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길들이기

우리는 ‘국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국가가 직접적, 간접적으로 행하는 감시와 통제는 어느새 우리 몸 속에 기입되어 자동화 메카니즘을 이룬다. 그리하여 우리는 국가가 행하는 간섭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그것이 마치 자기 스스로 알아서 자율적으로 행하는 자기규율이라고 착각한다. 외국에 나가기 전만 해도 주민등록증은 ‘국민’이면 누구나 갖고 다녀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또 그 ‘증’을 얻기 위해 파출소에서 지문을 찍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일본에서 재일동포들이 지문날인을 민족차별이라 반대한다는 보도를 접하면 매우 이상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그 이상함이 우리에게 별로 이상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유달리 강한 반일감정의 덕일 게다. 국가의 간섭은 보이지 않는다. 국가는 투명인간이다.

유학을 갔다가 돌아오니 그 투명했던 국가가 비로소 육화하여 내 앞에 수시로 모습을 드러낸다. 국가는 휴가를 떠났던 병사가 탈영하지 않고 무사히 귀대했다고 보고하기를 요구했다. 돌아와서 한 동안은 동장님 방문을 받곤 햇다. 새 주민증을 만들라고 한다. 열 손가락에 지문을 채취당하는 게 기분 나쁘기도 하고, 주민증 덕을 볼 일이 그다지 많지 않은지라 귀찮기도 해서 차일피일 미루고 아직까지 안 하고 있다. 주민증이 없으면 의료보험 가입도 안 되고,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라는 협박도 귓전으로 흘릴 수 있었지만, "새 주민증을 안 만든 집은 아파트 단지에서 이 집뿐"이라는 동장님 말씀에 괜히 불안감이 느껴진다. 다행히 여권이 있어 그것으로 의료보험에도 가입할 수 있었고, 그 밖의 경우에도 신분을 증명하는 데에 아무 무리가 없었다. 끝까지 버텨볼 생각이다.

외국인인 아내 역시 국가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한단다. 도대체 ‘내가 내 아내와 살겠다는데 도대체 국가가 왜 건방지게 자기한테 허락을 받으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신고도 안 하고 버텼다. 그러다가 아내가 친정을 가던 날 공항에서 관리한테 "자진신고기간이라 용서해주지만, 다음에 한번만 더 신고를 안 하면 벌금을 때리겠다"는 말을 들었다. 이 더러운 꼴을 당한 후 아내가 돌아오자마자 근처의 출입국 관리소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국가가 나눠놓은 행정구역을 따라 우리는 인천으로 가야 한단다. 물어, 물어 어렵게 찾아간 출입국 관리사무소에서 아내는 자기의 사적 정보가 담긴 온갖 서류를 제출하고 기어이 그 열 손가락에 검은 잉크를 묻힌 후에야 비로소 그 잘난 ‘외국인 등록증’이란 걸 손에 넣었다. 이렇게 나의 귀국은 내외가 열 손가락에 잉크를 묻히라는 국가의 신고식으로 시작했다.

아이는 또 어떤가? 출생신고를 해야 한단다. 이 아이는 내 아이인데, 국가가 무슨 권리로 자기한테 "신고하라, 마라" 명령을 하는가? 병원에서 받은 출산증명서를 내고, 서식을 작성하여 드디어 이 땅에 살 권리를 받아냈다. 그걸로 끝난 줄 알았더니 그렇지가 않았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여권으로 귀국한 우리 아이 역시 출입국 관리소에 신고를 해야 한단다. 사진을 찍고, 서류를 챙겨들고 부랴부랴 인천까지 행정구역 맞춰 찾아가서 "내국인 처우"라는 것을 받았다. 아이가 자라 열 여덟 살이 되면 두 개의 국가는 아이에게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명령할 예정이라 한다. 아니, 그 이전에 어느 국가에서 자라든 아이는 "네 정체성은 나와 동일시하는 데에 있다"는 국가의 거룩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랄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수많은 발 품을 팔아서 우리 가족은 게오르규의 <25시>에 나오는 가족처럼 국가라는 군대에 입대신고를 마쳤다.

길들여진 인간

도대체 언제부터 국가가 인간들을 관리하고 길들이기 시작했을까? 엘리아스의 저서 <문명화과정>에 따르면 서구에서는 이 과정이 중세의 궁정사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잔인하고 난폭한 전사였던 봉건 영주와 기사계급이 도시의 궁정사회에 편입되어 왕의 가신이 되면서, 원시적 활력이 차고 넘치던 다혈질의 기사들이 칼과 창 대신에 섬세하고 세련된 교양과 매너로 무장한 궁정인으로 길들여졌다는 것이다. 후에 경제력을 바탕으로 궁정에 편입된 시민계급이 이를 받아들여 자기들의 가치관에 맞게 변형시키고, 그것을 계몽과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일반에 퍼뜨림으로써 오늘날 서구 문명의 정체성을 이루는 그 ‘문명화’라는 것이 완성된 것이다.

