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2.0 1주년에 부침
영화저널은 어디로 가는가?

항상 기억을 돌아보는 것은 사람을 스노비즘에 빠지게 만든다. 그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보고 싶게 만드는 것은 영화잡지를 만들면서 보낸 나의 삼십대가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영화를 구출해야 한다는 사명에 불타고 있었다. 영화는 구경거리였으며, 그저 도구상자였으며, 예술비평가들은 저속하고 타락한 것으로 여겼으며, 철학자들은 단세포의 대중적 활동으로 취급했으며, 대중들은 자신들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이 위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영화 애호가들은 지하에 숨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끌어내고 싶었다. 나는 영화잡지가 진지가 되기를 꿈꾸었으며, 지면이 해방구가 되기를 소망했으며, 영화에 관한 대화가 여기서 시작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동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경쟁하고, 동시에 연대했다. 이제 우리들은 제 할 일을 다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내 생각으로 당신들(영화저널들)은 너무 많이 나아갔다. 또는 방향을 잘못 잡았다. 당신들은 손익계산서에 너무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영화의 흥행이라는 경주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자본의 경기장에서 벌이는 경제적 환원주의자들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영화보다 영화를 둘러싼 시시콜콜한 잡담에 너무 많은 관심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당신이 다루고 있는 영화가 한국영화일 때 당신은 지나치게 비겁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이를테면 영화저널에서 한국영화는 다 걸작이다! 정말 이래도 되는가?) 당신들이 그러는 동안 당신들의 사이트에서 독자들은 당신들에게 맞서고 빈정대고 너희들끼리 놀면 우리는 우리끼리 논다는 섹트주의가 점점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혹시 영화저널들은 해방구를 결국 비참하게도(그리고 끔찍하게도) 자발적으로 게토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이 말이 Film2.0의 생일에 어울리는 축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의견의 다양성을 위해서 Film2.0이 우리 세기에 살아남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해서 하소연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들이 영화 애호가들 앞에서 떳떳하게 대답하기를 바란다. 당신들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영화저널을 해방구로 만들었습니까?

정성일(키노 편집장)

 

화양연화花樣年華In the Mood for Love

감독 왕가위
열혈남아
아비정전
중경삼림
동사서독
타락천사
해피투게더 1998 깐느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수상
화양연화 2000 깐느영화제 기술상 및 남우주연상 수상

촬영 크리스토퍼 도일(두가풍)
출연 장만옥/양조위

중년의 부부 두 쌍이 있다. 그들은 같은 집에 세들어 살고 있다. 그들은 어느날 자신의 아내 또는 남편이 서로 내연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사랑에게 배신을 받고 또다른 사랑으로 그것을 어루만지려 한다.

중년에 새롭게 찾아온 사랑이란 힘들고 조심스러울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가볍고 스피디한 요즘 세상에서 보면 ‘집으로 가는 길’의 그들만큼이나 답답하다. 그러나 참고 참고 또 참으면 그들의 사랑에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키노 편집장 정성일 씨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좌파의 이상을 식지 않은 가슴으로 뿜어대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인 중의 한 명으로 왕가위를 거론했다. 그는 왕가위의 작품 전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왕가위라는 사람 전체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빌리면 왕가위는 영화 작품 활동을 통해, 영화와 함께 성장하며 나아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왕가위의 영화를 본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나 화양연화를 같이 본 이의 말에 의하면 왕가위의 영화는 전체를 다 엮어서 볼 때 한 줄로 꿰어 나아가는 곳을 볼 수 있다고 하니 정성일 씨의 말은 빈말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왕가위에 대한 나만의 이미지가 모자이크처럼 명확치는 않지만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사랑에 버림받은 남녀의 또다른 사랑 키우기에 촛점이 모여져 있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라틴 음악을 지겹게 들으며, 또 전화면에서 본 것 같은 영화 속의 데자뷔를 일으키는 화면들을 반복해서 보며 감정 과잉은 아닌가 할 정도의 분위기를 억지 흡수하며 보았다.

장만옥과 양조위는 방을 마주하고 있는 집에 같은 날 이사와서 운명일지도 모르는 스침을 반복하며 사랑의 운을 띄운다. 그리고 그러한 예감은 양조위의 아내가 장만옥의 핸드백과 같은 것을 쓰고 있고 장만옥의 남편이 양조위의 넥타이와 같은 것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며 서로를 보듬으면서부터 구체화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기 위해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다가감을 거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래도 가장 아름다운 한 때를 향해 나간다.
이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중년의 유부남, 유부녀 사이의 숨길 수밖에 없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같이 본 이의 말처럼 상처를 간직하고 자신을 안아 줄 사람을 찾으면서도 동시에 타인에게 다가가지 못하거나 다가가는 데 서툰 사람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사랑을 잃은 사람의 상처 쓰다듬기로부터 시작된 사랑이라는 점에서 추측하는, 자기 연민의 정서적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들은 이별해야 할 순간을 대비할 만큼 소심하고 이미 결말을 예고하고 있는 사랑을 한다. 그래도 그 사랑의 순간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다. 양조위가 머무는 모텔을 나오다 정지하는 장만옥과 양조위처럼, 그 순간은 그냥 그렇게 멈추어 있고 싶은 순간이다. 거기에 라틴 음악의 끈적끈적함과 서로 스치며 지나가는 슬로 모션과 담배를 물고 있는 양조위를 비추는 스탭 프린팅(정확한 용어인지는 모르겠다)이 더하여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때가 묘한 그리움의 이미지가 되는 것 같다.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치고는 그 줄거리의 전개가 밋밋하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가 이 영화를 냉정하게 뿌리치지 못하게 하는 힘은 아무래도 조심스럽고 소심한 그들의 사랑이 주는 아련하고 애타는 정서에 있거나 음악과 화면이 주는 이미지의 정보에 대한 궁금증에 있는 것 같다.

이 영화가 던져주는 정보의 양이 아직 나의 좁아터진 머리와 가슴으로는 감당하기에는 버거워서 억지춘향격의 생각이거나 잘못 짚은 가닥이 많을 지도 모른다. 대충의 느낌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어야 다음에 다시 볼 때 보탬이 될 것 같아 긁적여 본다.

아, 그리고 내가 긁적이는 것들이 모두 내가 떠올려 낸 생각이거나 또는 전적으로 옳은(?) 생각이 아님을 모두들 아시리라 믿는다. 나 역시 보는 눈이 좋지 않아 남의 눈을 빌려 내 느낌이나 생각의 테두리를 가다듬고 어줍잖은 뼈대를 갖추기도 하니 앞으로도 오해 없이 글을 읽어주시기 바란다. 나는 어디까지나 기록하면서 살찌우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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