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2

김규항 칼럼

영화감독 장선우, 박광수, 여균동은 매우 특별한 사회적 환대 속에 그들의 영화를 시작했다. 그 특별한 사회적 환대란 대개 그들의 출신대학과 약간의(아주 약간의) 80년대 이력을 근거로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의식있는 엘리트’의 자격으로 영화를 시작했다. 그들의 데뷔작 <성공시대> <칠수와 만수> <세상밖으로>는 그들에 대한 사회적 환대에 신뢰를 심어주었다.

오늘 그들의 필모그래피는 갈수록 그들에 대한 특별한 사회적 환대를 비껴간다. 장선우의 최근작은 섹스로 정치를 말한다는 <거짓말>이다. 그런 해석에 대해 장선우는 모호한 태도를 보이곤 했지만, <거짓말>에 대한 그런 해석 역시 장선우에 대한 특별한 사회적 환대가 관련되어 있다. 장선우가 만든 영화엔 어떤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 전문가들(서구 전문가들의 한국어판인)이 협력함으로써 <거짓말>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나 <감각의 제국> 따위 이른바 섹스로 정치를 말했다 공인된 영화들의 계보에 등재된다.

<거짓말>은 그런 영화들과 같은 계보에 등재될 자격이 있어 보인다. 다만 <거짓말>을 비롯, 섹스로 정치를 말했다. 공인된 영화들은 섹스로 정치를 말하는 영화의 계보가 아니라 포르노도 사회물도 아닌 정체불명의 활동사진의 계보에 등재되는 게 좋겠다. 그 영화들은 섹스로 정치를 말하고 있다는 주석이나 해설을 지참하지 않고는 그 영화들 스스로 섹스로 정치를 말하고 있음을 드러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 정체불명의 활동사진들은 현실 속의 구체적 변혁 의지를 포기한 일군의 유럽 살롱좌파들이 자신들의 열패감을 마스터베이션하기 위해 마련한 자폐적 이론 집착증(포스트 맑스주의니 문화과학이니 하는)의 영화적 변종이다.

<우묵배미의 사랑> 이후 장선우의 필모그래피에 대해 전문가들은 변화무쌍한 예술적 천착이라고 한다. 상식의 입장에서, 그 필모그래피는 어떤 진지한 예술적 천착이라기보다 하고 싶은 건 뭐든 하고야 말겠다는 변덕무쌍한 욕망에 가깝다. 요컨대 장선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기회를 믿기 어려울 만치 제멋대로 사용하는 참으로 염치 좋은 사람이다. 그런 염치 좋음은 박광수(의 최근작은 역사적 사건의 역동성을 믿기 힘들 만치 정교하게 거세해 보인 <이재수의 난>이다)나 여균동(의 최근작은 관객으로 하여금 시종 이 영화는 왜 만들어졌을까만을 생각게 하는 <미인>이다)에게도 어김없이 해당한다.

내 영화 내 맘대로 만드는 데 무슨 상관이냘 수 있겠지만, 그들이 그들에 대한 특별한 사회적 환대를 사양하긴커녕 적절히 사용해왔다는 점에서 그런 가치중립적 권리는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세상이 변했으니 영화도 변해야 하는 게 아니냐 한다면, 나는 세상은 그다지 변한 게 없다는 내 의견을 주장하기보다 삼십오년째 세상과 변함없는 긴장을 이루는 한 좌파감독의 이름을 떠올리고 싶다. 그는 켄 로치다.

한국영화의 비극은 다름 아닌 켄 로치가 없다는 것이다. 유례없는 천민자본주의의 수렁에 빠진 한국에, 수많은 80년대의 좌파청년들이 영화에 투신했다는 한국에, 자본주의와 긴장을 이루는 한명의 감독이 없다는 것, 그것이 한국영화의 슬픈 비극이다. 장선우 박광수 여균동이 받은 특별한 사회적 환대는 한국의 켄 로치에 대한 기대였다. 사회는 그 ‘의식있는 엘리트들’이 영화라는 무기로 세상과 긴장하리라 기대했었다.

