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루스 노부스

진중권 베를린 자유대학 박사과정·철학

파울 클레의 천사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림을 보는데 눈물이 핑 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을까? 원래 음악은 디오니소스적인 것. 인간의 원초적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를 하는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회화는 아폴론적인 것, 그리하여 예로부터 인간 정신의 합리적 부분과 관계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림을 보며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웬 주책일까?

아, 그것은 클레의 그림을 말한다. 대단한 그림이 아니다. 그 안에서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가슴 뭉클한 드라마가 아니다. 그 안에는 이렇다 할 스토리, 그러니까 바라보는 이에게 감동을 줄 만한 이야기가 없다. 그렇다고 찬란한 색채와 형태의 유희로 관객을 압도해 버리는 현상학적 스펙터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가 공책에 아무렇게나 그린 듯한 우스꽝스런 천사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앙겔루스 노부스. 신천사(新天使).

왜 눈물이 나오는 걸까? 오랫동안 찾다가 드디어 발견했다는 기쁨에서? 하긴 그림의 소장지를 보니 예루살렘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유럽에서 나온 클레의 화집에서 이 그림을 찾아 보기란 어려울 수밖에. 아무리 찾아 봐도 는 있으나 는 없었다. 그러니 우연히 그 그림을 찾았을 때 내 기쁨은 얼마나 컸겠는가? 그래서 나온 눈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왜? 그 그림이 양식적으로 클레의 예술언어에서 현격히 벗어난 것도 아니잖은가? 화집에서 비슷한 그림들을 수없이 보면서 왜 하필 이 그림인가?

어쩌면 이는 순수한 미적 체험이 아닐 게다. 내가 그 그림을 보는 순간 흘린 눈물은 모든 현실적 고려에서 추상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무관심적 주목의 산물이 아니다. 어쩌면 이는 근대적 의미의 미적 체험이 아닐 게다. 외려 이 체험은 정치라는 혼합물이 섞인 불순한 체험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불온한 체험이다. 하지만 순수한 미적 체험이란 무엇일까? 왜 미적 체험은 항상 순수해야 하는가? 그것이야말로 근대 부르주아의 미학적 환상이 아닐까? 자기들의 삶의 산문성, 자기들이 만든 세계의 산문성, 그 무미건조한 삶의 한복판, 소위 ‘사적’ 공간의 한 귀퉁이에 걸려 있는 한 조각의 운문성. 이 장식용 운문성을 위한 미적 이데올로기?

그럴지도 모른다. 가령 예술을 ‘가상’으로 규정함으로써 근대 미학은 예술과 현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존재론적 벽을 쌓았다. 그후 삶과 예술은 미메시스를, 존재론적 닮기를 하는 걸 포기했다. 그리하여 예술은 현실과 관계없는 향유의 대상, 값싸게 팔리는 문화상품, 나아가 사회적 신분을 가리키는 기호로 전락하여 산문적이기 짝이 없는 부르주아적 삶을 치장하는 장신구가 되어 버렸다. 삶을 예술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영감의 원천이 되는 대신, 예술은 부르주아적 삶과 부르주아적 세계의 비미학성을 감추는 포장지가 되어 버렸다. 삶은 예술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예술은 콘서트홀과 미술관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미적 체험 역시 대부분 부르주아적 성격을 벗지 못한다. 하지만 이 그림만은 다르다. 그것은 정말로 나를 감동시킨다. 그리고 그 감동은 한갓 인식론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내 존재에 마법을 거는 존재론적 사건이다. 왜 그럴까? 왜 이 한 장의 그림에서 나는 무정한 사물이 아닌, 말을 걸어 오는 인격을 느끼는 걸까? 천사의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무언가 내게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리하여 천사의 눈과 나의 눈은 하나가 된다.

왜 그럴까? 아마 벤야민 때문일 게다. 어디선가 이 그림을 보고 남긴 그의 글 속의 한 구절이 내 머리 속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나는 벤야민의 글을 통해 그 그림을 보았다. 그래서 그림을 보며 눈물이 핑 도는 해괴한 체험을 했던 것이리라. 아마도 야만의 힘에 쫓기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이 맑시스트 랍비의 삶과 작업의 비극성이 그림을 바라보는 내 눈앞에서 오버랩되었을 게다. 그렇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라는 글에 나오는 구절이다.

파울 클레의 그림이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라고 하는. 천사 하나가 그려져 있다. 마치 그의 시선이 응시하는 곳으로부터 떨어지려고 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의 눈은 찢어졌고, 입은 벌어져 있으며, 그의 날개는 활짝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는 아마 이런 모습이리라. 그의 몸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거기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 눈앞에 제 모습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그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끊임없이 폐허 위에 폐허를 쌓아 가며 그 폐허들을 천사의 발 앞에 내던지며 펼쳐지는 파국을.

아마 그는 그 자리에 머물러 죽은 자를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한데 모으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한 줄기 난폭한 바람이 파라다이스로부터 불어 와 그의 날개에 와 부딪치고, 이 바람이 너무나 강하여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이 난폭한 바람이 천사를 끊임없이 그가 등을 돌린 미래로 날려 보내고, 그 동안 그의 눈앞에서 폐허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만 간다. 우리가 ‘진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폭풍이리라.

