이 경질되고, 새로운 수사반장(송재호)이 내려온다. 박두만 형사는 무당을 찾아가서 부적도 받아오고, 나름대로 과학적 추리를 해서 동네 남자들 중에서 무모증(無毛症)인 놈이 범인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범인은 매번 비오는 날 라디오 방송으로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신청한 다음 빨간 우산을 쓰고 가는 여인을 골라 죽인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수건돌리기 놀이’ 같은 재미

함정수사도 벌이지만, 소득이 없는 가운데 범행 장소에서 ‘빨간 팬티를 입고 딸딸이를 치던’ 동네 공사장 인부 조병순을 잡아 다시 한 번 족치면서 범행 자백을 받던 중 또 범행이 일어난다. 범인에게 강간당하고 겨우 살아남은 ‘언덕녀’로부터 “범인의 손이 곱다”는 진술을 받아낸 다음 라디오 방송국에서 신청곡 엽서의 주소를 찾아내 “손이 고운” 용의자 박현규(박해일)를 검거한다. 박현규는 완강히 범죄를 부인하지만, 서태윤 형사와 박두만 형사가 보기에 그는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범인”이다. 희생자에게서 발견된 정액을 확인하기 위해 미국에 검사 의뢰를 보내고 박현규를 감시하다가 서태윤 형사는 잠시 깜빡 존다. 그 두 시간 사이에 한 여고생이 다시 살해당한다. 더 이상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박현규를 찾아가 서태윤 형사가 총을 들이대고 자백하라고 외치는데 미국에서 결과가 왔다고 박두만 형사가 달려온다. 결과는 두 사람의 정액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03년, 아직 사건은 미해결로 남아 있다.

다소 길긴 하지만 이 영화의 줄거리는 꼼꼼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봉준호가 화성에 내려가서 이 사건을 직접 취재했(다고 하)지만, 「살인의 추억」은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소재로 한 김광림의 희곡 「날 보러와요」를 영화로 옮긴 것이다. 나는 「살인의 추억」에서 실제 사건의 어느 부분이 극적으로 허구인지 알지 못하며, 어느 인물이 극중 인물인지 모르며, 미안하지만 연극 「날 보러와요」를 보지 못했다. 미해결 사건을 영화로 담은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많은 대목에서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투적으로 말하면 송강호는 거의 원맨쇼에 가까우며, 많은 대목들은 봉준호가 지나치게 텔레비전을 열심히 본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만큼 영화적으로 서투르다.(특히 추적장면들은 유치하게도 음악소리만 시끄럽다. 또한 도입부의 롱테이크는 겉멋이다) 시나리오는 산만하고, 인물들은 차례를 기다려 적당한 대목에서 자기 역할을 하고 물러난다. 「살인의 추억」은 ‘그냥’ 재미있다.

그러나 그 재미는 일종의 수건돌리기이다. 그래서 내 뒤에 수건이 놓여 있을지도 모르는 놀이다. 수건돌리기가 불러일으키는 술래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내 뒤의 수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놀이 자체에 있다. 하지만 놀이는 즐겁고 수건만이 괴로워진다. 수건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뒤에 놓일 것이다. 수건이 놓이면 당신은 범인이다. 「살인의 추억」은 가까스로 술래에서 빠져 나온 당신을 다시 그 자리에로 데리고 간다. 하지만 그것은 봉준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80년대를 끌어들이는 순간 그 시대의 지식이 만들어내는 위장술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소도구나 미장센으로 활용된 80년대 텔레비전 연속극 「수사반장」이나 ‘나이스’ 운동화, 모나미 볼펜, 등화관제, 전두환이 이 동네를 지나간다니까 동원된 한복차림의 여고생들, 그리고 텔레비전 뉴스에 나온 부천 경찰서 성(性)고문 경찰 문귀동과 같은 대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내가 궁금한 것은 1987년에서 1991년에 걸친 미해결 사건의 이야기, 그러니까 어떻게 풀어내도 결국에는 불구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 그래서 결론이 없는 (정말 벌어진 현실 속의) 사건을 끌어안고 어떻게 해서든 그 누군가를 범인으로 몰고 가야 하는 안간힘 때문에 가져야만 되는 거짓된 외양의 그럴 듯함이 무엇을 기만하고, 무엇을 희생시키면서 그 대가로 무엇을 얻어내는 과정을 밟아 나가느냐는 것이다. 자꾸만 이야기는 같은 자리를 맴돌고, 주인공들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범행은 계속 되고 시체는 쌓여가는데, 이야기는 진척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범인이라고 의심하고 아닌 것으로 확인되는 같은 이야기의 끝없는 변주이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결국에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니 사실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살인의 추억」을 가장 이상하게 만드는 것은 범인이 누구인지는 (또는 아닌지는) 알겠는데,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가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는 그가 모든 살인을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첫 번째 범행만을 저지른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그걸 왜 알 수 없냐면 그가 범인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봉준호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박현규를 범인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정작 이야기는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으로 끝을 낸다. 영화는 범인이라고 지목을 하는데, 이야기는 아니라고 버틴다. 봉준호는 그 모순의 인과관계를 끝내 설명하지 못한다.

박현규는 비만 오면 “애국가 듣고 조회하는 것처럼”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라디오에 신청한 다음 강간 살인하러 밤에 범행장소로 ‘출근하는’ 미친놈이기 때문에 설명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 점이 이 영화에서 정말 무서운 대목이다. 또는 이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동의가 우리를 섬뜩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범인의 범행동기를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범인을 이해하는 대신 그냥 “미친 사이코”라고 지목한다.

하지만 왜? 그걸 이 영화는 슬쩍 생략한다. 범행 동기를 알 수 없으니 끝내 범인을 잡기는 틀린 일이다. 그런데도 박두만 형사는 일단 잡아다가 때리고 달래면서 범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한다. 또는 서태윤 형사는 자기가 선택한 증거를 통한 자기의 추리를 의심하지 않는다. 백광호는 자기가 범인을 보았다고 말한 다음 기찻길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조병순은 ‘통닭구이’ 고문을 받은 다음 시키는 대로 범행을 자백한다. 박현규는 끝내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또는 못한다. 여기에는 범인(이라고 자백을 강요받은 채 희생당하고 있는 이)들의 입장이 깨끗하게 지워져 있다. 오직 추적하는 형사들의 시선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선택한 증거물만으로 추리를 하고 범인을 호명한다. 호명당하면 그때부터 범인이다. 그것이 80년대를 기억하는 우리들의 추억의 수사학이다.

우리들은 80년대에 대해서 마치 형사와도 같은 자리에 가서 호명한다. 거기에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나, 죽은 자들의 묘지 앞에서의 죄의식 따위는 처음부터 없다. 무언가 잘못이 있지만, 그 잘못은 범인이 저지른 것이다. 그런데 그 범인이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이해할 생각은 없다. 그저 호명하고, 죄를 자백하라고 외치면 된다. 하지만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대상, 끝내 잡을 수 없는 대상과의 숨바꼭질 속에서 ‘아무나’(이 말이 중요하다) 거짓범인으로 몰아서 때리고 고문하던 가해자는 갑자기 희생자가 되고, 희생자들은 위증을 한 것으로 몰린다. 정작 범행을 저지른 그 대상이 완전히 탈락되어 있는 기만적인 속임수의 드라마는 텅 빈 구멍이다. 그러니까 어쩌면 정말 잡히지 않는 범인은 80년대라는 구멍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 걸려들 것이다. 우리 시대의 관객들이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보면서 낄낄대고 웃는 것은 동시에 80년대에 걸려 넘어진 채 누가 범인인지를 찾아내라는 요구에 대한 집단적인 비웃음이다. 2003년은 80년대에 대해서 완전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누가 범인이고, 누가 가해자인지도 알 수 없게 뒤섞인 이 무시무시한 공범의 책임전가 시대에 갑자기 80년대의 범인을 찾자는 우스꽝스러운 짓거리에 대해 집단적으로 히스테릭한 웃음을 터트리는 중이다.