이 문명화의 과정을 엘리아스는 근대국가, 즉 중앙집권적 절대왕정의 성립과 연관하여 설명한다. 과거에 봉건 영주와 기사계급 사이의 갈등 해결 방식이 물리력을 동원한 전쟁이었다면, 궁정화가 진행되면서 이 갈등이 점차 왕의 중재에 의해 해결된다. 이렇게 왕권이 점점 강해지면서 과거에 봉건 영주들의 손에 있었던 사형(私刑)의 권리도 국가권력에 의한 사법권으로 이양된다. 말하자면 사적 폭력의 권리가 국가에 이양되어, 국가폭력으로 집중되는 과정 속에서 인간들의 습속과 인성 역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국가의성립과정 속에서 중세의 난폭한 인간이 얌전한 근대인으로 길들여졌다는 것이다.

이 길들여진 근대인의 인성구조를 엘리아스는 ‘내면화’와 ‘합리화’로 특징짓는다. ‘내면화’란 한 마디로 사회적 초자아를 내면화하는 것, 즉 과거의 외적, 타율적 강제를 자기 안의 내적, 자율적 강제로 바꾸어 놓는 기제를 의미한다. 한편 ‘합리화’란 정념을 극복하고 현실의 진행과정의 인과관계를 냉정하게 따져보는 습속을 말하는데, 엘리아스에 따르면 그것은 먼저 격정적인 기사들의 전쟁이나 결투를 차가운 음모와 계략으로 바꾸어놓았던 봉건 귀족 계급의 궁정적 합리성으로 출발하여, 시간이 흐르면 시민계급의 등장과 함께 냉정하게 손익(=interest)를 따지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상인적 합리성으로 변모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합리주의 철학은 데카르트의 발명품이 아니라 사회에서 이루어진 문명화 과정의 이론적 반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철학자들이 ‘정념론’을 쓴 것 역시 이 ‘인간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원형감옥

엘리아스의 ‘문명화’ 이론과 미셸 푸코의 권력비판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논리적 연관을 볼 수가 있다. 푸코의 사상이 전복적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내면화’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이기 때문이다. 근대철학은 의식철학 혹은 반성철학이었다. 이렇게 내면성의 철학이라는 형태로 발달한 서구의 근대철학은 외적 강제가 아닌 내적 규율에 의해 사유하고 행동하는 ‘자율적 주체’를 인간의 이상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푸코는 이 자율적 인간이라는 관념의 역사를 쓰기 위해 국가권력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인간들의 몸에 철저한 강제를 가했는지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관념의 자율성이라는 근대적 이상의 이면에는 엄청난 물리적 폭력을 동원한 신체의 타율이라는 현실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푸코는 ‘내면화’라는 문명화 과정이 얼마나 야만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근대철학의 환상에 사로잡힌 우리의 존재망각을 일깨워준다. 자율적 주체란 어떤 의미에서는 ‘알아서 기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근대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 역시 푸코의 테마 중의 하나다. 근대국가는 자기를 ‘이성’으로 규정하기 위해 광인, 부랑자, 성도착자들을 폭력적으로 배제해야 했다. 기호가 다른 기호와의 차이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듯이 이성도 이성의 타자인 광인, 부랑자, 성도착자라는 소수자들과의 대비 속에서, 그들을 법적, 제도적으로 차별함으로써 비로소 제 정체성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타자들의 존재를 통해 얻어진 이성의 왕국의 차안은 하나의 눈으로 질서정연하게 구획지워진 감방들을 감시하는 거대한 원형감옥으로 상징된다. 어느 국가나 자기 영토 안에 자기가 볼 수도, 파악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못 참아하는 법이다. 그리하여 데카르트가 말한 명석·판명이라는 인식의 이상은 현실 속에서는 철저하게 감시되고 관리되는 사회구조로 실현되어야 했다. 물론 이 역시 한갓 관념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몸에 배제, 구금, 훈육, 강제노동과 같은 육체의 언어가 기입되는 유물론적 과정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기술적 접근과 규범적 접근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것은 절대적 가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피해야 할 부정적 가치도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라는 ‘하나’의 공적 폭력이 없었던 시절엔 자의적인 ‘사형'(私刑)과 ‘전쟁’이라는 다수의 사적 폭력들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엘리아스의 분석 속에서 문명화 과정은 다분히 무질서에서 질서로 이행하는 평화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반면 푸코의 분석 속에서 그 과정은 아이들의 머리에 예법서를 주입하는 과정이 아니라 국가폭력을 빌어 행사되는 거대한 생체권력의 메카니즘으로 묘사된다. 엘리아스가 국가를 ‘이해의 조정자’로 보며 국가 자체의 정당성을 의문시하지 않는다면, 푸코의 분석에는 암암리에 국가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 그것에 대한 급진적 비판이 내재되어 있다. 국가는 거대한 잠재적, 현재적 폭력의 현재화이며, 이를 그는 아르토의 잔혹극을 연상시키는, 17/18세기 잔혹한 처형장면의 묘사를 통해 충격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서 ‘국가’의 문제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각이 충돌한다. 푸코의 계보학적 방법은 냉철한 기술의(=descriptive)의 형태를 띤다. 여기에서는 모든 도덕과 윤리와 제도와 법의 탄생의 비밀이 가차없이 폭로된다. 이 세속적인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자기의 근원을 ‘신의 계율’ 혹은 ‘이성의 법칙’과 같은 말속에 감추는 신성한 권력의 절대성은 간단히 상대화한다. 이것이 푸코의 기술의 전복적 기능이다. 한편 국가권력에 대해 규범적(=normative) 접근을 하게 되면, 우리 그것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를 얻게 된다. 이 경우 우리는 국가의 탄생 및 유지의 비밀이 아니라 그것의 현실적합성을 묻게 된다. 국가가 아무리 폭력적인 근원과 본질을 가졌음을 폭로한다 하더라도, 그 폭로를 국가의 현실적합성, 즉 현실적 필요성을 논박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할 경우, 그것은 ‘발생론적 오류’가 된다.

