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부>

미겔 고미스의 2012년 영화 <타부>는 무성영화 시대 표현주의 거장 무르나우(Friedrich Wilhelm Murnau)의 1931년 영화 <타부(Tabu : A Story of South Seas)>를 참고한다. 무르나우의 유작 <타부>는 폴리네시아의 보라보라 섬에서 신의 제물로 바쳐질 운명에 처한 레리와 그의 연인 마타히의 도피를 다룬 이야기인 반면, 고미스의 <타부>는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 아우로라와 벤뚜라가 나눈 금기를 넘은 사랑의 기억을 반추하는 이야기다. 고미스의 <타부>는 현재 시점을 다룬 1부 ‘실락원’과 과거를 회상하는 2부 ‘낙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무르나우의 <타부>의 구성을 뒤집어 배치한 것이다. 2부 ‘낙원’은 16mm 필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무성영화의 형식을 취한다. 고미스의 <타부>는 이렇게 무르나우의 영화를 끌어 와서 영화 역사의 여명기를 소환하고 추억한다.

고미스의 <타부>에서 무성영화의 형식은 현실과 환상을 나누고 연결하는 표지판이다. 1부 ‘실락원’ 앞에 짧게 덧붙인 무성영화는 이 영화의 전체 이야기에 대한 느슨한 암시이다. 아내를 잃고 깊이 상심에 빠진 탐험가가 아프리카의 어느 강에 뛰어 들고, 언젠가 악어의 모습으로 아내의 영혼과 함께 한다는 짧은 액자 영화가 끝나면, 1부의 부제가 나오고 삘라르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다. 삘라르가 보고 있는 영화가 앞선 무성영화인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35mm와 16mm, 유성영화와 무성영화, 그리고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이질적 경계를 견디기 위해서는 삘라르-보는 자와 액자 영화-보이는 것으로 잇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이 영화에서 무성영화의 형식은 무언가 재현된 상상임을 알려 주는 장치다. 그런 의미에서 2부 ‘낙원’은 지안 루까 벤뚜라가 전하는 말이 이미지로 재현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고쳐 말하면 이 영화의 2부는 벤뚜라가 아니라 삘라르에 의해 재현되는 환상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를 ‘Be My Baby’라는 노래로부터 유추한다. 1부에서 삘라르는 그의 미술가 친구와 함께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앞선 1부의 시작 지점과 마찬가지로 삘라르가 무슨 영화를 보고 있는지는 제시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삘라르가 보는 영화에서 로네츠(The Ronettes)의 ‘Be My Baby’가 흘러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노래는 삘라르가 폴란드에서 여행 온 마야와 마주친 후 헤어져 걸어가는 직전 장면에서부터 겹쳐서 들린다. 치매가 심해지는 것 같아 보이는 이웃집 아우로라에 대한 걱정, 아프리카의 빈곤과 생태계 파괴에 대한 것으로 보이는 세계 이슈에 대한 근심, 그리고 자신의 집에 방문하기로 한 마야가 약속을 어긴 데 대한 상심 같은 것이 뒤섞여 극장에 앉은 삘라르로 하여금 울게 만든 것일까.

‘Be My Baby’와 눈물은 2부에서 같은 방식으로 반복된다. 아우로라가 벤뚜라에게 마지막 간절한 편지를 쓰고 상심에 빠졌을 때 포르투갈어로 번안된 ‘Be My Baby’가 흐르고 아우로라는 슬픈 얼굴로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은 노래가 흐르는 본 장면 앞 쇼트에서부터 노래가 겹쳐 흐르는 방식까지 동일하게 1부에서 삘라르의 눈물을 재연한다. 마치 삘라르가 아우로라의 마지막 편지를 자신의 경험으로 미루어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순간 나는 벤뚜라의 목소리를 이미지로 상상하고 재현하는 주체는 바로 삘라르라고 생각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의 무성영화 장치는 삘라르의 환상을 향하는 통로이며 이 장치의 카메라는 삘라르의 상상을 대변하는 눈인 것이다.