완전범죄를 방관한 우리의 지리멸렬함

그러니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중으로 읽혀야 한다. 형사를 그만 두고 대리점을 하는 박두만은 2003년에 이 영화의 첫 장면, 이향숙이 시체로 발견된 농수로에 다시 찾아간다. 그곳을 보고 있는데 한 초등학생 소녀가 와서 이야기한다. “참, 이상하다. 어제는 다른 아저씨가 와서 들여다보더니 옛날에 한 일이 생각나서 온 것이라고 하던데” 어쩌면 아직도 활개치는 범인이 와서 들여다본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서태윤이 들린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영화를 곧이곧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하나가 남아 있다.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범인을 잡아야 하는 놀이는 아직도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재수 없게도 비오는 날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흥얼거리면서 걸어가는데 당신 앞에 빨간 우산을 들고 걸어가는 여인이 있다면 당신은 범인일 수도 있다. 당신에게 강간할 의지가 없다고? 아니, 그렇지 않다. 그 자리에 하필이면 마침 도착한 당신이 잘못이다. 결과가 원인을 붙잡으러 달려갈 때, 당신은 저지르지 않은 죄의 범인이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 이 순환의 고리에 누군가를 대신 밀어넣어야 할 것이다. 어느 새 당신은 범인을 잡는다는 미명을 앞세워 가해자의 자리에 가 있다. 당신은 자꾸만 형사의 자리에 가고 싶어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은 당신이 80년대의 공범자라는 그 책임의식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이 따분하고 뻔한 영화가 어떤 대목에서 찬물을 끼얹듯 섬뜩해지는 이유는 그 역설적인 책임회피를 통해 우리들의 추악한 공범의식을 쳐다보게 만드는 순간이다. 「살인의 추억」을 보는 재미는 80년대에 대해서 완전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어둠 속에 모여 앉아 즐겁게 추억을 더듬는 그 공범의식의 음란한 은밀함이다. 참으로 지리멸렬하게도 우리들의 역사는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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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제 204 호 2003 년 6 월 발행
ⓒ 디지털말

출처 : 씨네21
정성일의 <오아시스> 비판론
안전한 환상,혹은 비겁한 위로

<오아시스> 개봉 직후에 발행된 지난 366호(8.20∼27)에 평론가들의 리뷰를 모아 실었다. 결과는 <오아시스> 예찬론 모음이 됐다. 그때 이 영화에 비판적인 견해를 보이면서도 몇몇 이유로 당장 쓰기 힘들다고 말했던 이중의 하나가 정성일씨다. 그동안 <오아시스>에는 찬사가 쏟아지면서 관객이 100만명을 넘었고, 그뒤에 받은 정씨의 글은 원고지 100매가 넘었다.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뒤늦은 이의제기를 전하는 건, 성이나 장애자 문제 등 생각해볼 대목을 꼼꼼이 해부하는 이 글의 태도가 우리의 영화문화를 더 풍요롭게 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편집자

맨 처음, 그러니까 벌써 일년 전에 나는 올해 두편의 영화만큼은 절대 보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 한편은 김기덕의 <나쁜 남자>였고, 다른 한편은 이창동의 <오아시스>였다. 간단하게 소개된 줄거리가 너무 끔직해서 도무지 영화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두편 중의 어느 쪽도 피해갈 수 없었다. 그 결과 한편은 나에게 다행스러웠고, 다른 한편은 이상하게 여겨졌다. 다행스러운 영화는 보고 난 다음에도 불편한 감정을 유지시키게 내버려둔 김기덕의 <나쁜 남자>였다(이미 나는 이 자리에서 <나쁜 남자>에 대한 나의 견해를 밝혔기 때문에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영화는 이창동의 <오아시스>였다. 나는 이 영화를 8월 두 번째 주 시사회에서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창동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너무 뻔한 이야기를 갖고 그저 그런 결말을 향해서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중언부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겨울에 반팔 옷차림으로 지금 막 감옥에서 ‘세 번째 별’을 달고 나와 담배 한대 달라고 사정하면서 세상으로 돌아온 사내, 집에서는 그가 잡혀간 사이에 가족들이 이사가고 면회도 가지 않은 게 분명한 이 어수룩한 남자, 오죽하면 형수로부터 면전에 대고서 “미안한 말인데요, 난 정말 삼촌이 싫어요, 정말로 미안한 말인데요, 삼촌이 안 계실 때는 살 것 같았어요”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올해 스물여덟살 또는 아홉살의 어수룩한 홍종두와, 그가 찾아간 피해자의 딸인 뇌성마비 장애자 한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처음부터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있다. 누구라도 ‘하여튼’ 지지할 수밖에 없는 전제를 안고 시작하는 이야기들. 모두들 감동받은 표정으로 영화관을 나섰다. 뭐, 어차피 그럴 줄 알았기 때문에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렇게 착한 이야기를 어떻게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몇개의 글을 읽으면서 갑자기 이상하다는 생각은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원래 이창동 팬클럽 회장인 조선희씨의 열렬한 지지는 예상했던 것이지만(<씨네21>, 2002_0806_0813, 364호) 그뒤로 이어지는 네편의 지지선언(<씨네21>, 2002_0820_0827, 366호)은 어리둥절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글들이지만, 내가 읽기에는 영화에 관한 글이라기보다는 소설에 가까웠고 특히 심영섭씨의 글은 시처럼 읽혔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좀더 꼼꼼하게 읽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이 영화에 관한 글(들)이 실린 <씨네21>을 읽고 싶다고 부탁했고, 임범 기자는 친절하게 황진미씨의 반론이 실린 367호(2002_0827_0903)도 보내주었다. 그 글은 일부는 동의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황진미씨의 견해일 것이다. <필름2.0>의 사이트를 찾아가서 거기 실린 문인들의 글과 편집위원들의 글도 읽어보았다. 물론 <오아시스>의 공식 사이트에 실린 글들을 읽었으며, 그리고 난 다음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그 다음에 이 글을 쓰기 위해 두번 더 보았다). 사실 나는 다시 본다고 해서 생각이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이 영화를 (무료 시사가 아니라 돈을 내고 영화관을 찾아와서) 본 사람들이 궁금해서 찾아갔다. 그날 여자들은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보았고,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 남자들은 자못 감동받은 얼굴이 되어서 영화관을 나섰다. 일당 백의 반론을 쓰는 일은 매우 지루한 일이다. 나는 한편으로는 이 글이 귀찮아지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지만’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오아시스>는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연기상)을 받았다. 참으로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창동은 지금 주말 박스오피스에서의 승리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가는 이 한국영화 시장바닥에서 영화의 진정성을 믿는 드문 시네아스트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아시스>에 동의하지 않는다. 만일 이 영화가 수상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글을 쓰기 않았을 것이다. 상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영화에 대한 나의 입장에는 아무 의미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영화에 대한 반대의견을 침묵시키는 수단이 된다면 그건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여기서 시작한다.

당신은 진실을 보았는가?