국가론의 스펙트럼

시민을 길들이는 국가권력을 주제화하면서도 그 비판의 준거에 대한 논리적 검토는 종종 생략되곤 한다. 이 경우 국가는 오로지 시민들을 감시하고 관리하고 강제하는 억압의 메커니즘으로만 표상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탈주’나 ‘노마드’와 같은 아르스 비벤디로 상정된다. 이는 사태를 너무나 단순화하는 것이다. 푸코의 무정부주의적인 비판은 권력의 감시를 느끼는 우리의 감수성을 민감하게 해주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방안을 찾는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거기에서 기계적으로 어떤 대안을 끌어낼 경우 종종 다분히 허구적인, 현실성 없는 얘기를 하게 되기 쉽다. 국가가 존속하는 것은 그 폭력적 근원의 계보학적 비밀이 여전히 베일에 가려 폭로되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여전히 현실적합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의 준거는 기술적, 규범적 관점을 통합한 좀 더 섬세한 관점이 되어야 한다.

국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다. 보수주의자들에게 국가는 "인륜의 실현", 곧 그 안에서만 인간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될 수 있는 존재론적 전제다. 사민주의자들에게 국가는 시장경제에서 비롯되는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평등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개입의 도구로 파악된다. 우익이든 좌익이든 국가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나, 보수주의자들이 국가를 인간의 ‘목적’으로 파악하는 반면, 사민주의자들은 국가를 다분히 ‘수단’으로 바라본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에게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협이다. 이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개인의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나, 이들 역시 사적 소유를 보호해 줄 합법적 폭력(=국가)의 필요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반면 무정부주의자들은 원칙적으로 국가 자체를 거부한다.

이렇게 볼 때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국가의 시민 길들이기에 저항하는 투쟁은 두 개의 근원, 즉 자유주의와 무정부주의적 근원을 가진 셈이다. 이중 자유주의적 저항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고, 반면 무정부주의적 실천은 비교적 역사도 짧고 그 동안 까맣게 잊혀졌다가 최근에 다시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가령 전자주민증 반대, 지문날인 거부, 통신검열 반대와 같은 실천 등이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사적 영역을 보호하려는 자유주의적 저항이라면, 노동거부와 같은 노마드적 생활의 실천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건드리는 무정부주의적 실천이다. 하지만 무정부주의가 반드시 반체제적일 필요는 없다. 극단적인 시장주의자들 역시 시장의 자율적 기능을 위해 아예 국가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무정부주의의 무권력 상태는 자본가의 파라다이스가 될 것이다. 때문에 국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곧 평등주의 이념의 실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접근방법(기술적/규범적)과 이념(좌/우/리버럴/아나키)이라는 두 가지 변수의 조합에 따라 국가권력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가능할 수가 있다. 더욱 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역사는 서구와는 전혀 다른 시계에 따라 발전해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국가의 합법적 폭력을 바라보는 관점은 서구의 그것을 기계적으로 도입한 것이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우리의 상황에 맞추어 특수화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근대적 과제와 탈근대적인 과제가 어지럽게 중첩되어 있다. 이를 무시하고 단 하나의 분석틀로 국가권력의 문제에 접근했다가는 실천적으로 원하지 않은 결과를 낳기 쉽다. 실제로 90년대에 우리 사회를 풍미한 포스트 담론들은 그런 단순화의 오류에 빠져 수사만 급진적일 뿐 실천적으로는 보수주의만 강화한 느낌이다.