파국이라는 이름의 현실

천사의 머리는 몸통과 날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크다. 저것이 바로 몸에 비해 의식이 과잉 발달한 근대적 인간의 조건(conditio humana moderna)이다. 삶의 한복판에 뛰어들지 못하고 끝없이 관념의 세계만 발전시켜야 하는 지식인의 조건이다.

근육질의 파시스트들은 머리만 자란 이 유태인 천사를 경멸했다. 생각만 하느라 행동력이 결여된 무능한 자라고. 그들은 현실의 밖에서 그 거대한 머리로 관념의 세계만 발전시키는 지식인들을 비난했다. 현실을 움직이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벌거벗은 힘이라고. 너희는 왜 이 냉혹한 진리에 동의하지 않느냐고. 왜 이 야만적 힘의 놀이에 동참하지 않느냐고. 천사는 날개를 들고 있다. 이 거대한 야만의 힘 앞에서 머리만 자란 그는 힘없이 두 손을 들고 항복한 듯하다. 그 커다란 머리로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든, 현실은 내 해석을 비웃으며 변함없이 압도적인 힘으로 나를 조롱한다.

천사의 입은 벌어져 있다. 왜? 놀라움 때문일까?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20세기에도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데에 대한 놀라움은 분명히 철학적 놀라움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 20세기에 도대체 이런 야만이 가능하다는 것은 철학적 성격의 놀라움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파국이다. “승리하는 적 앞에서 죽은 자들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그 적은 승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역사의 개념에 관하여」 vi) 승리하는 자들은 역사를 쓴다. 그리하여 승리하는 적 앞에선, 그들이 쓰는 역사 속에선 죽은 자들은 무사할 수가 없다. 그들은 승리를 확인하기 위해 쓰러진 적병을 확인사살하듯이 죽은 자들을 또 한번 죽인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 전승(傳乘, 계통을 대대로 전해 이어간다는 의미)을 압도하려고 하는 순응주의로부터 전승을 구해내야 한다.”(vi)

입을 벌린 천사는 그 째진 눈으로 하늘 높이 쌓여 가는 파국의 장면을 응시하며, 거기서 떨어지려고, 거기에서 현재를 구원하려고 “죽은 자를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한데 모”아 파라다이스를 향해 날아가려 한다. 잊혀져 가는 죽은 자들의 기억을 되살리고, 패배한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흩어진 자들을 다시 모아서, 한때 우리가 꿈꾸었던 파라다이스로 다시 날아가려는 가망 없는 몸짓을 한다. 그러나 파라다이스에서 불어오는 한 줄기 난폭한 바람이 그를 끊임없이 뒤로 몰아붙이고,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파국의 더미를 바라보며 천사는 파라다이스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알 수 없는 등 뒤의 미래로 밀려 날아간다.

“근원은 목표다.” 천사가 등을 돌리고 있어 볼 수 없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근원은 목표? 목표는 근원? 그렇다면 미래는 인류 역사의 출발점이었던 파라다이스? 그러나 아직 프롤레타리아의 신적 폭력에 마지막 희망을 걸 수 있었던 벤야민과 달리, 역사는 우리에게 이 신학적 목표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목표가 없다. ‘근원’이라는 형태로도 없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완벽한 허무주의뿐. “억압받는 자들의 전승은 우리가 처한 ‘예외상황’이 사회의 정상적 상태라고 가르친다.”(viii) 하지만 허무주의가 패배주의적일 필요는 없다. 심연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절망의 체험은 다른 한편 우리에게 무한한 창조적 가능성을 약속한다.

날개를 편 천사. 그것은 헛된 저항이다. 아무리 날개짓을 하려 해도 천사는 파라다이스로 날아갈 수가 없다. 그래도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강한 바람 때문에 접으려 해도 접혀지지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가 저항을 한다고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안다. 그렇다고 저항을 포기할 수는 없다. 바람 때문에 우리는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저항을 위해 우리 자신에게 장밋빛 미래의 헛된 약속을 할 필요는 없다. 성급하게 급조된 희망의 그림을 그릴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저 저항을 할 뿐이다.

누군가 이 시대에 다시 완성품의 ‘희망’을 얘기한다면, 그것은 아직 그가 절망의 나락까지 체험해 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외려 저 천사의 째진 눈처럼 삶의 근원적 비극성을 냉정하게 응시하고, 우리의 저항이 현실을 파라다이스로 만들 수 없음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렇다고 저항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꿋꿋하게 날개를 펴고 저항을 해야 하는 신천사. 그게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천사는 “죽은 자를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한데 모으고 싶은 모양이다.” 그렇다. 아무리 가망 없는 노력이라 하더라도 천사는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천사들이여, 희망은 미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헛되이 고개를 돌려 미래를 보지 마라. 돌아볼 수 없는 등 뒤의 미래가 아니라 파국이라는 이름의 눈앞의 현실, 끝없이 뒤로 밀려나는 우리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과거를 바라보라. 그리고 미래를 위해 그 과거의 기억을 조직하라. 별자리를 짜듯이. 구원은 그 기억 속에 있다.