<오아시스>는 아무리 말을 바꾸어도 결국은 홍종두와 한공주가 서로 사랑하는 이야기이다. 그걸 그냥 간단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전과자 홍종두와 가족에게 이용당하는 뇌성마비 장애자 한공주가 서로 만나서 우여곡절 끝에 서로 상처를 보다듬고 위로하고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몰라주어도 두 사람은 아마 앞으로 행복하게 살 것이다. 이 착한 이야기는 사실 동화에 가까운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면 세상의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홍종두 ‘장군’과 한공주 ‘공주마마’는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동화가 이상한 것은 낯선 장소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여기 세상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세상 속의 믿음을 끌어들여야 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홍종두와 한공주가 만들어내는 동화를 믿는 사람은 그걸 지켜보는 우리뿐이다. 그런데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런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믿음의 숨바꼭질은 <오아시스>가 펼쳐 보이는 기만적인 환영술이다. 기만이라고? 그렇다. 아무도 그걸 믿지 않는 것을 당신만 믿게 된 것은 당신이 본 것을 믿는 데서 온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 영화는 홍종두와 한공주의 사랑 이야기만큼이나 당신만을 위한 믿음의 절차를 물어보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홍종두의 형과 동생이, 한공주의 오빠가 그들 곁에서 살아가면서 보지 못한 진실을 당신은 본 것이다. 그런데 정말 본 것일까? 당신은 신데렐라의 진실을, 백설공주의 진실을, 콩쥐의 진실을 정말 본 것일까? 좀더 정확하게 당신이 보았다는 것은 어떻게 본 것일까? 또는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당신은 볼 수 있었던 것일까?

다시 처음부터, 그것도 맨 처음부터. 이 단순한 이야기가 이상해지는 것은 서로 사랑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홍종두와 한공주가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이 말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홍종두라는 인물을 거리에서 만나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공주를 거리에서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두 사람을 만나게 해야 한다. 어떻게? 그러기 위해서 홍종두는 이 집을 찾아가야 할 이유가 필요해진다. 그는 2년6개월 전에 택시운전을 하다가 밤길에 환경미화원을 치어 죽였고, 그래서 감옥에 갔다(그런데 정말 친 사람은 홍종두의 형 홍종일이다. 영화의 절반쯤 지난 93신 홍종두 모친 생일잔치를 하는 호텔 복도에서 동생 종세의 말에 의하면 홍종두는 집안의 가장인 형 대신 이미 별 둘을 달았기 때문에 스스로 대신 간 것이다). 아마도 홍종두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그 환경미화원의 집에 갈 작정을 한 것 같다(18신 공주의 아파트에서 그 오빠에게 종두는 말한다. “그저께 교도소에서 나왔걸랑요, 그래서 어저께 제가 바로 올려고 그랬는데 주소를 몰라서요”). 말하자면 <오아시스>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이미 시작한 것이다. 거기에는 운명과 같은 것이 있다. 하지만 홍종두가 그 환경미화원의 자녀들의 집을 왜 찾아갔는지는 끝내 알 수 없다. 그는 자기 운명처럼 그 집에 찾아간다. 운명이라고? 홍종두와 한공주는 오고가다 그냥 만난 사이가 아니다.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그렇다. 그 둘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절대성이 드리워진다. 이 장면이 운명적인 (인상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 한공주의 오빠 내외는 마치 홍종두가 찾아오기를 기다린 것처럼 그날 이사를 간다. 홍종두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 시간에 도착한 것이다. 이 아이러니를 받아들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더 큰 질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건 물론 이 영화가 세상을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동화로 각색하는 그 과정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공주를 구하기 위해 장군은 제 시간에 도착한다. 이미 이 순간 이 영화는 로맨스의 구조를 떠안는 것이다. 또는 타락한 현실을 버텨내야 하는 멜로드라마의 길에 접어든 것이다. 그 무언가가 홍종두를 그 시간에 그 장소로 부른다. 신18 이사가는 아파트에서 공주가 보여질 때 먼저 보는 것은 그녀의 거울에 반사하는 빛으로 만들어낸 환상 속의 비둘기이다. 그 비둘기가 방 안을 날아다니다가 홍종두가 이사가는 그 집안으로 들어오자 비둘기는 다시 빛으로 변한다(홍종두의 머리 위를 난 다음에야 비로소 비둘기는 빛으로 돌아간다). 거기에는 대상의 바꿔치기, 좀더 정확하게 공주의 환상의 자리에 정확하게 홍종두가 들어선다. 그것은 일종의 신호이자 계시이다. 이 무시무시한 목적론의 세계. 또는 그들도 알지 못하는 거대한 계획의 실행에 동원된 아무 힘없는 가여운 두 사람. 이 장면은 이중적인데, 홍종두는 공주의 환상을 깨트리고 그 안에 들어서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 자리에 홍종두가 도착한 것을 알리는 순간이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홍종두는 한공주의 비둘기의 자리를 차지하는 환상의 대리물이다. 또는 공주의 현실 속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나타난 대답이다. 하지만 우리는 공주의 결핍이 무엇인지 (아직은) 알지 못한다. 영화는 ‘그 다음부터’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온전히 바쳐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 그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은 홍종두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사실이다.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온몸을 비틀며 고통스럽게 앉아 있는 한공주의 환상이 만들어내는 그 비둘기의 자리에 홍종두가 대신할 만한가, 라는 질문 대신 우리에게 던져진 것은 홍종두의 미래에 한공주라는 뇌성마비 장애자가 들어설 때 그는 정말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올 수 있었던 그 자리에 홍종두가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도록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이 영화의 순서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한공주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홍종두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 우리는 홍종두에 이끌려 한공주의 시민 아파트에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불현듯 한공주와 마주친 것이다. 우리는 이제까지 내내 홍종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 몸 하나 가눌 만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보았다. 그런데 여기에 한공주가 들어설 만한 자리가 있는가, 라는 질문과 마주할 때 당신은 이미 그들의 운명을 근심하는 그 자리에 불려가는 것이다. 거기 그 자리에서 가장 괴로운 사람은 당신이다. 왜냐하면 아직 한공주는 자기의 운명을 알지 못한다. 또는 홍종두는 이제부터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당신만이 그 장면의 의미를 알아차린다. 무능력한 구경꾼인 당신만이 신18에서 왜 비둘기가 날아가는 그 장면 안으로 홍종두가 들어왔는지를 이해한다. 저 전지전능의 자리, 그러나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는 그 모든 것을 보는 사람은 당신뿐이다.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환상을 당신이 보는 순간 이미 당신은 이 영화의 보이지 않는 등장인물이 된 것이다. 당신이 없다면 한공주의 환상은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이 운명적인 질서를 꼼짝없이 보아야 하는 무력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건 홍종두와 한공주를 이해하는 것뿐이다. 당신이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놀라운 일. 이 영화에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그런데 이 등장인물 중에서 홍종두와 한공주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오직 무기력한 구경꾼인 당신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동원된 환상, 동원된 순서 편집

여기서부터 그 순서를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신19에서 이사가는 공주의 오빠 내외를 본 다음 신20은 공주 혼자서 놀다가 갑자기 거울을 던져 깨트린다. 그런데 깨져서 산산조각난 거울에서 반사되는 빛이 나비떼가 된다. 신20에서 아파트 문 앞까지 홍종두가 과일 바구니를 들고 다시 찾아온다. 그러나 그는 벨을 누른 다음 멀찌감치 서서 문이 열리는지를 보고 그냥 간다. 그 다음 신은 부동산중개소에 그릇을 찾으러 왔다가 손님이 부르는 노래 “모두 사랑하네” 구절을 따라 부르는 대목이다(신24). 그리고는 중국집에 돌아오니 이미 모두 퇴근하고 난 다음이라 문이 닫혀 있다. 홍종두는 그 길로 공주의 시민 아파트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간다(신27). 그때 공주는 라디오를 듣고 있다(신28). 다음 장면은(신29) 홍종두가 도로에서 영화 촬영하는 차를 따라 달리다가 엎어진다. 이 장면들이 이상한 것은 왜 신19에서 다음 날 공주의 아파트를 찾아가는 신32로 바로 건너오지 못하는가, 라는 것이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뻔한 건데 바로 넘어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장면들은 19신의 결과가 아니라 32신의 원인이기 때문에 처음 볼 때는 잘 붙들리지 않는다. 홍종두는 공주 집 앞에 한밤중에 다시 찾아간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영화 촬영차량을 따라간다. 그는 기분이 좋다. 홍종두의 행위가 미스터리한 것을 이해시키는 방법은 마치 한공주의 라디오가 율리시스를 불러내는 사이렌처럼 편집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공주는 홍종두를 유혹하는 중이다. 또는 이 말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한다면 하여튼 그 무언가가 자꾸만 홍종두를 한공주의 집으로 불러낸다. 영화는 홍종두의 행위에 앞질러서 그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한공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신20에서 신31까지를 모두 볼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다. 이제 당신은 이해하는 척하는 공범자이다. 또는 그렇게 편집되어 있다. 그렇게 쫓아갈 수밖에 없는 당신.