<타부>는 아우로라와 지안 루까 벤뚜라의 금기를 어긴 사랑의 기억을 삘라르가 이미지로 상상해 보는 이야기다. 아프리카 식민지에 정착한 포르투갈 지주 집안의 아우로라는 남편과 사이에서 아이를 임신한 시기에 이웃에 이사 온 벤뚜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 끝은 도피와 살인으로 치달은 파국이었다. 누구에게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그 기억을 아우로라 생의 마지막 순간에 벤뚜라가 증언한다. 금기를 어긴 둘의 사랑은 짧지만 강렬해서 벤뚜라의 말처럼 사랑하는 시간 동안 미래는 애매하고 실없어 보였다. 도덕률을 위반하는 데 대한 죄책감과 근심도 아우로라와 벤뚜라가 서로에게 몰입하는 것을 방해할 법하지 않았다. 아프지만 아름답게 추억하는 그들의 사랑은 아우로라의 농장을 품던 타부 산의 그것처럼 시원적인 낭만과 죄악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아우로라와 벤뚜라의 위험한 사랑 이야기에 빠져 드는 동안 동시에 나는 이 이야기를 추억하며 보는 것이 온당한지 갈등하게 된다. 소위 불륜에 대한 도덕적 지탄의 감정 때문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세탁된 낭만성을 감지하면서 드는 불편함 때문이다. 포르투갈이 여전히 제국의 얼굴을 하고 아프리카 식민지를 통치하던 시기 지주 계급에게 허락된 특권적 낭만주의를 어떤 향수의 감정에 취해 봤다고 생각하면 나는 몇 번이고 돌아서서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미 내게 자신 안의 갈등을 보여 주고 있었음을 뒤늦게 생각한다. 무성영화의 구간에서 때때로 이야기를 겉도는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아우로라가 저택 앞 마당에서 탁구를 치다가 비를 피해 집에 들어가면 카메라가 빗속에서 탁구대를 치우는 아프리카 원주민을 한참 동안 더 쳐다보는 것처럼 말이다. 아프리카 원주민은 이 영화의 이야기에서 배제되어 있지만 동시에 영화에서 내내 얼굴을 비춘다. 백인 인물들이 내레이션 속에서 사건을 만들어 가는 픽션의 세계에 있는 동안 원주민은 존재 자체의 세계로 이야기 사이의 간격을 채운다.

이는 무성영화의 형식 위에 목소리 내레이션을 배치하면서 도모하는 무성영화적 실험이다. <타부>는 내레이션을 무성영화 시대의 자막 같이 활용한다.그리고 내레이션의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 여백, 잉여 공간을 늘려 놓는다. 이미지는 목소리를 재현한 후 이내 잉여 공간을 식민지 원주민으로 채운다. 그것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본래 무성영화의 이미지가 사운드와 불일치함을, 그리고 삽입 자막의 단순한 재현 이상의 서사적 힘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 속에서 2부는 이렇게 읽힌다. (1부의 마지막 장면으로부터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벤뚜라가 말하는 동안 삘라르는 즉각적으로 그 말을 이미지로 상상해 재현한다. 이윽고 벤뚜라의 말과 말 사이 간극 속에서 삘라르는 식민지 원주민이라는 다른 이미지를 상상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렇게 내레이션 목소리는 표면의 이야기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반면, 잉여를 채운 이미지는 그 이면에 자리한 침묵하는 다른 진실을 드러낸다.

결국 <타부>는 무성영화적 실험을 통해 벤뚜라의 이야기 목소리가 누락하는 타자를 상기하려는 시도다.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제국과 식민의 역사에 대한 죄의식이 자꾸 튀어 나와서 이야기의 균열된 틈으로 원주민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침입해 괴롭히는 상황을 다룬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내적 갈등 상황의 주인공은 물론 삘라르일 것이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자 이타적 세계주의자인 삘라르의 면모는 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질문은 계속 이어진다. 이 영화의 상상적 자아가 삘라르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왜 아우로라를 걱정하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것일까.

