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들을 ‘지도’하지 마세요 – 촛불시위 참가자가 운동그룹 ‘다함께’에 보내는 공개편지
다함께 진영이 촛불집회에서 많이 나대기는 하더라.
마치 자신들이 이 집회에 대단한 책임과 의무를 느끼는 것처럼, 아니 자신들이 아니면 이 집회를 제대로 ‘이끌어’ 가지 못할 것처럼.
소위 운동권의 필요 이상의 시대적 사명감은 스스로에게도 주변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얼마 전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을 보면서도 사실 이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주인공 오형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목도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괴로워 하다가 결국 시대의 증인이 되기는커녕 마지막에 느닷없이, 정말 느닷없이 자살해 버리는데, 이게 운동권의 감수성과 어떤 면에서 닮아 있는 것 같다.
[태그:] 촛불집회
자초한 2mb 시대에 하는 학습…
내 생각에 한국사회에서 집회는 합법적이기가 하늘에 별 따기 같다.
모든 집회를 위법, 불법의 티끌 같은 여지도 사전, 사후에 감시 받으며 해야 한다는 말이다.
노동자, 철거민, 농민, 여성,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의 집회를 교통 체증을 유발하거나 경제 순환을 발목 잡는 것쯤으로 치부해 온 일반적인 인식을 보면 국가기관 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집회는 공공연한 터부 같은 것으로 비쳐진 것 같다.
집회는 부적절하고 성급하며 공격적이고 이기적이어서 곧 악인 것, 이게 한국인이 갖고 있는 정치 사회의식의 상징적 수준이다.
그런데 계급적, 사회적, 문화적 구분의 틀에서 가장 광범위한 당사자를 포괄하는 광우병 수입 논란이 일어나자 시민들은 이제서야 스스로 발목잡고 있던 터부가 자신의 힘임을 느끼는 것 같다.
명박이와 미국과 조중동이 시민을 자극하는 분위기는 점점 90년대를 넘어 80년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고 이로 인해 촛불집회는 쉬지 않고 이어진다.
광우병과 관련한 안전한 식량을 확보할 권리, 자국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국가기관을 가질 권리라는, 시민 내부의 차이를 굳이 따질 필요 없는 포괄적인 의제 앞에서 소위 집회와 이를 통한 연대의 자유는 재조명된다.
나는 적극적으로 이 집회를 지지한다.
그리고 종종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는 이게 바로 한국 시민들이 자초한 문제라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자신의 이익을 눈꼽만큼도 대변해 주지 않을 명박이를 (그에게 투표함으로써, 또는 비슷한 다른 부류로 표를 몰아 줌으로써, 또는 투표하지 않음으로써)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한국 사회에 한 줌도 안 될 핵심 기득권에 봉사할 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 그 멤버인 녀석을 떡하니 대통령으로 뽑아 놓은 것은 자기 자식은 모두 명문대 갈 거라 믿고 자기는 곧 죽어도 중산층 이상이라 믿고 뉴타운 개발하면 바로 자신이 수혜자일 거라 믿던 한국 시민들 자신이다.
이건 말하자면 계급에 대한 배반이라기보다 계급에 대한 착각이다.
나아가 사회적 연대에 대한 배반이라기보다 연대할 대상에 대한 착각이다.
이 착각은 계급적, 성적, 환경주의적, 또는 민주주의적 사회 연대의 힘을 수없이 갉아먹었다.
수많은 가능성들이 진전되지 못한 것은 이 연대에 대한 착각, 그리고 자기 규정에 대한 착각에 원인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항세력이 제대로 뭉치지 못한 것도 이러한 정황에서 일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설령 광우병 문제가 일단락되고 명박이가 이 건에 한해 시민들의 원성에 굴복한다 하더라도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에게는 득이 되지 않을 정책들이 바로 뒤에 한 트럭 이상 줄 서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시민들은 자신이 뽑은 이명박을 대면하면서 자신이 연대해야 할 대상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자기 규정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대선 직전에 한 친구가 한 말처럼 역사에는 가정이 없기 때문에 명박이를 시민들의 학습의 계기로 보는 것은 옳지 않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어쩌면 21년 전에 했어야 했고) 지금 피했어야 할 학습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