홍종두는 다음날 꽃을 사들고 한공주 혼자 사는 아파트를 찾아간다. 그는 우연히 만난 옆집 아줌마에게 거짓말을 하고(“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묻자 종두는 “꽃배달을 왔는데요”라고 대답한다), 심지어 초인종을 눌러서 허락받고 들어가는 대신 몰래 열쇠를 훔쳐서 열고 들어간다. 여기가 바로 꽃을 들고 종두가 혼자 남아 있는 공주를 찾아간 문제의 39신이다. 둘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서부터 영화가 우리에게 믿음 전의 믿음이라는 기괴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 영화는 사실상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영화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첫 장면으로 시작하지 못한다. 또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19에서 신32로 넘어오지 못한다. 이 장면을 아무리 다르게 말해도 결국은 강간하러 찾아간 장면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 환상이 동원되고, 운명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복잡한 순서 편집이 동원된 것이다. 홍종두는 착한 사람이다. 그렇다. 나도 아니라고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옆집 아줌마에게 거짓말을 해서 자기 신분을 속이고, 열쇠를 훔치고, 분명히 혼자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신체가 자유롭지 못한 뇌성마비 여자를 찾아갔을 때 홍종두는 그녀가 너무 외롭고, 불쌍하고, 그래서 친하게 지내고 싶은 착한 마음으로 찾아간 것일까? 왜 홍종두가 이 집에 찾아오자 처음 한 행동이 이 문 저 문 열어보면서 다른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이었을까? 분명히 거부 의사를 밝히고 있는데도 홍종두는 순진하고 착한 마음에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첫마디로 반말을 하면서, 다짜고짜 얼굴에 손을 대고, 한공주의 옷깃을 젖히면서 젖가슴에 손을 넣고, 자기 바지를 벗어 내리면서, 발버둥치면 뒤에서 힘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고 “잠깐만, 이쁘지, 이쁘지, 잠깐만 있어봐, 씨발년아”라고 말한 것일까?(홍종두는 이게 처음이 아니다. 그가 ‘이미’ 단 별 세개 중의 하나는 강간미수이다. 그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또는 좀더 정확하게 이창동은 우리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신11에서 무전취식하고 잡혀간 경찰서. 그리고 나중에 다시 환기시켜주기까지 한다. 신109의 경찰서 진술장면) 그게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면 기절한 공주를 깨우면서 왜 자기를 때리며 “이 씨발 새끼야”라고 자책했을까? 또는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도망쳐버린 것일까? 이 무서운 장면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홍종두의 나쁜 의도가 아니라 그에게 영화가 일깨우는 자리이다. 신39가 중요해지는 까닭은 이 아파트를 찾아간 홍종두가 한공주를 여자의 자리에 놓고 찾아간 남자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홍종두라는 예상하지 않았던 방문객-침입자를 맞이하는 한공주의 자리는 성별과 관계없이 인간의 권리에 대한 침범에 있기 때문에 그 대칭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한공주가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린 것은 홍종두의 섹스 때문이 아니라 폭력 때문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만이 그 자리에서 그녀가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순간 여기서 나쁜 ‘남자’ 홍종두는 뇌성마비 ‘인간’ 한공주를 만난다. 왜 이렇게 만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 만남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영화의 환상의 바탕에 있다. 너무나 그 순간의 쇼크가 크기 때문에 우리는 미처 이 영화가 여기서 갑자기 자기 입장을 바꿔버렸다는 사실을 놓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왜 홍종두를 그 자리에 가져다 놓아야만 했을까? 당신이 진짜 보고 싶은 장면은 물론 신56 공주가 홍종두를 불러서 ‘장군’이라고 부르고 ‘공주마마’라고 대접받는 장면부터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왜 안 되는 것일까? 처음 그들이 만났을 때 왜 그들은 공주마마와 장군의 놀이를 시작할 수 없었던 것일까? 현실은 동화 속으로 단번에 넘어가지 않는다. 이 미묘한 순간에 우리는 이제까지 이 영화를 보던 우리의 위치가 바꿔치기 당한 셈이다. 영화는 홍종두를 할 수 있는 한 가장 참담한 곳에 집어던진다. 그렇게 홍종두를 가장 비루한 자리에 가져다놓고 난 다음, 한공주의 면죄부를 통해서 그를 가장 숭고한 자리에 가져다놓으려는 착한 환상극을 통해 만들어내는 시작의 좌표는 홍종두와 한공주가 현실과 맞대면하면서 결국에는 세상 속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질문 대신 한공주를 경유하여 홍종두를 계몽하려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홍종두의 행위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홍종두를 계몽하기 위해서 한공주가 결국에는 어떤 자리로 가야 하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이 영화의 결정적인 위선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이창동의 영화에서 내내 반복된 과정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에서 항상 남자들의 영혼은 여자들의 희생없이는 정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들의 영혼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채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초록 물고기>에서 미애는 결국 무엇을 얻었는가? 또는 <박하사탕>에서 20년 동안 그 자리에서 유폐된 존재처럼 멈춰선 순임. 오직 영호를 일깨워주기 위해 불가능한 희생을 요구 당하는 바로 그 자리!).