근대적 과제

한국에서 근대적인 의미에서 ‘시민 길들이기’는 멀리는 구한말에 시작하여, 일제시대를 거친 후 해방 후에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박정희의 초기 연설에는 종종 "인간 개조"라는 섬뜩한 어휘가 사용된다. 재미있게도 비슷한 시기에 북한의 김일성 역시 글자 하나 안 틀리게 "인간개조"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이 개조사업은 불행히도 남과 북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 의미에서 남과 북을 가리지 않고 한국인은 어쩌면 닥터 박정희와 닥터 김일성이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인지도 모른다. 북에서는 김일성 유일체제의 필요에 맞게끔 인간을 개조하는 작업이 수행되었고, 남에서는 반공과 산업화라는 국가적 과제의 맞추어 인간을 "싸우면서 일하는 보람에" 사는 반공전사, 산업전사로 뜯어고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단지 인간의 머릿속을 조작하는 관념론적 과정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시에 인간의 몸 자체를 뜯어고치는 유물론적 과정이었다. 그것은 자연의 리듬에 익숙한 전근대적인 농민을 공장의 기계리듬에 적응된 근대적 ‘산업전사’로 길들이는 과정이자, 민간인을 분단 상황 속에서 언제라도 전투력으로 전화할 수 있는 병사로 길들이는 과정이자, 동시에 자율적이어야 할 시민들을 국가와 권력자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국민’으로 뜯어고치는 과정이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이 "충효"라는 봉건적 덕목을 정치 이데올로기로 활용했다면, 북의 김일성 정권은 사회주의 인민들을 "효자동이, 충성동이"로 만들어냈다. 남북에서 동시에 이루어진 이 인간개조 사업의 최종산물은 ‘충효’라는 전근대적인 덕목의 세례를 받고 군대식 행진과 공장의 기계의 리듬에 익숙해진 호전적인 산업전사였다.

"체력은 국력이다"라는 말속에 잘 드러나듯이 과거에는 개인의 체력관리조차 국가의 힘, 전투력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국가안보라는 것을 위해 주민증을 만들어 자기의 존재를 신고하고, 이를 위해 지문까지 찍어 국가에 갖다 바쳐야 했다. 이것은 단지 과거의 문제만이 아니다. 생각을 해 보라. 재일동포들에게 지문날인을 시킨다고 일본 정부를 요란히 비난하는 그 사람들이 정작 자기 땅에서 행해지는 주민증과 지문날인의 관행의 문제점은 전혀 의식을 하지 못하지 않는가. (나 역시 외국에 나가서 그곳엔 주민증이란 게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 동안 민주화의 과정 속에서 국가권력은 연성화했어도, 회사, 공장, 학교, 군대 등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여전히 이 낡은 국가주의 습속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개인을 곧바로 국가적 목표에 종속시켜 버리는 이 국가주의 생체권력의 집요한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우리 사회가 아직 완수하지 못한 자유주의적 과제다.

탈근대적 과제

시민을 길들이는 주체는 국가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를 요체로 한 시민사회도 인간을 길들인다. 국가권력이 연성화한 지금, 인간 길들이기의 주체는 점점 더 시민사회의 몫으로 옮아가고 있다. 가령 오로지 입시공부만 하다가, 대학에 들어가 학점을 챙겨가며 컴퓨터와 영어회화만 배운 후, 그렇게 일자리를 얻은 다음에는 오로지 자본의 이윤추구를 위해 자기의 삶 자체를 포기하고 살아가는 남자들. 혼인을 통한 신분상승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에어로빅을 하고, 몸에 칼을 대는 여자들. 이것은 대단히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인간상이다. 굳이 국가가 강요하지 않아도 이렇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길들여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길들여지기는 자발적 성격의 것이기에 결코 외적 강제나 강요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렇게 시민사회 역시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고 알아서 기게 만든다. 아도르노의 말대로 현대사회는 "합리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이고, 이 사회 속에서 인간들은 자율적으로, 합리적으로 길들여진다. 합리화 자체가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새로운 종류의 억압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 가령 과거에는 동네에서 구걸을 하는 나병환자를 볼 수 있었고, 입을 헤 벌리고 웃고 다니는 광인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동네마다 소위 ‘바보’라 불리는 천덕꾸러기들이 있었다. 물론 그 시절에도 이들은 천대를 받았지만 적어도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존재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들의 모습이 우리 삶의 정경에서 사라져버렸다. 푸코의 견해를 빌면 사회가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소위 합리성에 부합되지 않는 이 소수자들은 사회로부터 소리 없이 격리된 것이리라.