“지나간 것을 역사적으로 분절화한다는 것은 ‘그것을 원래 있었던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위험의 순간에 번득이는 기억을 발동시키는 것이다.”(vi) 그리고 위험의 순간에 번득이는 이 과거의 기억 속에서 “희망의 불꽃”(vi)을 보라. 그 불꽃은 전람회의 벽에 걸린 작품처럼 존재의 지속성을 갖는 그림이 아니다. 밤하늘에서 터졌다가 사라지는 불꽃처럼 생성의 순간성을 갖는 그림이다. 한번의 데생으로 시작부터 완성의 순간까지 지속되는 타블로(tableau,그림)가 아니라, 순간순간마다 모습을 바꾸며 다시 그려야 할 섬광과 같은 실체 없는 영상이다.

천사의 째진 눈은 하늘로 쌓아 올려지는 파국의 더미만을 바라보며 슬퍼할 뿐 아니라, 그 암울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반짝반짝 터지는 희망의 불꽃들을 포착하는 감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검은 하늘에 뿌려진 별들의 배열 속에서 감추어진 형상을 찾아내듯이 산산히 흩어진 이 불꽃들을 이어서 별자리를 만들어 내는 상상력을 갖고 있다. 이 우울한 창조의 즐거움 때문에 그는 등을 돌리지 않고 눈앞의 현실을 응시하며, 눈앞에서 펼쳐지는 과거를 보기 위해 날개를 펴고 끊임없이 미래로 밀려날 뿐이다. 신천사들이여, 날개를 펴라. 그러나 경고. 그 날개는 한번 펴면 다시 접지 못하리라.

존재론적 닮기의 놀이

이제껏 쓴 몇 편의 글에서 나는 서양 미학사를 탈근대적 관점에서 읽으려고 했다. 근대 미학의 관점으로 해석된 미학사 속에서 나는 근대적 에피스테메(episteme,인식구조)가 배제해 버린 탈근대적 요소들을 찾아내어 부각시키려 하였다. 창작의 영감으로서 ‘광기’, 예술의 힘으로서의 ‘도취’, ‘우연’의 미학, 내 속의 자연(=신체)과 내 몸 밖의 ‘자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대적 합리주의에 의해 대상의 ‘모방’(imitatio)이라는 의미로 축소된 미메시스의 본래적 의미를 되살리려고 했다.

예술은 누추한 존재를 고상하게 치장하는 장식품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작품에 관한 딜레탕트적 담론의 놀이로 자신을 다른 그룹의 인간들과 구별하고자 하는 자들이 벌이는 하릴없는 사회적 상징작용의 기호로 소모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아름답게 형상화하는 데에 필요한 창조적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예술을 닮아야 한다. 예술은 인간이 자기를 닮기를 원한다. 예술은 한갓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와 존재론적 닮기를 하는 대화의 상대자가 되어야 한다. 근대의 인식론적 미학은 이제 서서히 탈근대의 존재미학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 예술은 한때 그것과 근원적으로 함께했던 것,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작별하여 미적 왕국의 밖으로 추방되었던 윤리와 다시 만나게 된다. 사회적 아노미라는 무정형의 상태. 예술은 여기서 인간들에게 자기 삶을 하나의 작품처럼 꾸며 나가는 데에 필요한 영감을 주면서, 이 천박한 사회에 에토스를 형성하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 또 에토스는 미학적일 때 비로소 자기의 독단성을 벗을 수가 있다. 왜? 미는 개성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저마다 미적 가치를 갖는 수없이 다양한 삶들이 서로 교호작용을 할 때, 비로소 사회는 폭력적 독단성과 무정형의 천박성에서 동시에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앙겔루스 노부스. 이 글을 나는 이제까지 내가 쓴 글의 미학적 결론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로 제시한다. 클레의 그림을 통해 나는 파라다이스의 들뜬 희망을 참담한 좌절감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80년대 우리들의 슬픈 경험을 처리하려고 하였다. 승리하기를 멈추지 않는 자들에 의해 독재자들의 망령이 차례로 부활하고, 우리를 위해 죽은 자들의 무덤이 적들에게 비웃음당하고 모욕당하기 위해 파헤쳐지고 우리에 의해 잊혀지고 외면당하는 이 위험의 순간에, 나는 다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었다.

천사는 등을 돌리고 있다. 뒤를 돌아보지 말라. 이는 흔히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천사는 등을 돌리고 있다. 그리하여 천사는 뒤를 돌아 미래를 보지 않고 눈앞에 펼쳐지는 과거의 파노라마를 응시한다. 저항을 위해 굳이 돌아볼 수 없는 미래의 최종목표를 설정하고 거기에 분홍빛 채색을 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문명의 시작부터 이제까지 걸어온 우리의 역사를 직시하는 회고적 인식이다. 그 경험들의 단편을 별자리처럼 짜내어 거기서 희망의 불꽃을 찾아내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라. 아직도 사회 곳곳에 흩어져 조그만 실천을 하는 불꽃들이 보일 게다. 그 불꽃들을 연결하여 별자리를 짜듯이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희망을 새로 짜야 한다.