한공주를 위한 장군만들기

우리는 이 영화를 다시 돌이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아시스>는 심각한 테마를 껴안은 영화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잊어버린 걸 일깨워주는 계몽영화이다.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이창동 자신인 것 같다. 자꾸만 어마어마하게 질문하는 조선희씨에게 그는 인터뷰에서 말을 마치면서 대답한다. “실제로 나는 모범생 계열이에요. 나는 긍정적으로 발언해요. (중략) 내 영화의 전략이 뭐냐, 어찌 됐건 건전하게 출발한 영화인데, 진지한 영화인데 흠잡기 힘들잖아. (웃음) 농담이지만 진담이지. 나는 긍정주의자이고, 낙관주의자이고, 이상주의자이고, 인간을 믿으려 하고. (중략).” 나는 그 대답이 진담이라고 생각한다) <오아시스>는 세상에 버려진 인간 홍종두를 따라서 세상에 문제를 일으키는 그 모습을 따라가다가 불현듯 이 장면에서부터 홍종두를 계몽시키는 데 바쳐지기 시작한다. 주어였던 홍종두가 목적어가 되는 순간 그의 의지는 사라지고, 그를 움직이는 운명의 의지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그걸 당신은 하여튼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이 당신의 자리에서 버텨보겠다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버티면 당신은 더이상 영화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러워하지 마라. 당신을 위한 자리는 훨씬 더 중요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신39 다음이 중요해진다. 이 사건이 벌어지고 난 다음 둘이 다시 만나기 전까지 두 사람을 진술하는 방식은 아주 기묘하다. 홍종두는 자기가 벌인 일에 대해서 단 한 숏도 반성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집에 가서 늙은 노모를 모시고 묵찌빠를 한다(신42). 이 무서운 남자는 갑자기 다음 장면에서 어린애가 되어버린다. 뇌성마비 장애자를 강간미수한 홍종두의 인간적인 모습? 그 사이에 한공주는 두개의 신을 겪어야 한다. 하나는 옆집 아줌마와 일나갔다가 보신탕 먹고 와서 대낮에 섹스하는 아저씨를 문 하나 건너에서 ‘들어야 하는’ 한공주의 모습이다(신44). 이 장면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을 아주 이상한 자리에 가져다놓은 것이다. 나는 이 신이 다른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의 비참한 환경이긴 하지만) 얼마든지 웃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홍종두가 강간을 하려다 실패하고 도망친 장면 다음에 어린애처럼 어머니와 묵지빠를 하는 홍종두에 이어 붙여서 바로 뒤에 이 신이 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한공주의 섹스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며, (물론이다. 뇌성마비 장애자도 섹스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홍종두가 바로 한공주, 당신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라고 부추기기 시작한다. 나는 이 신의 편집방식이 정말 끔찍하다), 슬그머니 그녀에게 섹스의 권리를 일깨우는 척하면서 홍종두를 용서할 수 있는 역설적인 논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뒤이어 한공주의 오빠 한상식의 내외가 와서 그녀를 데리고 이사간 장애자 임대아파트에 데려가 (명의만 빌려 가짜로 입주한 사람들, 바로 한공주의 오빠 같은 사람들을 적발하기 위해 방문한) 동사무서 직원을 눈속임하고 다시 원래의 의정부 시민아파트에 데려다놓는다(이 대목은 짧지만 데리러 온 장면, 동사무소 직원을 눈속임하는 장면, 다시 데려다놓는 장면을 모두 꼼꼼하게 찍었다). 이 장면은 몇 가지 진술을 하는데 우선 한공주를 그녀 오빠 내외가 한편으로는 이용하지만, 동시에 그녀와 함께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오빠가 아니면 그녀를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문장을 하나로 합치면 그녀를 돌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오빠마저 그녀를 이용하고 있는 지금 한공주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누구냐고 우리게 물어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마침내 53신이 성립된다. 강간당할 뻔한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건다. 저 잔인하게도 막다른 골목에 밀어넣은 다음 베푸는 자비, 또는 우선권을 가장한 자포자기.

기만의 환타지, 자아를 무아지경에 빠뜨리다

만일 여기까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부터 영화는 갑자기 동화가 된다(신56 공주의 아파트). 그렇기 때문에 저 닭살 돋는 대화조차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한공주를 ‘공주마마’의 자리에 가져다놓고, 홍종두를 ‘장군’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그들은 무엇을 얻은 것일까? 이창동의 환상은 사회적 현실 전체가 지니고 있는 (홍종두와 한공주에 대한) 사악한 구조를 환상으로 놓는 대신 현실의 자리에 갖다놓고, 그 반대로 그 사악함을 일깨워야 할 자아를 환상의 무아지경으로 빠트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회가 갖고 있는 홍종두와 한공주에 대한 태도를 그냥 인정할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기만의 판타지라는 숨바꼭질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환상이 실재의 자리를 차지하고, 실재가 환상에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홍종두와 한공주의 사랑은 서로에 대한 서로의 기만으로 시작한다. 그들이 속이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그들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현실에 대해 눈을 감는 것이다. 그렇게 홍종두는 한공주를 ‘공주마마’의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서 자기를 ‘장군’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실재 속에서 비천하고 남루한 그들이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들 스스로의 자리를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 스스로의 자리를 가장 고상한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서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난처한 논리와 마주친다. 홍종두와 한공주가 착하고 순진하기 때문에 시련을 겪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홍종두와 한공주를 따라가면서 보아야만 세상의 사악함을 볼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런데 그 깨달음은 환상 안에 있는 것이다. 이크!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점. <오아시스>에서 정말 환상이 필요했을까, 라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 전체가 사실상 홍종두와 한공주의 환상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장군과 공주마마 놀이), 그것을 구태의연하게 기어이 장면으로 보여줄 때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어리둥절했기 때문이다(처음 보았을 때 이 대목들이 대부분 이상하게 보였다). 이 영화의 환상장면들은 환상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은 있지만 나가는 장면이 없다. 말하자면 항상 이 숏들은 현실 안으로 환상이 침범해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해서(항상 갑자기 한공주는 벌떡 일어나서 프레임 안으로 우리를 놀라게 만들면서 슬그머니 들어온다) 현실의 숏으로 넘어오지 못하는 컷으로 끝난다(그래서 한공주가 장애자로 돌아가는 장면은 환상이 잘려나가도록 편집되어 있다). 이건 이상한 일이다. 또는 이것이 이 영화가 이끄는 대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영화를 보는 방법이다. 이창동은 현실이 환상에 자리를 양보하기 바라지만, 그 환상 안에 현실이 개입하여 우리를 일깨우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이 깊은 잠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 실제로 홍종두는 끝내 한공주의 환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 안에서 한공주의 유일한 환상은 그녀가 뇌성마비 장애자로부터 정상인이 되는 것이다(또는 비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다. 영화에는 한공주가 홍종두의 곁에 가는 환상의 장면들은 있지만, 그 반대의 장면은 없다. 그건 이유가 있다. 한공주의 환상은 항상 그녀가 사는 아파트 바깥에서만 이루어진다(신74의 전철 안, 신80의 종두의 카센터, 신99 전철역). 이 사실을 다시 생각해보자. 환상의 내용은 허위이지만, 그것이 벌어지는 순간은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녀의 환상이 홍종두의 도움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홍종두의 도움없이 그녀는 외부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이 중요하다. 한공주가 그녀의 환상 안에서 홍종두의 머리를 물병으로 때리건, 아니면 “어떻게 나한테 화를 낼 수가 있어”라고 따지건, 또는 홍종두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건 그 내용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홍종두는 한공주의 환상 외부에 있지만, 그는 그녀의 환상을 만들어내는 버팀목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공주의 환상이 우리에게 말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인정해야만 하는 그 안의 진실은 그녀가 자신을 포기하고 홍종두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추김이다. 환상은 당신에게 현실의 풍요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현실 안의 황량함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항상-결코-언제까지 충분치 않은 현실의 틈을 스스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면서 채워넣는 형식이다. 그런데 그것을 채워넣기 위해서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을 끌어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 환상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녀는 자기의 자리를 버리고 홍종두의 빈자리 안으로 스스로 들어와야 한다.

왜 홍종두는 환상에 응답하지 않는가?