주체의 자기구성

서구에서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과정을 단 몇십 년 안에 압축적으로 체험했던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시간 층이 중첩되어 있어, 그 구조를 단 하나의 개념 틀로 도식화하기에는 그 구성이 매우 복잡하다. 가령 ‘광인에 대한 국가적 관리의 잔인성’이라는 탈근대적 테제가 있다고 하자. 이것을 한국 사회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황당무계한 실천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서 광인의 인권침해가 가장 극악한 형태로 일어나는 곳은 국가관리 사각지대인 사설 정신병원이나 사설 기도원의 감금시설이기 때문이다. 또 부랑자의 재사회화라는 근대적 프로그램을 비판하는 탈근대적 테제가 있다고 하자. 그것은 노숙생활이 6개월 이상 들면 소위 ‘방랑끼’가 들어 사회로 귀환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며, 그 생활은 대개 몸을 망가뜨리는 알콜중독과 치명적인 질병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따라서 ‘길들이기’에 대항하는 싸움은 우리 사회의 복잡성을 고려하여, 근대적 과제와 탈근대적 과제를 섬세하게 결합하여 배치하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 근대와 합리성 자체를 비난하는 기계적인 도식은 이 문제에 접근하는 데에 적합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시민 길들이기는 합리적인 방식으로도 행해질 수도 있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행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길들이기’에 대항하는 싸움은 정체성(=동일성) 자체를 거부하고 주체성 자체를 거부하는 소극적인 방향이 아니라, 후기 푸코가 지적한 대로 주체의 윤리적인 자기 구성이라는 적극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단순한 계보학적 폭로에서 벗어나, 자기 내면의 권력의지를 활용하여 자신을 적극적으로 주체로 만들어나가는 존재미학의 실천으로 문제의식을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Magritte 홈페이지에서 퍼옴

학생운동

청춘을 불사른 반란의 불꽃

68년 유럽을 뒤흔든 젊은이들의 혁명 열기… 씁쓸한 패배로 끝난 반권위주의 몸부림

(사진/‘반권위주의’에 대한 공감이 68년 유럽의 학생들을 반란의 광장으로 나오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사회적 행동주의에 냉소를 퍼붓는 분위기이지만, 68년 유럽에서는 (아마도 마지막으로) 힘을 합쳐 사회를 한번 바꿔보겠다는 꿈을 꾸던 사람들이 있었다. 엉뚱하게도 그 꿈의 주체는 자본주의하에서 착취를 당한다는 노동자계급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후의 경제붐 시대에 태어나 아무 어려움 없이 자란 대량소비시대의 젊은 학생들이었다. 대체 왜 이들이 혁명의 주체로 나섰던 것일까? 갑자기 다가온 혁명의 파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급진적 혁명의 요구는 오직 제국주의적 침략과 착취에 시달리는 제3세계의 일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유럽의 길거리에 붉은 깃발이 휘날리고 “체, 체”라고 외치는 게바라의 티셔츠가 걸어다녔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꿈꾸었을까?

답답한 세상, 버릇없이 살고 싶었다

원래 이 운동은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1964년부터 미국의 학생들은 마틴 루터 킹의 흑인운동과 연대를 표명하고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격렬한 정치적 운동, 잘 관리된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탈주하려는 히피문화와 같은 문화운동을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이 운동이 70년까지 비교적 조용하게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미국에서 불어온 이 새로운 바람이 유럽에서는 그 시기를 기준으로 유럽의 전후사를 나눌 정도로 요란한 운동을 낳았다. 이 운동은 짧고 격렬했다. 독일에서는 길어야 1년이었고 프랑스에서 이 운동의 생명은 고작 한달이었다. 하지만 이 짧은 기간에 학생들은 학교를 점령하고, 공동체를 결성하고, 격렬한 시가전을 벌이고,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 수십만의 인파를 모을 수가 있었다.