무르나우의 <타부> 속 연인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원주민의 체제로부터 스스로 해방되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제국이 보기에는 말이다. 이같은 생각이 내포한 오리엔탈리즘의 위험을 인식했음이 분명하게 미겔 고미스는 제국 백인의 사랑으로 이야기의 주체를 비틀었다. 여기서 감지되는 명백한 의도를 따라, 고미스의 <타부>가 무르나우의 <타부>를 무성영화의 가능성 안에서 반성하고 재발견하려는 시도라고 이해하려면 2부 ‘낙원’의 이야기를 향수 어린 태도로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고미스의 <타부>는 제국의 아우로라와 벤뚜라를 둘러싼 이야기의 세계, 그리고 그 바깥에서 엄존하는 침묵하는 이미지의 세계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남긴다. 삘라르에게는 무엇이 실없는 것이었을까. 유념해야 할 것은 아우로라와 벤뚜라가 사랑에 빠진 그 시절 타부 산 어귀 아프리카의 식민지에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원주민의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 영화에 대해 내가 해야 할 일은 이야기에 현혹되지 않고 이미지를 반성하며 다시 보는 것이다.

아, 정말 오랜만에 블로그에 포스팅해 본다.
힘도 없고 의욕도 없는 생활이 계속되니 트위터로 배설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블로그가 죽어 가는 것이 안타깝다.

어제 밤에 본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 대한 몇 가지 메모.