날개를 펴고 뒤로 밀려 날아가는 신천사처럼 우리의 저항도 우리를 파라다이스에 가까이 가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소위 물질적 ‘진보’라는 이름의 바람은 우리의 저항을 비웃으며 우리를 사정없이 뒤로 밀어낼 것이다. 숫자로 표현되는 물질적 발전 속에서 자연은 파괴되고, 몸은 망가지고, 정신은 황폐화되고, 인간은 천박해지고… 그리고 그 빠른 발전속도를 미처 따라오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후진성은 우리를 끝없는 절망에 빠뜨리며 우리 발 앞에 새로운 파국의 폐허를 던져 놓을 것이다. 이 위험의 순간. 이는 사회의 “예외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정상적 상태다. 슬픈 얘기지만 사회는 언제나 그럴 것이다. 바로 이 위험의 순간에 나는 현재를 구원하고자 “죽은 자들을 깨우고 패배한 자들을 다시 한데 모”으고 싶다.

앙겔루스 노부스. 저 한 장의 그림은 내게 단지 미적으로 지각해야 할 인식론적 ‘대상’이 아니다. 나와 존재론적 닮기의 놀이를 하기 원하며 그 슬픈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주체, 무력하게 머리만 자란 또 하나의 멜란콜리커(melancholiker, 우울한 기질을 가진 사람)다.

출처는 모름.
과 동기가 만들어 가려는 커뮤니티에서 펌

진중권의 마지막 한마디
[좌파들에게는 80년대의 것을 대체할 사회과학이 없다. 이제는 변화한 상황에 맞는사회과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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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녹, 흑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진중권, 아웃사이더 편집장

굵게 쓰자. 80년대 말 현실사회주의가 맥없이 무너지고, 90년대 중반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스탈린주의 체제인 북한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아사자가 났다. 이는 80년대에 진보진영을 이끌었던 두 가지 이념, 즉 소위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주의(PD), 그리고 이 이념들이 변혁의 전략으로 내세운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NLPDR)의 허구성을 무너뜨린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이론은 실천에 의해 검증이 된다고 할 때, 이보다 더 명백하고 완벽한 실천적 검증은 존재하지 않을 게다. 한 마디로 ‘민족해방’의 이론과 ‘민중민주주의’의 이론은 수십 년에 걸친 거대한 정치적 실험을 통해 우리 눈앞에서 실천적으로 반증이 된 것이다. 이 점을 아직까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증거를 눈앞에 들이대도 결코 자기의 낡은 신념을 버리지 않을 게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더 이상 정치적 태도가 아니라 종교적인 태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를 ‘광신’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80년대에 민중운동이 지니고 있던 긍정성은 그 사이 우리 사회에 적절히 흡수가 되었다. 군부독재가 물러가고, 광신적 반공주의가 힘을 잃고, 시민들의 정치의식은 향상되어, 초보적인 수준이나마 민주주의의 전통이 시작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운동의 덕분이다. 하지만 운동이 갖고 있던 긍정성을 시민사회라는 나무에 주입한 후 민중운동 자신은 낡은 교조의 관성에 빠져 갈 길을 찾지 못한 채 혼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때 변혁을 논하던 지식인들은 ‘포스트 담론’을 새로운 교조로 받아들였고, 갈 길을 잃은 대중들은 뿔뿔이 흩어져 보수화하고, 현장의 민중들은 변혁의 전망을 잃은 채 가망 없는 싸움만 계속해 왔다. 한때 ‘민주주의의 전위투사’로 여겨졌던 소위 ‘운동권’은 더 이상 사회적 존경을 받지 못하고 외려 경멸과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리고 사회 전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정치적 냉소주의가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세력은 합법적인 진보정당의 건설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선거와 설문조사에서 그 잠재력과 가능성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과거에 있었던 진보정당 건설의 시도가 불발로 끝났다면, 최근의 진보정당은 2만에 달하는 당원을 확보하며 장기적인 존속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에는 일단 성공한 듯하다. 또 최근에 건설된 진보정당은 더 이상 과거처럼 선거라는 시기에 합법공간을 선전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한 전술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적 결정과정에 참여함으로써 민중의 정치적 이해를 대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략단위로 사고되는 듯하다. 진보진영의 모든 싸움을 합법정당이 짊어지는 것은 아직 무리이겠지만, 적어도 진보정당 없이 진보 세력의 미래는 없어 보인다.
진보진영이 합법정당의 건설에 뛰어든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이었고, 앞으로 좌파의 실천은 대중운동과 진보정당의 두 축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의 유령

진보정당은 아직 우리 사회에 성공적으로 착근하지 못했다. 진보정당이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진보정당을 추진하는 주체들이 아직 낡은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가령 민주노동당의 강령에는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한 마디로 현실사회주의의 오류를 극복하면서 동시에 서구식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도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구의 국가사회주의도, 서구의 사회민주주의도 아닌 그 제3의 경제체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그 사회를 낙원으로 수식하는 몇 가지 장미빛 형용사만 있을 뿐이다. 생산수단의 국유화에 입각한 현실사회주의도 아니고, 서구식의 사회민주주의도 아닌 제3의 경제체제를 도입하는 거대한 정치적 실험이 가능하리라고 믿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정작 민주노동당 내에서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게다.