거기에 덧붙여 그 예외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고백. 신82 카센터에서 홍종두가 한공주에게 어젯밤 오아시스 양탄자에 관한 꿈 이야기를 해주고 난 다음 84신 청계고가도로 위에서 교통체증에 밀려 차가 멈춘다. 그러자 홍종두는 한공주를 데리고 나와서 껴안고 춤을 춘다. 그런데 이 장면은 공주의 얼굴에서 클로즈업되어 신85 공주 방에서 인도 여인과 소년, 그리고 코끼리가 나오는 환상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은 홍종두의 유일한 환상인지 아니면 한공주의 환상인지 불분명하다. 다만 영화적으로만 설명하면 공주의 클로즈업에서 이어지기 때문에 그녀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홍종두의 마술은 항상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만 이루어진다(신66에서 그녀 방에서 그림자를 없애는 것은 실패하지만. 신69에서 전화를 통해 부리는 마술은 성공한다). 한 가지 더. 홍종두의 마술은 무언가 나타나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게 하는데 있다. 신86은 종두가 카센터로 혼자 돌아온 장면이다. 이 환상이 특별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다른 세개의 환상과 달리 양탄자에 담긴 그림의 비실재적인 대상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며(코끼리, 인도 여인과 소년), 다른 하나는 공주의 방 안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내용이 홍종두의 꿈이 한공주의 환상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공주가 완전히 홍종두의 놀이 안으로 끌려들어왔음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장군과 공주마마의 놀이가 홍종두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음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동시에 이 장면은 결국 홍종두의 놀이가 지닌 무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청계고가도로에서 홍종두가 한공주를 껴안고 소리치는 장면은 한공주에게 무엇을 해주었느냐가 아니라, 그 반대로 무엇을 해줄 수 없느냐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홍종두와 한공주의 데이트는 항상 실패의 기반 위에서 서 있는 것이다. 음식점에서 쫓겨나고, 청계고가도로에서 차는 밀리고, 어머니의 생일잔치에 가서 가족들을 모두 불편하게 만든다. 여기서 홍종두의 꿈과 한공주의 환상이 겹치는 대목은 그것이 완전히 비실재적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나머지 세개의 환상은 모두 한공주가 떠올린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이창동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자기 자신도 모르게 홍종두의 꿈과 한공주의 환상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비실재적인 것임을 서둘러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이 장면의 수수께끼가 놓여 있다. 왜 서둘러 그것이 비실재임을 드러내야만 했을까? 이 영화 전체에 잉여처럼 버티고 선 이 기이한 환상은 단 한 가지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장면은 청계고가도로에서 홍종두와 한공주가 벌이는 그 알 수 없는 행동의 내면이 사실은 공주의 방 안에서 코끼리와 인도여인과 소년과 함께 뛰놀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라는 것을 바로 당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그것을 보는 당신의 자리가 비실재의 꿈과 환상이 교차하는 바로 거기, 그 아슬아슬한 자리라는 것을, 새삼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이것은 오직 당신만을 위해서 상연되는 환상이다.

여기서 한공주의 환상은 홍종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가장 중요한 것. 왜 끝내 홍종두는 한공주에게 환상으로 응답하지 않는가? 그가 한공주에게 환상으로 응답하는 순간 이 영화는 부서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홍종두를 한공주의 환상 속의 주인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서 모든 것이 배려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항상 한공주는 홍종두를 위해서 그녀의 환상을 바친다. 아무리 말을 바꾸어도 이 영화는 잘 짜여진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이다. 실제로 <오아시스>는 그 말을 지루할 정도로 계속해서 반복하는 영화이다. 그런데 그게 질리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홍종두는 좀더 숭고한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

윤리적으로 바른, 정치적으로 바르지 않은

사실 가장 우스운 대목은 신60 종두의 집 앞에서 그의 어머니와 형수가 목사님과 마주칠 때이다. 시나리오상으로 목사님은 신117 경찰서에서 홍종두로 하여금 수갑을 풀고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미리 등장하는’ 사람이다(마지막 대목에서 홍종두를 탈출시켜주기 위해 갑자기 목사님이 나온다면 얼마나 이상하겠는가?). 그러나 목사님은 기능적으로 등장하지만 홍종두에게만 등장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홍종두가 목사님과 마주치는 것은 신56에서 공주에게 용서를 받은 다음 그녀로부터 ‘장군’의 자리를 인정받은 직후이다(그리고 두 사람은 옥상에 올라간다. 신60은 그날의 연속이다). 다음 장면(신61)은 홍종두가 형의 카센터를 찾아가 일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하는 장면이다. 이 대목은 경찰서에서 도망치는 홍종두가 그 구절을 다시 한번 외우는 것으로 반복된다(신118 종두의 대사 “아버지 하나님, 당신의 어린 양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불쌍한 어린 양을, 불쌍한 어린 양을, 불쌍한 어린 양을, 불쌍한 어린 양을 구원하소서”). 홍종두가 정말 기독교를 믿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걸 보는 우리는 홍종두의 행위에서 성자 같은 순결함을 다룬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홍종두는 자기 의지로 목사님에게 말씀을 청해 들으며(신60),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불현듯 깨달았다는 듯이 달려나가(신117) 한공주의 집 앞에서 그녀를 무섭게 만들면서 잠 못들게 만드는 나뭇가지를 잘라버리기 때문이다(신125에서 127까지). 영화는 자꾸만 거기 있지도 않은 깨달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희생적으로 실천하는 홍종두의 모습 속에서 그가 결국 영화가 끝난 다음에도 돌아오게게 되리라고 믿게 된다. 기이한 성자의 내면화. 이 모든 것을 가로지르는 환상은 이상한 방식으로 의사소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홍종두가 나무를 자르는 행위를 형사들은 이해하지 못한다(신125 형사 “야 임마 너 밤에 거기 올라가서 뭐하는 거야. 응?”). 반면 공주는 홍종두가 이 밤에 어떤 깨달음 때문에 달려왔는지 알지 못한다(공주가 창문의 나뭇가지 그림자가 무섭다고 말한 것은 신66이다. 그런데 홍종두는 ‘이제야’ 자른다). 그 사이를 매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홍종두가 경찰서를 탈출하면서 네번이나 절규하듯이 외치며 반복하는 “불쌍한 어린 양”). 그 순간 홍종두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한공주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며, 그 숭고한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용서하는 것이며, 그것만이 자기가 그녀 앞에 돌아올 수 있는 길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 구원의 서사를 모두 볼 수 있는 자리는 오직 당신, 화면의 편집 바깥에서 시간 순서대로 질서정연하게 전개되는 영화를 보는 당신의 자리밖에 없다. 여기에 바로 홍종두가 끝내 자신의 행위가 강간이 아니며, 한공주가 결국 그것이 강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또는 기어이 경찰서를 탈출해서 나뭇가지를 자르러 가는 이유가 생겨난다. 홍종두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대신 더 많은 죄를 저지른다.

경찰서를 도망치고(신118), 길거리를 지나가는 여자를 협박하고(신120), 한밤중에 가로수를 자른다(신127). 그 모든 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다. 여기 그 일련의 죄를 한공주는 그 결과 외에 알지 못한다. 오직 당신만이 그 일련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죄의식 없는 죄란 언제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다. 홍종두는 이 순간 성자가 된다. 우리는 그 성자의 내면화를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좀더 정확하게 우리가 그 내면화의 과정 그 자체이다. 홍종두와 한공주는 그 과정을 지키기 위해, 동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좀더 단도직입적으로 세상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여튼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사고를 거부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괴롭히는 세상에서 희생하면서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용서하고, 끝내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만들어낸다. 여기에는 유치하긴 하지만 홍종두와 한공주, 그리고 당신을 한편으로 하고 세상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이분법이 중요해진다. 당신을 제외하면 세상의 그 누구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다.

마치 기독교 교도들만이 예수의 기적을 믿는 것처럼. 홍종두와 한공주는 세상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해진다. 물론 그들의 담보는 당신이다. 당신은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성자의 유일한 인질이다. 그러나 당신은 자발적인 인질이다. 홍종두는 한공주가 깊이 잠들기를 바라며 나뭇가지를 자른다. 그렇다. 그건 한공주가 깊이 잠들게 하기 위해서, 잠자는 숲 속의 공주마마께서 계속 장군님을 기다리면서 깨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세상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은 여전히 똑같이 대할 것이다. 세상을 바꿀 수 없으면 내가 바뀌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 순진한 순응주의는 그들을 더 깊은 잠으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한공주가 잠자는 동안, 우리도 안심하고 잠을 잘 것이다. 그건 거절할 수 없는 선택과의 협상, 단 한번도 가져본 것이 없는 것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불안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의 정체는 물론 현실에서의 휴머니즘의 실천이다. 당신의 이해는 이 영화에 절대적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당신은 그들을 책임져야 한다. 왜냐하면 착한 홍종두와 한공주의 대칭은 악한 그들의 가족이 아니라 현실 속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착한 것과 악한 것 대신에 착한 것과 현실적인 이들 사이의 대립 사이에 당신이 끼어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 정도에서 끝내기를 당신은 간절히 바랄 것이다.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현실에 문제가 생기거나 모든 것이 환상의 혼란극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창동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단 한 장면도 할애할 생각이 없다. 또는 그런다고 바뀌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윤리적으로 바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바르지 않다.

