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적 공산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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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이 언뜻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진실이라면 어떤가? 또 우리 사회의 진정한 악이 자본주의 동학 같은 것이 아니라, 이윤추구에 대한 끈은 놓지 않으면서도 우리들을 자본주의 동학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시도라고 한다면 어떤가? 빗장 공동체에서 배타적인 인종이나 종교 단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자기폐쇄적 공동체 공간을 일궈 나감으로써 말이다. 오늘날, 말을 통해 진실한 감정을 직접 표현할 수 있는 진정한 공동체,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의 공동체로 회귀한다는 것은, 매우 부유한 이들을 위한 구경거리로서 연출될 수밖에 없는 가짜라는 사실, <빌리지>는 정확히 이를 입증하려는 것 아닌가? 오늘날 악을 대표하는 좋은 예는 환경을 오염시키고 사회적 유대가 무너져 가는 폭력적인 세상에 살아가는 평범한 소비자들이 아니다. 그런 전반적 파괴와 오염을 조성하는 데 전적으로 관여했으면서, 돈을 써서 자기 자신이 저지른 결과로부터 쏙 빠져 나오는 자들, 빗장 공동체에 살면서, 유기농 식품을 사다 먹으며, 자연 보호 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자들이 바로 악이다.

P.D. 제임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서는 영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 마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때는 2027년, 인류는 생식 능력을 잃어 아이를 낳을 수 없다. 마침 18년 전 태어난 지구상 가장 젊은 주민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해당한 참이다. 영국은 항구적인 비상 상태에서 살아간다. 테러 전담반이 불법 이민자들을 뒤쫓고, 국가권력은 불임 상태의 향락주의에 빠져 무위도식하며 살아가는 점점 줄어가는 인구를 관리한다. 향락주의적인 비관주의에 겹쳐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인종차별과 공포에 기초한 통제가 만연한다.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 아닌가? 그러나 쿠아론의 천재적 재능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미래를 그린 이야기는 대부분 일종의 ‘빅 브라더’ 같은 존재를 등장시키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독재에 대한 20세기의 관점이다. 지금 일어나는 독재는 새로운 형태로 가장하고 있다. 21세기의 독재는 ‘민주주의’라 불린다.” 이런 이유에서 <칠드런 오브 맨>의 통치자들은 조지 오웰의 소설에 나오는 ‘전체주의자’ 관료들처럼 제복을 입은 음침한 행색이 아니라, 머리가 깨어 있는 민주적 관리자들이며, 교양도 높고 각자 자신만의 ‘생활 방식’을 즐길 줄 안다. 주인공은 난민을 위한 특별 허가증을 얻기 위해 고위 정부 관리가 된 옛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친구의 사무실은 마치 맨해튼의 상류층 게이 커플이 살 법한 장소이고, 친구는 캐주얼 차림으로 장애인 파트너와 함께 있다.

<칠드런 오브 맨>은 불임을 생물학적인 문제로서 다룬 영화는 분명 아니다. 쿠아론의 영화가 말하는 불임은 이미 오래 전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진단한 바 있다. 니체는 서양 문명이 말인末人, 즉 어떤 열정도 헌신도 없는 무심한 인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말인은 꿈꿀 줄 모르고, 삶에 지쳐 있으며, 어떤 위험도 감수하려 하지 않고 오직 안락함과 안정성만을, 그리고 서로에 대한 관용의 표현만을 추구한다. “이따금 약간의 독을 마시고 유쾌한 꿈을 꾼다. 그리고 최후에는 많은 독을 마시고 유쾌한 죽음을 맞는다. 그들에게는 낮의 쾌락과 밤의 쾌락이 따로 있지만, 건강은 챙긴다. ‘우리는 행복을 발견해 냈어.’ 말인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빡인다.”

제 1세계에 사는 우리가, 기꺼이 생명을 희생할 만한 공적 혹은 보편적 대의를 상상이라도 해 보기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사실 제 1세계와 제 3세계 사이의 분열은 따지고 보면 한 편에는 물질적이고 문화적으로 풍족함 덕분에 수명이 연장되고 만족스러운 삶이 있으며, 다른 한 편에는 초월적인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삶이 있는데, 이 둘 사이의 적대가 더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니체의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 사이의 적대 아닌가? 서구에 사는 우리는 시시한 일상적 즐거움에 빠진 말인이며, 무슬림 과격주의자들은 스스로를 파괴할 정도로 허무주의적 투쟁에 몸을 바치고 모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 드는 사람들이다. ‘안’에 있는 사람들, 즉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빗장 공동체에 거주하는 말인들과 ‘밖’에 있는 사람들 간의 이런 대립에서 점차 사라지는 것은 그토록 화려했던 중산층이다. “중산층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사치품이다.” <칠드런 오브 맨>에 나오는 벡스힐온시(Bexhill on Sea)는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상한 감각이 느껴지는 곳인데, 이곳은 도처에 만연한 숨 막히는 억압이 미치지 않는 일종의 해방구다. 담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이 도시는 난민촌이 되었고, 불법 이민자인 주민들에 의해 관리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무력시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연대활동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희귀한 존재가 되어버린 갓난아기가 이곳에 등장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벡스힐은 공군의 폭격으로 무참하게 파괴된다.”

– <폭력이란 무엇인가>, 슬라보예 지젝, 난장이, p58~61

세상의 진보를 얘기하기에는 지쳐버린 시대에 불안은 진보의 불가능이 아니라 번식의 불능으로 옮아간 것인가. 번식 불능의 시대는 역사의 종착지로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출산/육아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간주하는 자본주의는 사회적 출산에서 자유로운 성관계를 종용한다. 자의에서 시작한 불임 장애. 그래서 인간이라는 종이 더이상 번식하지 않는 것을 이 역사의 마지막으로 가정하는 상상은 충분히 개연성 있다.
나는 이 가정으로도 충분히 디스토피아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짧았다. 바로 지금 우리는 충분히 디스토피아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 바로 뒤에는 전쟁, 테러, 폭력, 배타와 차별, 격리, 환경오염과 쉼없는 파괴가 있다. 2027년의 미래는 바로 지금이다. 바로 지금, 세련된 도심 뒤에는 황무지와 폐촌을 볼 수 있고, 영화 속 영국 불법이민자 난민촌에서 벌어지는 시가전과 같은 장면을 볼 수 있으며 죽은 남편을 안고 통곡하는 아랍의 여인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난민 수용소는 아우슈비츠를 재현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어떤 동일한 형태로 절망적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중요한 시대정신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영국일까? 하필이면 미국이 아니라 영국일까? 과거의 영국, 지금의 미국, 그리고 다시 미래의 영국. 시대를 뒤집어 시대의 원류와 원죄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덧붙여 이 영화가 원하는 희망의 대안은 무엇일까? 백인-앵글로색슨-청교도-남성이 아니라 흑인-오리엔탈(아랍-동양)-불교-여성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예수가 아니라 마리아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