(사진/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은 ‘바스티유’를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앙시앵 레짐’까지 걷어내지는 못했다)

대체 왜 학생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일까? 독일의 경우 이 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된 것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마르쿠제의 ‘비판이론’이었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학생들의 반란에 동조하지 않고 오히려 적대적 태도를 보였다. 프랑스에서도 그 운동을 이론적으로 대변할 법한 푸코 같은 사람조차 시위현장의 밖에 머물렀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부터 무정부주의에 이르는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을 가졌던 68의 아이들.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현란한 이론이나 그들이 표방한 요란한 이념이 아니라 오히려 반권위주의라는 문화적 특징일 게다. 언젠가 아르테라는 방송에서 내보낸 68특집에서 이제는 중년이 된 당시의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저 버릇없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구세대에 대한 신세대의 문화혁명, 그러니까 급속한 경제성장기를 거쳐 바야흐로 ‘보수적으로 철저하게 관리되는’ 안정기로 이행하던 시기의 답답한 사회에 숨통을 트려는 마지막 생명의 몸부림이었을 게다.

학생들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것을 원했다. 그들은 당시에 지구의 반대편에서 벌어지던 또 하나의 대중 반란, 즉 마오의 문화혁명에 열광했다. 그러나 그것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혁명적 낭만주의자들이 원하던 민주주의는 현실사회주의의 정치체제가 아니었다. 민의를 왜곡하는 구세대의 부르주아적 대의체제를 대체할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이었다. 물론 이 이상을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는 없었다. 그 당시 독일 학생들은 기성세대에게 이러저러한 요구를 내세웠다. 민주적 대학개혁, 비상조처법 도입 반대, 극우파의 의회진출 저지, 미디어 무굴제국의 여론조작에 대한 반대, 그리고 베트남에서 미군의 철수 및 종전. 극우파의 의회진출을 저지한 것 하나를 빼면 이 요구들 중 어느 하나도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68은 패배한 운동이었다.

꺼져가는 불꽃의 마지막 몸부림처럼 짧게 퍼득이던 반란은 곧 사그라진다. 시위는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해산되고, 운동의 지도자 두치케는 우익에 암살당하고, 한 때 반란의 열기에 도취했던 배우들은 운동의 참담한 실패를 목격하고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갔다. 이어 다시 보수의 역공이 시작되고, 살아남은 자들 중의 일부는 민족공동체주의를 설파하는 우익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이 실패를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집요한 극성파들은 좌익 테러리스트의 길을 걷고, 이들이 무고한 시민을 대상으로 저지른 그 잔인한 납치극과 처형극은 물러가는 68의 이미지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이로써 68년 봄은 더이상 기억하기 싫은 추억이 된다. 그리고 떠들썩한 주연 뒤에는 언제나 취중에 했던 언행에 대한 부끄러움이 따라다니는 법.

68은 패배한 운동이었다. 그것도 완벽히 패배한 운동이다. 하지만 원래 운동은 패배 속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 잔인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68의 반란은 거기에 참여했던 대중의 머리 속에는 황홀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긴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체제에 반란을 하는 것처럼 완벽한 해방의 체험이 어디 있겠는가? 어느 세대가 앞으로 또 그런 경험을 하겠는가? 68은 실패했으나 사람들은 살아남아 사회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제서야 거리에서 외치던 이상은 현실 속에 ‘무의식적으로’ 구현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혁명의 효과다. 가장 일상적인 예로 하숙집 방에서 만나는 연인이 주인 아줌마에게 순결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방문을 열어놓을 필요가 없게 된 것도 68 이후다. 학교에서 사제관계를 규정하던 권위주의가 무너진 것도 68 이후다. 반란은 실패했지만 오늘의 정치에는 분명히 그 반란의 경험이 각인되어 있다. 사민·녹색 정권의 수장인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요슈카 피셔도 68년 봄에는 청바지를 입고 길거리에 있었다.

그들은 진정한 광란을 바라고 있는가

68세대의 반란을 우리는 386이라는 이름으로 체험했다. 우리의 저항은 체포와 강집, 투옥과 고문, 학살과 변사로 얼룩졌다. 그러하기에 확립된 복지제도와 비교적 확립된 대의민주주의를 가졌던 선진국에서 일어난 아이들의 반란이 우리 눈에는 그저 배부른 애들의 투정으로만 보인다. 우리세대는 그들보다 더 큰 일을 해냈다. 우리는 바스티유를 무너뜨렸다. 87년 거리에 나갔던 어느 후배는 그때의 경험이 “황홀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네티즌의 말대로 “바스티유는 무너졌으나 앙시앵 레짐은 남아 있다.” 정확하게 그것이 우리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앙시앵 레짐과 싸웠던 68의 반란은 아직 우리에게 다가와야할 미래의 축제로 남는다.