진보세력들 사이에는 아직도 동구 사회주의의와 서구 사민주의 사이의 묘한 망설임이 존재한다. 한국의 좌파들이 현실사회주의도, 사회민주주의도 아닌 제3의 체제를 그려낼 능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체제가 가능하다고 스스로 믿는 것 같지도 않다. 설사 그런 것이 가능해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런 사회를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진보세력은 선뜻 ‘사민주의’를 얘기하지 못한다. 왜?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게다. 먼저 과거에 혁명적 사회주의의 입장에서 사민주의를 ‘부르주아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던 데에 대한 쑥스러움이 있다. 낡은 신학적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보니 약속의 땅이 겨우 사민주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도 있다. 서구 사민당의 우경화를 비난하는 극소수의 유럽 좌파의 문헌에 대한 과장된 해석을 통해 너무나도 쉽게 서구의 ‘사회국가’가 한계를 드러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경향도 있다. 그런데 벌써부터 ‘사민주의의 한계’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민주의를 체험조차 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런 망설임은 진보정당의 또 한 축인 사회당에도 존재한다. 사회당의 강령은 ‘반자본주의’를 규정하고 있다.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을 바탕에 깔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 조항은 하나의 철학적 입장일 수는 있어도, 정당의 강령으로서는 부적합한 것이다. 게다가 아도르노가 말한 부정의 변증법은 일체의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 대안을 최종적 대안으로, 즉 역사의 텔로스로 제시하지 말라는 뜻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반자본주의’라는 네거티브 이념은 아도르노 자체를 잘못 해석한 것이며, 사회주의 정당이라기보다는 무정부주의 단체의 이념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당에서 이 강령을 내세운 것은 경쟁상대를 ‘개량주의’로 몰아붙이는 가운데 이념적 선명성을 드러내겠다는 전술적 판단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현실사회주의 붕괴 앞에서 더 이상 제시할 이념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 모든 것이 낡은 좌파적 레토릭의 관성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미국식 자유주의와 유럽식 사민주의 사이의 갈림길에 서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한국 사회는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극단적인 경제적 자유주의 체제로 변모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 사회의 모든 좌파들이 다 달려들어 우리 사회의 진로를 왼쪽으로, 왼쪽으로 돌려도, 그 결과는 유럽식 사회국가는커녕 돈 내고 돈 먹는 미국사회보다 더 열악한 천민자본주의로 귀결될 것이다. 대단히 우울한 전망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인정해야 한다. 이런 사회에서 도대체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논하고, 언젠가 마르크스에 필적할 만큼 똑똑한 어느 좌파 몽상가가 그려낼 장미빛 사회주의의 그림을 강령이라는 도화지에 담아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에게는 사회민주주의마저도 충분히 몽상적인 목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진영에는 아직도 낡은 공산주의의 유령,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유령에 대한 추억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민족주의의 망령

진보세력의 발목을 잡는 또 하나의 귀신은 좌파 민족주의다. 이들과 이념적으로 철저하게 단절하지 않고서는 진보정당은 미래가 없다. 북한은 화석국가,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은 스탈린주의의 유물이다. 지도자 숭배, 인권유린과 같은 정치적 권리의 문제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90년대 중반부터는 수십만의 아사자를 내는 등 인민의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보장해주지 못했다. 이는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상 가장 처참한 실패이며, 이로써 북한의 힘에 기대어 통일을 이루려는 연북 통일노선은 현실적으로 결정적인 파탄을 맞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세력의 일각에는 아직도 북의 노선을 맹종하는 경향이 분명히 존재하고, 유감스럽게도 이들의 영향력이 아직도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제 진보 진영은 이들과 명확한 선을 긋고, 북한의 인민들에게 벌어진 가공할 사태에 대해 이들에게 엄중히 윤리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들은 북한의 인민들이 아사를 할 때 돕지도 않았으며, 그런 사태를 초래한 북한정권의 무능과 경직성에도 침묵을 했기 때문이다.

소위 ‘민족해방’ 계열에도 여러 흐름이 있다. 이 모든 흐름을 다 배척해서는 안된다. 이 중 특정한 흐름, 즉 남한의 운동을 한민전을 통한 대남선전공작에 내맡기고, 통일운동을 기껏 북의 외교적 입장이나 대변하는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하는 소위 ‘골수 주사파’들은 철저히 고립시켜야 한다. 이제까지는 대충 모른 척하고 넘어가 주었지만, 좌파가 정치적 진출을 준비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이들의 망동을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된다. 이들이 남한 운동에 끼친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불행한 드라마를 21세기에 또 다시 반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이 싸움은 국가보안법 철폐투쟁과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만 철폐되면 소위 주체사상파는 ‘다미선교회’ 처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유일사상의 추종자들은 논쟁하다가 말이 막히면 늘 국가보안법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려 한다. 바로 이를 국보법 철폐의 논리로 제시해야 한다.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라. 그러면 수령숭배자 따위는 좌파가 나서서 철저히 논파하겠다.’

이는 한갓 정치적 노선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이들의 궤변은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도저히 그냥 넘어가 줄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아사의 위기를 피해 중국으로 넘어가려다 압록강에서 익사한 시체를 두고, ‘남한에도 여름에 익사자가 발생하지 않느냐’고 태연히 말하는 사람들. 북한에 아사자가 발생한 것이 ‘미제의 봉쇄정책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사람들. 북한의 인권문제를 제기하자, ‘탈북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어줄 수 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 심지어 ‘탈북자들은 대부분 범죄자’라고 강변하는 사람들. ‘수십만 아사자가 발생해도 북에서 시위나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북한 주민이 당을 믿고 따르고 있다는 증거’라고 자랑하는 정치적 도착증 환자들. 도대체 이들이 그 그릇된 신념을 포기하려면 얼마나 많은 인민이 더 굶어죽어야 하는 걸까? 인두껍을 쓰고 도저히 할 수 없는 이런 망언들이 진보진영의 일각에 유포되어, 어린 학생들의 정신세계를 황폐화하고 그들을 글자그대로 비판적 사고능력이 없는 ‘돌대가리’로 만들고 있다.