  •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장철수 감독을 찾아 보니 일본 유학 중 영화 ‘섬’을 보고는 바로 김기덕 감독을 찾아가 영화에 입문했다 한다. 디테일과 정합성이 아니라 상징화, 의미화된 표상으로 제시되는 인물과 플롯들, 거칠고 불균질한 축약과 단도직입적인 전개 같은 면모는 김기덕의 영화와 닮은 점이다. 김기덕의 영화는 문법보다는 의미의 전개를 위한 경제학에 충실하다. 인물의 입체적 성격이나 사건의 인과성보다는 행위의 의미, 그리고 그 의미 사이의 충돌에 집중하는 영화.
  • 영화에는 도시와 시골, 남성과 여성, 억압과 복수, 희생자와 목격자 같은 대립항들이 존재한다. 어떤 대립항을 영화의 축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할 얘기도 다양할 것 같지만 나는 세 번째, 네 번째 대립항이 중심 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앞의 두 대립항으로는 할 얘기가 많아 보이지 않는다.)[1]씨네21 771호에 실린 황진미의 글을 보면 여성주의 관점에서도 이 영화는 할 말이 충분히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 해원은 모든 사건의 전말을 목격하는 증인(이 되어야 할 사람)이다. 그녀는 여성 폭행 사건의 범인을 증언하기 거부하고 전세금 때문에 대출 문제로 찾아 온 독거노인의 딱한 사정을 애써 외면한다. 눈 앞의 부조리도 모른 척 하고 싶은 NIMBY 소시민의 무관심이 그녀의 한 속성이다. 해원의 외가 무도에 사는 어릴 적 친구 김복남은 그런 면에서 해원이 직면하는 부조리한 상황의 최고점에 있는 희생자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신은 침묵하고 있겠는가 묻는 것 같은 극단적 예인 것이다. 노동 착취, 인격적 모독, 강간 등 김복남이 겪고 있는 억압적 상황은 금기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억압과 폭력, 착취 같은 눈 앞의 문제를 모른 척하는 한 중산층 여성이 자신의 무관심을 질책당하고 사죄하는 과정이다.
  • 무도라는 가상의 공간은 특이한데, 섬에서 귀한 남자들을 지키기 위해 마을 사람 모두가 억압 질서에 동참한다.(마을 사람들이라고 해 봤자 할머니들밖에 없다. 악한 질서에 대한 노파들의 광기어린 동조는 무엇을 뜻하는가?) 순박하고 무지 무고한 복남에게 벌어지는 악행의 진실은 은폐되고 폐륜은 묵인된다. 무도는 김기영의 ‘이어도’보다 섬뜩한 범죄 공모의 실험대다.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을 떠올리는 건 어떨까?)
  • 이 섬에 살기 위해서는 악인이 되거나 악한 바보가 되거나, 굴종하는 바보가 되는 수밖에 없다. 씹으면 사람이 맹꽁이처럼 바보가 된다는 맹꽁이풀은 외상적 경험 또는 진실을 외면하고자 하는 무도 사람들의 욕망을 은유한다. 무도 사람들은 섬의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맹꽁이풀을 씹으며 적극적으로 바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 김복남은 영화 중반 이후 복수의 살인마로 변하고 무도 사람들을 무참히 죽인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살 이유도 없는 시점에 억압된 희생양은 원귀가 되어 돌아온다. 특이한 것은 김복남이 해원마저도 죽이려 든다는 것이다.
  • 이 영화는 해원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해원이 중반부쯤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시종일관 해원의 시선이 숨어 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숨은 목격자로 기능한다.
  • 김복남은 샘터에서 철종을 죽인다. 그리고 이 현장을 보고 놀란 해원 옆에는 김복남이 낫을 들고 서 있다. 해원은 공포에 질려 달아나지만, 내가 보기에 김복남은 해원을 해칠 의도가 없어 보였다. 이후에도 김복남은 해원에게 직접적인 위협의 의도를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해원이 낫을 든 김복남을 다시 대면하는 순간도 해원은 무도를 오가는 배 선주 득수(그도 어렸을 때 해원과 김복남을 괴롭힌 무리의 하나로 보인다)와 함께 있었고 김복남은 득수를 처치할 참이었다.
  • 해원은 득수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뭍으로 간신히 왔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휴식을 취하다 잠이 들었다. 이후 갑자기 복남의 딸이 만종의 발길질에 죽던 바로 그 상황, 해원이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복남이 도움을 청하는 간절한 눈빛으로 해원을 바라보는 장면이 삽입된다. 복남의 핍박이 전개되던 영화 중반부에 숨어 있던 목격자의 시선이 폭로되는 순간.
  • 그래서 나는 김복남이 경찰서에서 해원을 죽이려 하는 장면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위의 인서트컷 이후 해원은 놀란듯이 잠에서 깨고, 옆에는 김복남이 해머를 들고 있다. 복남은 마치 해원이 깨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제서야 해원을 해치려 든다. 나는 이 때부터가 해원의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경찰서 실내에서의 장면이라고는 하지만 해원이 잠에서 깨고 난 다음의 조명 톤은 이전과 확연히 다르다. 그리고 어차피 복남은 무도를 떠나 뭍으로 왔고 그토록 바라던 서울로 가 볼 희망도 생겼다. (그토록 처절한 억압과 분노, 살인 후에 새로운 시작이 가능할까 싶지만.) 게다가 복남이 해원을 죽여야 할 이유가 무도 사람들만큼 크지도 않지 않은가. (뭍에서 온 경찰에게 해원은 다시 한 번 증언하기를 거부했다. 이것이 복남의 살해 동기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래서 나는 복남이 해원을 죽이려 드는 경찰서 신은 해원의 침묵과 외면에 대한 죄의식이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닐까 가정해 본다. 착취와 모독, 그리고 살인을 목격한 충격에서 벗어날 때쯤 해원의 죄의식이 김복남이라는 원귀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이 영화는 해원이 부조리의 피해자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양가적인 감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해원이 억압 당하는 이들에 대해 갖고 있는 일말의 동정심과 성가시니 외면하고 싶다는 무관심, 그리고 저들의 잠재된 분노의 폭발성에 대한 어떤 공포심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진부한 해석인가…)
  • 복남이 해원에게 ‘넌 너무 불친절해’라고 하는 말은 ‘난 10여 년 동안 나를 도와 달라고 너에게 편지를 보냈어. 그리고 넌 무도에서 내가 어떻게 당하는지 똑똑히 지켜봤어. 하지만 넌 애써 모른 척 하려고 했지. 해원, 네가 나를 살인자로 만든 거야’라는 말로 풀 수 있을 것이다.

추가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 대해서는 남다은의 글을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2010.11.08)

각주

각주
1 씨네21 771호에 실린 황진미의 글을 보면 여성주의 관점에서도 이 영화는 할 말이 충분히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