짝을 지우고 떠넘겨라, 이기적인 휴머니즘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 전에 환기할 만한 숏. 강간으로 몰려서 경찰서로 가는 대목에서 두개의 장면이 이상하게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공주와 섹스를 하다가 잡혀가면서(신109) 경찰차 안에서 홍종두가 “음주운전해서 교통사고 낸 거랑요, 폭행이랑요,… 강간미수요”라고 대답하자 옆에 묵묵히 앉아 있던 형사가 물어본다. “너 변태지? 솔직히 말해봐, 변태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어지는 경찰서 조사실에서(신111) 다른 형사가 취조하다가 반문한다. “아, 저런 애를, 참 나 인간으로서 이해가 안 되네, 야, 임마, 솔직히 성욕이 생기데?” 질문은 간단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말이 목표로 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뇌성마비 장애자를 보고 섹스를 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나는 것은 변태거나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그 말이 영화에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오직 세상에서 홍종두만이 한공주를 여자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자리의 비대칭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공주를 여자로 대하는 것은 홍종두가 남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홍종두는 세상에서 비참하게 오해받을수록 그의 인간적인 숭고함은 더욱 고결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한공주는 여자의 자리로 물러나야 한다.

나에게 가장 이상한 대목은 마지막 장면이다. 이 이상할 정도로 한공주에게 행복감을 안겨주어야 한다는 이창동의 강박관념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나는 알 수가 없다. 도대체 (그 앞의 127신) 아파트에서 매달린 채 홍종두가 잡혀가는 신과 완전히 동떨어진 채 따로 떠도는 128신 한공주의 마지막 숏, 그래서 이것이 마지막 장면만 아니라면 용서하기 힘든 이 숏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만일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이창동의 개인적인 숏이라면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때로 영화에서 정말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장면들이 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이 장면이 자꾸만 그 자신을 위한 숏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이창동에게는 뇌성마비 장애자의 테마가 있다. <초록 물고기>에서 막동이의 형제 중 한 사람이 뇌성마비 장애자였던 점. 그건 지금도 잘 이해가 안 되는 인물 설정이다).

그러나 서로 앞을 다투어 감동했다고 말하는 영화 <오아시스>의 ‘마지막’ 장면이라면 나는 이 장면을 끝내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 장면은 한공주의 완전한 항복으로 끝난다. 이 영화의 마지막 모습은 한공주이지만, 그 목소리는 홍종두의 것이다. 이 장면의 효과는 매우 인상적이다. 카메라는 방문 너머에서 한공주를 지켜본다. 우리는 아주 불편한 자세로 집안 청소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메라의 자리에 서서 그렇게 그녀를 보아야 한다. 그것이 그녀의 행복이다. 사실 그녀의 빗질은 아무 의미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이 영화는 한공주를 뇌성마비 장애자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자리에서 홍종두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예정된 그 ‘아내’의 자리에 가져다놓는다. 여기에는 어찌되었건 쌍(couple)을 지어주어야 한다는 뿌리깊은 우리의 이데올로기가 재빨리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지도 모르는 짐 한공주를 슬그머니 홍종두에게 떠넘기고, 그들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면 우리의 임무는 그것으로 다한 것이다. 우리가 마음속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두 사람이 맺어지기를 비는 까닭은 사실은 홍종두를 버리는 그들의 가족이나, 또는 한공주를 이용하면서도 방치하는 그녀의 가족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둘 중 어느 쪽도 떠맡을 마음이 없다. 또는 이 영화는 그 둘 중 누구도 책임질 생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자체로는 행복하지만, 동시에 더이상 그들에게 우리를 괴롭히지 말아달라는 폐쇄된 결말이 있다. 그것이 이 아주 이상한 장면의 이기적인 휴머니즘이다. 영화는 결국 동화로 끝나고,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세상은 괴롭지만 영화는 즐겁다

감동받은 당신은 <오아시스>를 비난하는 상대에게 짜증을 내거나, 분개하거나, 화가 날지도 모른다. 그건 이 영화가 건네주는 환상의 자리가 그만큼 달콤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지키려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고작 무엇인가? <오아시스>가 해피엔드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영화 <오아시스>가 만들어놓은 그 자리에서 나와, <오아시스>가 끝나고 난 다음 한공주와 홍종두가 살아야 하는 세상을 생각해보라. 별 네개를 달고 나와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내와, 결코 여동생을 내주면 안 되는 가난한 오빠 가족을 둔 뇌성마비 장애자 한공주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런데도 당신은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겠는가? 그 마지막 장면에서 그렇게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이 정말 무엇을 말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약간 눈물을 흘리고 감동받아서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영화관을 나설 때, 바로 그 순간 당신의 실천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당신은 감동받은 것이 아니라 안심한 것이다. 저 황량한 세상 속을 환상으로 버티며 살아가는 홍종두와 한공주의 진심을 알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어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이해심과 자비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은 안심해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아시스>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교착상태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 영화는 우리의 환상을 부추기기 때문에 역겨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래 갖고 있는 환상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와서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홍종두와 한공주의 사랑을 당신만은 이해하고, 그래서 감동을 받았다고? 어떻게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사랑을 당신만은 이해할 수 있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그렇게 대답하도록 유도되었기 때문에 당신의 자리만이 숭고하고, 자비로우며, 안전한 것이다. 당신은 항상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 가 있다. 하긴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다. 세상일을 잊고 영화관에 온다는 것은 그만큼 비겁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영화를 본다고 해서 세상을 완전히 잊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세상은 괴롭지만 영화는 즐겁다. 왜냐하면 우리 대신 영화 속의 주인공이 괴롭기 때문이다.

정성일 / 영화평론가 hernes59@hanmail.net

김석영님 홈페이지에서 펌


싸우면서 닮아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모두가 조폭 영웅주의와 맹목적인 의리, 폭력의 계몽주의라고 할 만한 뒤틀린 권선징악, 칼부림과 난투극의 잔인무도한 가벼움의 웃음, 그들이 절에서, 가정에서, 고등학교에서, 사회 곳곳에서 우리에게 삶의 깨우침을 안겨주려고 몸부림친다. 강우석은 이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이번 그의 영화「공공의 적」의 주인공은 경찰이다. 그러나 나쁜 놈과 싸우려면 나쁜 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쁜 경찰이 나쁜 부자와 치고 받으면서 법도 질서도 없이 싸운다. 선과 악은 이미 그 경계를 서로 넘나든 지 오래이다.
한 마디로 말해야 한다면 이 영화는 강우석의 최고걸작이고, (미안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작가영화이다. 어쩌면 (그 자신이 10년 전에 만들었던)「투 캅스」의 하드보일드판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에는 강우석의 진심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근심스러운 선과 악의 비대칭에 관한 잘못된 유혹이 담겨 있다.


선과 악의 비대칭에 대한 잘못된 유혹

마치 이동통신 바보광고를 흉내내는 듯한 말투로 강력반 강철중 형사(설경구)는 자기를 소개한다. 아시안게임·올림픽 권투 금메달리스트였던 강철중은 이제 몸매도 형편 없이 불어난 채 뇌물과 치사한 등쳐먹기에 몰두하고 있는 무능력한 형사이다. 아내와는 사별하고 아이 둘을 키우며 노모한테 구박받으면서도 장독에 숨겨놓은 ‘삥땅친’ 마약을 어떻게 처리할지만 관심거리일 만큼 한심한 ‘민중의 지팡이’이다.