민족주의는 낡은 이념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아직 ‘민족적 과제’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 남아있다. 따라서 ‘민족해방’의 노선의 역사적 긍정성이 다한 것은 아니다. 이들의 주장 속에는 제대로 정식화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지금도 합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다. 다른 한편 ‘민족해방’ 계열에는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헌신적인 대중 활동가들이 있다. 이들은 진보진영의 정치적 진출을 위해 꼭 필요한 귀중한 인적 자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민족해방계열’이 그 동안 한국의 운동사에서 발휘한 긍정적인 역할이 있고, 그 운동에 참여했던 수많은 대중들의 긍지와 자부심이 있다. 북한을 맹종하는 자들의 낡아빠진 이념의 포장지를 벗겨내고 ‘민족해방’ 계열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구원해야 한다. 한 줌도 안 되는 주체사상 환자들과 명확한 선을 긋고, ‘민족해방’의 이념을 합리화, 현대해야 한다. 지금은 21세기, 마침내 정신들 차릴 때도 됐다. 유령은 사라져 그 추억만 남았어도, 망령은 아직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 있다.

사민주의

현재 좌파의 위기는 무엇보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동안 좌파가 해왔던 말들은 무섭게 변화하는 사회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해 현실적합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일반 민주주의적인 요구들은 제법 사회에 수용되었으나, 정작 좌파가 지향하는 가치는 하나도 실현된 것이 없다.
구조조정이니 뭐니 해서 고용사정을 날로 불안해져만 가고, 그것을 완화할 사회적 안전망은 전무한 상태에서, 좌파는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실천적으로는 아무 가망 없는 현장의 투쟁에 매몰되고, 이론적으로는 혁명적 사회주의의 낡은 레토릭의 관성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변화된 상황 속에서 좌파의 새로운 정치적 임무가 어떤 것인지 머릿 속으로 구체적으로 그려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가공할 우경도를 완화하고 이 사회에 좌파적 가치를 각인하는 작업은 아직 시작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진보정당은 시민들에게 자기들이 지향하는 사회의 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회상은 어느 좌파 몽상가가 언젠가 그려낼 것으로 기대되는 천상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이 지상에서 실현가능한 형태의 것이어야 한다. 사회주의의 여러 가지 실험 중 그나마 생존가능성을 현실적으로 검증받은 것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뿐이다. 중국이나 쿠바나 북한의 체제는 그 내부의 문제점은 차치하고라도 일단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한 우리 나라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보정당의 선택은 명확하다. 진보정당은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장래에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대체할 대안체제가 탄생하리라 믿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좌파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 사회주의적 계획을 혼합한 ‘사회민주주의’ 밖에 없다. 좌파의 아찔한 관념성은 제발 이 지점에서 멈추어야 한다. 사민주의마저 우리처럼 우경도가 심한 사회에서는 실현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목표인 것이다.

지금 사회당은 대중들에게 사회상을 제시하기를 포기한 채 ‘반자본주의’라는 네거티브한 구호를 아예 강령으로 삼고 있다. 민주노동당에서는 아직 ‘국가사회주의’도 아니고 ‘사회민주주의’도 아닌 제3의 체제를 강령에 담아놓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제3의 길이 어떤 체제인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조심스레 ‘사회민주주의’라는 커밍아웃이 흘러나오고 있다. 사민주의에 대해 가해지는 좌파의 비판들은 대개 맥락이 상당히 벗어나 있거나, 지나치게 정치화한 해석에 근거해 있거나, 우리의 주제와는 전혀 맞지 않게 배부른 것들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따로 본격적으로 반비판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의 좌파들이 사민주의에 퍼붓는 비난은 경제학적 성격의 것이 아니라 다분히 정치학적, 윤리학적, 가끔은 신학적인 성격의 것이다. 민주노동당 내에는 아직 ‘자주적 민주정부’ 운운하는 소수의 우파들이 있으나, 모름지기 진보정당은 색깔을 갖고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색깔은 붉은 색이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사민주의가 되어야 한다.

생태주의

21세기에 생존이 가능한 또 하나의 이념은 생태주의다. 우리 나라처럼 단기간에 고도성장을 하는 가운데 자연생태계를 완벽하고 철저하게 파괴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유럽에 나가 보면 도대체 환경문제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환경과 생태계의 보존에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관심과 비용과 노력을 쏟아 붓기 때문이다. 정작 ‘위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환경문제를 갖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처럼 자연을 마음껏 착취해 먹는 천민자본주의 사회겠지만, 정작 이런 사회에서 생태운동에 대한 시민의 의식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언젠가 제주도에 갔다가 어느 마을에 괴상한 플랭카트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지역개발 가로막는 환경단체 각성하라.’ 이것을 보고 경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경문제의 심각함과 생태의식의 일천함 사이의 이 거대한 간극. 이는 우리 사회에서 앞으로 생태주의 이념이 크게 대두할 가능성을 약속하는 것이다.