우리의 운동이 패배로 끝났듯이 그 축제 역시 패배로 끝날 것이며 또 패배로 끝나야 한다. 이 답답한 시대에 그 반란은 언제 시작될 것인가? 낡은 우리 세대가 신세대와 연대하여 이 새로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독일에서도 68세대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체험을 한 ‘89세대’를 연결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모두 무위로 끝났다. 신세대의 그것에 비해 우리의 사고방식은 너무나 집단주의적이다. 68세대가 가졌던 그 철저한 반권위주의, 래디컬한 평등의식이 우리에게는 없다. 바스티유를 무너뜨리려면 강력한 조직이 필요했고, 우리는 그 과정에서 적을 닮아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 그저 실패한 그 혁명의 효과를 조용히 자기 삶의 주위에 퍼뜨리면 된다. 우리 역시 잠시 후면 사회의 의사를 결정하는 위치에 오를 것이다.

흉물스럽게 남은 앙시앵 레짐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신세대의 일이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들과 소통을 할 수가 없다. 얼마 전 서울대에 처음으로 비운동권 학생들이 학생회장에 선출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학생회라는 또 하나의 앙시앵 레짐에 대한 반란인지도 모른다. “×같은 세상, ×같이 살자.” 그런 의미에서 거기에는 진보적인 면까지 있다. 하지만 나를 씁쓸하게 하는 것은 이 ‘광란’이 실제로는 가짜 광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정말 광란이 되기에 그것은 너무나 안 위험하다. 유세장에서 춤추고 어쩌고 하는 유치한 짓은 제발 중·고등학교와 함께 졸업하고, 이제 정말로 위험한, 정말 막가는 진짜 반란을 일으켜 보라. 그렇게는 못 하겠지?

진중권/ 자유기고가

[기획특집] 대학, 새로운 이념형의 모색

 

 [3] 담장 밖에서 본 대학

 

사회적 관점에서 대학이라는 제도의 기능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대학을 바라보는 내 관점은 아직까지도 개인적인 성격의 것이다. 즉 나는 그저 공부가 재미있었고, 공부로 밥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대학이기에 가능하면 그곳에 머무르고 싶었다. 나름대로 제도권에 편입되기 위해서 무던히 애도 썼다. 하지만 제도권은 이 처절한 노력을 몰라준다. 제도권이 얼마 안 되는 내 자존심마저 포기하기를 요구했을 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후 대학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요즘은 ‘공부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대학’이라는 선입관을 반박해주는 가능성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생활이 불안정하기는 해도 훨씬 더 많은 정신적 자유과 생활의 여유가 있다. 요즘 나는 ‘일체유심조’라는 원효대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몸뚱이로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인문학은 위기여야 한다.

한때 “인문학의 위기”라는 아우성이 있었다. 솔직히 그때 나는 쌤통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대학제도는 너무 비효율적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논리를 도입해서라도 상업적 경쟁이라도 강요하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인문학의 위기”는 사회에서 존재가치를 입증하지 못한 인문학자들이 자초한 위기이다. 물론 인문학에 경제적의 가치를 생산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인문학이 사회적 현실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제 고민을 발전시켜 왔다면, 지금처럼 ‘통폐합을 해도 문제없다’는 식의 모욕은 듣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의 인문학은 제 존재가치를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

나 역시 시도 때도 없이 ‘경쟁력’ 운운하는 신자유주의적 천박함에는 역겨움이 난다. 하지만 상아탑에도 ‘경쟁’은 필요하다. 공정한 학적 경쟁의 시스템 말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의 상아탑에는 이 경쟁의 메카니즘이 없다.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허탈하게 만드는가. 열심히 공부해 봤자, 승부는 엉뚱하게 결정난다.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 학생들은 일찍부터 학적 능력보다는 외교력, 지적 성실보다는 인간관계의 성실에 모든 것을 걸게 된다. 학문이란 이전 세대의 한계를 깨고 나아갈 때 발전할 수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상아탑에서 그런 것은 어차피 금기다. 그 결과 지식의 시장에서 묘한 독과점의 지배가 형성된다. 여기에서는 당연히 새로운 것이 나올 수가 없다. 지적 도전을 할 시기에 한국의 대학은 순응의 지혜부터 가르친다.
한국의 대학은 현실과 별 관계가 없다. 그곳의 논의는 현실에서 올라온 고민들이 이론으로 결정화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지식은 현실의 문제해결을 위한 노우하우라기보다는 지식인의 신분을 사회적으로 구별짓는 기호일 뿐이다. 현실에 조회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히 지식 발전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왜? 현실에서 검증될 기회가 없는 지식에는 발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과 매치되지 못한 개념은 추상성을 벗을 수가 없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쉽게 표현할 능력이 없는 것은, 그들이 정말로 고차원적으로 사고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자기가 말하는 개념이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반증의 위험이 없는 추상의 높은 수준에서 발언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구름위의 대학