펀드매니저인 조규환(이성재)은 투자고객을 위해서라면 남을 파산시키는 일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아내와 아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착한 남편이며 아버지이다. 하지만 그는 지는건 못 참는다. 심지어 자기 차에 부딪힌 택시 운전기사로부터 사과하지 않는다고 길거리에서 망신을 당하자 기어이 찾아가 한밤중에 벽돌로 내려칠 만큼 집요하다. 그는 ‘실업자 천만이 넘쳐나는 우리 사회에서 열심히 살아야지’를 거듭 다짐하면서 약육강식에서 승자의 자리를 결코 놓칠 사람이 아니다.

그 둘이 마주친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장대비가 밤새 내리던 여름날, 강철중 형사는 잠복근무 도중 뒤가 급해서 한밤중에 비를 맞으며 전봇대 아래에서 큰일을 보던 중이었다. 조규환은 일주일이면 열 배가 되어 돌아올 펀드 투자액 18억 원을 고아원을 위해 써야 하니 주말까지 돌려달라는 아버지의 단호한 결심에 분개하여 부모를 몰살하고 나오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칼부림으로 스쳐 지나간다. 강철중은 이를 악물고 다짐한다. “내가 착한 경찰은 아니다. 하지만, 부모를 죽이고 돈 챙기는 놈은 세상에서 같이 살면 안 된다. 니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지 않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놈들하고 세상에서 같이 숨을 쉬는 것은 정말 역겨운 일이다. 누구라도 비분강개하여 강철중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내면서 조규환 같은 인간을 끝장내야 한다고 동의할 것이다. 강우석은 시종일관 한눈 팔지도 않고 사건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달려든다. 이 영화에는 수많은 범죄 에피소드들이 있는데도(잠복근무 중에 생수를 사먹는 동네 슈퍼마켓의 아줌마를 제외하고) 단 한 명의 여자도 등장하지 않으며, 멜로드라마는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제 놈을 때려잡는 일만 남았다. 아, 결국 세상은 다시 해피엔딩을 맞이하고 우리는 안심하고 잠들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이상하다. 우리는 대립의 도식을 정확히 세워야 한다. 선과 악은 결코 대칭적인 대상이 아니다. 인간 존재가 선하다면 왜 인간과 악이 대립하는 곳이 아니라, 선과 악이 대립해야 하는가라고 물어본 사람은 칸트이다.「공공의 적」은 잘 정리된 대립처럼 보인다. 경찰과 살인범,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자와 모든 것을 가진 자, 그런데도 가진 자는 더 갖고 싶어한다.
게다가 놈은 부모를 돈 때문에 살해한 패륜아이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이 자기 차를 가로막고, 뷔페에서 실수로 자기 와이셔츠에 음식을 흘렸다고 상대를 불문하고 사정없이 죽인다. 대상을 용서할 수 없는 악인으로 몰고가기 위해서 점점 더 조규환은 정신병리학적으로 기괴한 괴물 같은 존재가 되어간다. 이제 괴물을 물리쳐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강철중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강철중,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여기서 강철중도 부패한 경찰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가장 이상한 것은 조규환은 원인이 있는 악의 대상인데, 강철중은 원인이 없는 선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비 오는 날 ‘씨발, 재수 없게 똥싸는 데 엎어지는 바람에 손에 똥묻은 김에 개인적인 원한’으로 조규환을 악착같이 만사 제치고 뒤쫓는다.

우리 사회에 대한 두 개의 혐오
그게 당신은 우스운가? 나는 소름이 끼친다. 그 밑바닥에는 결국 강철중도 조규환과 같은 인간이라는 무시무시한 진실의 증후가 깔려 있다. 또는 같은 말이지만 여기에는 사악한 순환의 술래잡기가 존재한다. 그것이 술래잡기가 된 가장 은밀한 이유는 그 술래들이 왜 자기가 술래가 되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규환이 그렇게 돈의 노예가 된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며(그는 펀드에 성공하지 않아도 가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 마찬가지로 강철중이 그렇게 망가진 형사가 된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에는 오직 인물의 전형성만이 두 주인공을 지배한다. 부자는 나쁜 놈이 될 수밖에 없으며, 형사는 타락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두 주인공이 영화에 등장할 때 그들은 이미 망가진 다음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우리 사회에 대한 두 개의 혐오가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그 하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는 천민 자본주의의 욕망에 대한 분노이고, 다른 하나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등쳐먹는 국가 관료제도의 억압에 대한 자포자기이다. 얼핏 보기에 대조적으로 그려진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사실은 매우 비대칭적인 관계라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형사로 관할구역을 돌아다니며 그의 ‘숨은’ 공권력을 과시하는 강철중 형사의 비리현장은 세세히 밝혀지고 있지만, 정작 괴물 같은 조규환이 어떻게 그 자리에 올라왔으며, 어떻게 부를 축적했는지에 대해서 이 영화는 함구무언이다. 정반대로 조규환의 부모와 아내와 아이들과 집안이 세세히 담기는 반면, 강철중의 가정은 그의 장독대 말고는 나온 적이 없으며, 그는 엄마 없이 자라는 두 아이에 대해서 단 한순간도 아버지로서 걱정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부의 사적 축적과 국가권력의 공공성이라는 대조가 그들의 개인적인 묘사에서조차 선명하게 그 끔찍한 비인간성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그 둘은 서로 빈여백을 채워준다. 그 둘이 하나가 되었을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들이 살고 있는 모습의 모순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영화는 그 둘이 평화롭게 공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의 비극은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에 마주친다. 누가 나쁜 선택이며, 누가 더 나쁜 선택인가? 강철중과 조규환이 마주치는 순간, 미끄러지듯 엎어지면서 똥을 밟은 것은 사실은 우리들이다. 우리는 ‘똥 밟은’ 기분으로 그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

비겁한 침묵의 결사공동체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순간 결정을 미루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물어보아야 한다. 왜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하는지 심판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들은 웃으면서, 우리를 대신하여 ‘똥 밟은’ 강철중을 선택한다. 여기서 이미 결판이 난 것이다. 강우석(과 우리들)은 조규환을 버리고, 강철중을 선택한다. 같은 말이지만 천민 자본주의를 버리고, 야비한 국가권력을 선택한다. 차라리 뇌물을 적당히 주고, 적당히 타협을 하고, 교통법규에 걸리면 1만 원을 찔러주고, 그렇게 살아가는 편이 부자들의 약육강식을 보는 것보다 나은 세상이라는 믿음이 이 영화의 결론이다. 우리는 천민 자본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타협한 관료제를 선택하는 것이 옳은가? 물론 정답은 그 둘이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칼부림을 하는 자들은 그걸 알지 못한다. 모든 부자들은 부자들의 적이며, 모든 관료들은 (카프카의) 그레고르이다. 감추어진 범죄의 원인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우리들의 무능한 시선은 사소한 일에만 분노한다.

「공공의 적」은 세상은 단순명쾌한 이분법으로 단칼에 보여준다. 대중들은 그러하기를 바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바로 이 복잡한 구조의 범죄에 얽혀 있으며, 자신이 불행한 피해자이자 동시에 은밀한 가해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의미심장하게도) 악덕 사채업자와 맞서 싸우는 강철중은 전기톱을 들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우리를 향해 달려든다. 그 순간 화면은 정지되고, 우리는 미친 듯이 날뛰는 강철중의 커다란 얼굴에 비명을 집어삼키며 영화관에서 도망쳐 나와야 한다. 비명을 지르면 당신이 범행을 자백하는 것이기 때문에, 웃음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총총걸음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는 비겁한 침묵의 결사공동체이다. 세상의 위태로운 조화는 그 침묵의 변기통 위에 놓여진 줄 위에서 곡예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선택한다는 것은 ‘똥 밟은’ 것이다. 하여튼 밟아야 한다. 결국 밟은 것이라면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그게 대통령 선거를 앞둔 올해 첫 번째 한국영화로부터 보내온 메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