원래 사회주의는 생산력 위주로 사고하는 전형적인 근대의 이념이다. 사회주의 역시 ‘자연의 인간화'(마르크스)라는 슬로건 하에 자연을 착취하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근대적인 개발 이데올로에 속한다. 다만 자연을 착취하여 생산한 부의 소유방식이나 분배율을 둘러싸고 자본주의와 대립해 왔을 뿐이다. 때문에 근대적 기획인 사민주의는 탈근대적인 기획인 생태주의와 가끔 갈등을 일으킬 수가 있다. 작은 예이지만 수돗물 불소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사민주의적 관점과 생태주의적 관점의 충돌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생태주의와 사민주의 사이에는 또한 협력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가령 생태주의가 제 목표를 달성하려면, 역시 국가를 통해 시장에 개입하여 거기에 생태계 보존을 위한 한계조건을 설정해야 한다. 시장에 대항하는 이 싸움 속에서, 즉 시장만능을 외치는 자유지상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전선에서 사민주의와 생태주의는 서로 만나 연대를 할 수가 있다.

생태주의는 유럽에서도 소수의 견해였다. 하지만 운동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생태운동은 시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는 운동으로 성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등장한 녹색당은 비록 소수당에 불과하나, 이들이 처음 등장하면서 주장했던 내용들은 이제는 사민당은 물론이고 보수당에게도 받아들여진 상태이다.
유권자들의 표를 얻으려다 보니 보수당까지도 녹색당의 프로그램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생태운동은 정치적 좌파들 뿐 아니라 리버럴은 물론이고 보수주의자까지 참여하는 초계급적 운동이다. 따라서 보수당에서도 그 이념을 무리없이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앞으로 환경문제의 심각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산되고, 생태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참여가 늘어나고, 이것이 정치적으로 실현될 때쯤이면 민주당이나 한나라당과 같은 보수정당에서도 이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아직은 미약하나 상태주의는 앞으로 폭발적인 잠재력을 가진 이념이므로, 진보정당은 누구보다 먼저 이를 끌어안아 제 것으로 해야 한다. 그리하여 진보정당은 적색에 녹색을 첨가하게 된다.

무정부주의

90년대의 지성계의 상황을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소위 ‘포스트 담론’이 새로운 진보적 담론의 구성으로 열매맺지 못하고 다분히 정치적 보수주의로 귀결된 것이 문제일 뿐, 80년대의 집단주의의 편향을 교정하기 위해 어차피 한 번은 거쳐야 할 필연적 과정이었다. 90년대의 의제는 단연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였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정권의 국가주의 이념, 다른 한편으로는 80년대의 집단주의 이념에 틈바구니에 끼어 일방적으로 희생되어야 했던 개인의 자유의 정당한 자기주장이었다. 실제로 운동에 소위 착하고 순진한 ‘대중’으로 참여했던 사람들, 그리고 운동의 언저리에서 운동권의 행태를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운동권에 대헤 커다란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아마 이것이 90년대에 일체의 운동에
대한 냉소의 분위기로 나타났던 것이리라. 어떤 의미에서 90년대에 진보이념에 퍼부어진 무차별적인 냉소는 대중의 복수였는지도 모른다. 90년대에 ‘포스트 담론’이 유행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안에는 ‘민주주의’로 자기를 포장했던 어떤 비민주적인 집단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급진적이어서 종종 대책 없는 무정부주의적 수사로까지 흐르곤 하지만 ‘포스트 담론’에는 다수자의 횡포 아래 고통받는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관심이 담겨 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밥꽃양 사건’은 아직도 운동권이 다수자의 대의를 위해 소수자의 권리쯤은 가볍게 무시해도 보는 낡은 습속에서 헤어나지 못 했음을 보여주는 예다. 그밖에도 운동권 내부에서 있었던 성폭력 사건들은 ‘운동의 대의를 훼손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 그냥 묻혀져야만 했다. 이런 사건이 공개적으로 거론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한편 눈을 밖으로 돌려 운동권의 밖을 보면, 거기에도 수많은 소수자의 문제가 있다. 사회적 평균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는 동성애자들, 그리고 종교적, 정치적 이유에서 징집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진보진영은 거대한 이념에만 눈이 멀었던 과거를 반성하고, 이제 사회적 소수자들의 인권의 소중함을 볼 줄 아는 섬세한 감성을 겸비해야 한다.

무정부주의자들도 당을 만드는지는 모르겠다. 또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표방하는 ‘자율주의’ 이념의 합리적 핵심만큼은 아직까지 집단주의적 정서에서 자유롭지 못한 좌파의 이데올로기 속에 흡수되어야 한다. 종종 가장 민주적이어야 할 좌파의 조직이 수구적이라고 할 정도로 경직성과 억압성을 띠는 것을 본다. 지하조직이 대중조직을 조종하던 과거의 비합법운동의 관성이 남아 있어, 외려 운동권의 조직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더 비민주성을 보이기도 한다. 운동권 내부에는 아직 대중을 동원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정파적 이해관계에서 대중조직을 소위 ‘말아먹으려는’ 음모적 작풍이 여전히 남아 있다. 내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진보정당 내에서도 의사결정 과정은 대단히 비밀스럽다. 이제까지 말만 떠들었을 뿐 좌파 자신이 민주주의를 스스로 실천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런 칙칙한 수구적 작풍을 걷어내고 발랄한 ‘자율주의’ 이념을 전유하여 당의 조직을 직접민주주의의 네트워크로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진보정당은 또 하나의 색을, 즉 흑색을 얻게 된다.