경쟁도 없고, 현실과의 연계도 없기에 한국의 대학에는 프로젝트라는 게 없다. ‘프로젝트’라는 말은 단지 기업과 연결된 몇몇 이공계열에서나 사용되는 단어로 여겨진다. 사실 대학원을 다니면서 내가 가장 놀라웠던 것은 도대체 ‘교수든, 학생이든, 도대체 궁금해하는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학이라는 것이 일단 궁금증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해결하는 프로젝트의 형태를 띄는 것일텐데, 세상에 대해 전혀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이 학을 한다는 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단 경쟁이 없으니 굳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어 제시할 의무도 없고, 현실과의 연계도 없으니 그런 프로젝트가 애초에 필요하지 않다. 프로젝트란 작든 크든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 그것을 설명하는 새로운 틀, 그 속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방식의 체계를 의미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대학에는 이 프로젝트라는 관점 자체가 없다.

할 일이 없으니 당연히 뭔가를 할 의욕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가 없다. 가끔 부산한 움직임도 있으나, 그건 대개 교수님이 어디서 받아잡수신 연구비의 명분을 제공해주기 위한 쓸 데 없는 작업일 뿐,  그나마도 대부분 대학원생들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교수님의 이력서를 화려하게 할 목적으로 프로젝트(?)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때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그 눈동자에는 총기가 없다. 어차피 자기의 일도 아니고, 그 일의 중요성을 정작 그 일을 맡긴 분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내가 번역해 드린 독일 사전의 서문이 두 페이지 가량 교수님의 새 책에 인용부호도 없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다. 내게는 인용임을 안 밝힌 그 양심보다도 중간에 남의 글을 통채로 끼워놓고도 제 생각을 일관성있게 끌고 나갈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이 더 놀라웠다. 내용 이전에 문체론적으로라도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일까?

더 큰 문제는 자기들만 공부를 안 하면 되지, 굳이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들까지 못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뭐 좀 해보겠다고 하면, “튀지 말라”, “멀리 가지 말라”, “왜 허락도 없이 그런 일을 하느냐”는 둥 다양한 제재를 받게 된다. 나는 책을 번역하는 데에도 별도로 교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관행이 있음을 책이 나오고 난 뒤에 욕을 먹는 가운데 배웠다. 내 문제의식을 적어 학회지에 제출한 글은, 어쩐 이유에선지 그게 편집위에 속하지도 않은 원로교수의 손에 들어가더니 결국 그 팔 힘을 동력으로 하여 훨훨 하늘을 날다 쓰레기통 속에 들어갔다. 다른 것은 다 이해해도 이건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 한 사람이 공부하는 게 왜 자기들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한국의 대학, 그곳은 나의 지성적 파악을 거부하는 숭고의 영역이다.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 나온 지금 경제적으로는 쪼달려도 여유가 있고, 자유가 있고, 무엇보다도 정치적, 철학적, 미학적 프로젝트가 있다. 정치적 프로젝트는 한국의 사상시장의 극심한 우경도를 바로잡기 위한 정치철학적 기획이다(<엑스 리브리스>). 철학적 프로젝트는 플라톤부터 데리다까지 서구의 철학사를 언어관의 관점에서 고찰해 보는 작업으로, 내 모든 작업의 인식론적 기초를 이루는 작업이다. 이는 박사과정의 논문과 별도의 작업으로 구체화될 것이다. 미학적 프로젝트는 탈근대적 사유들의 미학성을 드러내고, 기존의 미학사를 탈근대의 관점에서 다시 읽고, 탈근대의 관점에서 근대의 인식론적 미학을 뛰어넘는 탈근대의 ‘존재미학’을 수립하려는 기획이다 (<앙겔루스 노부스>). 이 세 가지 기획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한국의 시민사회를 위한 미학적 에토스의 형성에로 모아진다.

 

잡스런 논문 vs. 꿰뚫는 잡글

대학 밖에서 내가 누리는 또 하나의 자유는 문체의 자유다. 처음에 여기저기에 잡글을 쓸 때는 그저 생활의 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쓰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최근 생각이 바뀌었다. 다양한 주제로 산발적으로 쏘아댄 그 쪼가리 글들이 외려 높은 추상의 차원에서 노는 고상한 글들보다 어쩌면 더 현실을 더 잘 비추어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나의 잡글들은 그 하나 하나를 보면 현실의 파편에 불과하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논문이라는 형식의 평면성을 극복하고 현실의 입체성을 보여주는 큐비즘의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벤야민이 말하는 ‘분산된 지각’의 효과…. (요즘은 벤야민을 읽는다. 나는 그를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사유, 그것을 할 자유, 그리고 최소한의 자존심. 그것을 찾아 나는 대학 밖으로 나와야 했다. 내 잘못일까?

진중권(문화평론가)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