장외투쟁에서 정당적 실천으로

진보정당은 적, 녹, 흑의 연합을 지향해야 한다. 이것이 21세기에 우리 사회에서 생존이 가능한 좌파적 가치들의 목록이다. 진보정당은 이 세 가지의 색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칠해야 한다. 물론 좌파의 실천이 오직 진보정당의 활동만을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진보정당의 밖에도 다양한 좌파적 실천의 영역이 있다. 아직까지도 중요한 것은 역시 현장에서 벌어지는 투쟁에 직접 결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래야만 하는가? 좌파가 진보정당을 결성했을 때 아마도 거기에는 아무런 전망 없이 이루어지는 현장의 투쟁만으로는 ‘일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이해를 대변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을 게다. 올바른 판단이다.
이제 시대가 변했다. 이 변화에 발을 맞춰 좌파의 실천은 서서히 투쟁조직을 운영하는 데에서 정당적 실천을 하는 것으로 무게이동을 해야 한다. 앞으로 좌파의 실천의 본령은 정당적 실천이 되어야 한다.

아직까지 진보정당은 도대체 정당인지 투쟁조직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
의회에 의석을 단 한 석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민중의 이해를 장외에서 대변하다 보니 발생하는 현상이리라. 아직까지 진보정당은 합법정당에 반합법 투쟁조직이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이는 당분간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정당은 투쟁조직의 성격을 벗고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 유권자들에게 진보정당이 또 하나의 운동단체로 비쳐진다면, 그것은 진보정당의 미래에 치명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정당과 투쟁조직은 엄연히 활동의 양상이 다르다. 투쟁조직이 물리력과 물리력의 충돌을 통해 정치적 자기주장을 한다면, 정당은 정책과 대안을 가지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협상과 타협으로써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집단이다. 유권자들이 진보정당에 표를 준다면, 그것은 아마도 물리적 투쟁을 열심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 투쟁을 의회에서의 합리적 토론으로 대체하라는 뜻에서일 것이다. 이제 좌파들은 낡은 운동권의 구태를 벗고 참신한 좌파의 마인드를 갖추고, 정당적 실천의 다양한 양태를 구체적으로 그려내야 한다.

제발 신학자들의 독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사회주의 신학은 개인에게 철학적 정체성을 주는 데에 소용이 있을지는 모르나, 정당의 정체성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가 영원히 지속된다고 믿는 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미신이리라. 경제가 발달하고,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인간들은 점점 더 새로운 욕구를 갖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지금 이 시점에 벌써 먼 훗날을 얘기하는 좌파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가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좌파적 실천을 힘겹게 써넣어 갈 사회라는 이름의 페이지 속에서 탄생할 것이다. 지금 이제까지 해보지 못한 새로운 싸움이 눈앞에 있다. 우리는 대안을 마련하고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해결해야 할 수많은 이론적, 실천적 문제들을 기꺼이 끌어안아야 한다. 새로운 세계는 두려움의 대상이나, 또한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즐거움의 원천일 수 있다.

좌파들에게는 80년대의 것을 대체할 사회과학이 없다. 이제는 변화한 상황에 맞는 사회과학이 필요하다.

“가끔 몇몇 ‘좌파’들의 얘기를 들으며 그 논증 방식이 매우 ‘신학적’이라 느낀다. 사회주의라는 유토피아의 이상에서 직접 논거를 끄집어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편적 이상에서 연역을 하기에, 그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이미 준비된 대답을 갖고 있다. 물론 그 대답은 늘 동일하다. 그 대답은 현실이라는 질료의 저항과 싸운 흔적이 없이 너무나 매끈하다. 저항 없는 표면을 운행하는 자기부상열차, 물론 그 열차는 결코 현실이라는 지면과 접촉할 일이 없다. 그런데 이런 태도로 과연 구체적인 정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장기 게임에서 다른 정치 세력들에게 이길 수 있을까?”(진중권, 『폭력과 상스러움: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푸른숲, 2002), 279-280쪽)

“강준만은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마치 현실을 모르는 유토피아의 거주자인 양 말을 한다. 생각해 보라. 민정당의 품으로 투항한 김영삼 일당이라고 어디 할 말이 없겠는가? 어찌 됐든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문민정부’를 세우고, 전두환, 노태우를 감옥에 보내지 않았던가. 이 역시 역사의 발전 아닌가? 그런데 노무현은 왜 이 역사의 발전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일까? 민정당에 따라 들어가지 않은 노무현은 그 맹목적인 이상주의 도덕 때문에 결과적으로 역사의 발전을 거스른 역사의 반동이란 말인가?

도덕성을 현실성에 대립시키지 말라. 인간이 도덕적이기 위해 현실을 떠나 유토피아로 비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은 현실 속에 사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상의 세계에서 사는 인간들에게는 굳이 도덕성이 필요하지 않다. 천국에는 도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