어쩌면, 그들에 대한 그런 기대가 애당초 허황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에 대한 특별한 사회적 환대는 분명히 근거가 부족했고 그 특별한 사회적 환대에 신뢰감을 심어준 그들의 데뷔작들은 그 제작 시점에서 어떤 분투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사회가 그들을 포기하든 그들이 사회적 환대를 포기하든 그들과 사회 사이에 지속되어온 이 염치 좋은 코미디는 이만 끝내는 게 좋겠다. 그리고 우리의 켄 로치를 기다리도록 하자.

김규항/ 출판인 drumbeat@hananet.net

레이닝 스톤

감독 : 켄 로치

출연 : 브루스 존스, 줄리 브라운

간만에 세진이가 영화를 보자고 한다. 장예모의 영화를 부르던 그 녀석에게 떫더름한 반응을 보이자 불쑥 켄 로치의 영화를 들고 나선다. 빌리 앨리엇을 보고 켄 로치로 넘어가 보자고 생각하던 나는 환영이었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하숙방에 보기 싫게 자리하고 있는 중고 TV의 14인치로 시선을 두게 되었다.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의미로 가득찬 이미지로 장식되지도 않는 영화가 가끔 사람의 마음을 울릴 때가 있다. 그 동인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때때로 나와 교감 가능한 사실성,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픽션 속에 현실성이 담겨 있는 경우가 그 중 하나이다. 아마도 레이닝 스톤은 그러한 경로로 나에게 감동을 안겨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사실적이라는 말, 특히 영화 속에서 그 말은 과연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영화 속의 사실성이란 결국 어떤 꾸밈 – 조명이나 미장센, 배우의 연기 등등 작위적 장치 모든 것 – 을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 다큐멘터리처럼 찍는 것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형식적인 사실성이란 달음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벼랑 앞에 서게 된다. 아무리 피사체를 꾸밈 없이 고스란히 카메라 안에 담았다 하여도 그것은 카메라를 통해 사각형의 프레임 안에 담기는 순간 이미 현실과 동떨어진 의미를 지니게 되고 현실이 아닌 프레임 안의 그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 편집이 작위적이라는 의미에서 영화가 시작하고부터 끝날 때까지 컷 하나 없이 이어놓는다 하여도 그것 역시 무편집으로 편집되어 버린다. 결국은 형식에 있어서의 사실성이란 내용에 있어서의 사실성이 없이는 그 본연의 역할을 상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발딛고 살고 있는 이곳을 재인식시켜줄 수 있는 내용이 바로 영화의 사실성을 결정짓는 열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너무나도 사실적이다. 우리가 지지고 볶고 싸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지를 절망적이면서도 노골적으로 까발린다. 실직 노동자 토미와 밥이 소수를 택하고 다수를 버린 자본주의에 대해 궐기하듯 이리뛰고 저리뛰며 보여준다. 아직 빵과 포도주가 왜 예수의 몸과 피가 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딸의 성찬식 드레스조차 사 주기 힘들어 노심초사하는 밥, 그에게 종교적 신념은 돈 앞에서 너무나도 철없는 고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빚진 밥의 집에 쳐들어와 그의 아내와 어여쁜 딸을 위협하며 횡패를 부리는 고리대금업자의 작태를 보고 있노라면 돈이 없으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과 존중마저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바로 이곳을 그대로 체감하게 된다. 노동자의 일주일은, 더구나 실직한 그들의 일주일은 쉬지 않고 하늘에서 돌이 떨어지는 것처럼 절망적인 삶일 뿐이다.
고리대금업자 탠지에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을 짓밟힌 밥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범죄자의 대열에 끼어든다. 한계선상에 와 있는 인생 앞에서 밥 뿐만 아니라 토미의 딸도 이웃 사람들도 점점 범죄, 술, 마약으로 망가져만 간다. 누가 범죄자이고 누가 선한 시민인가.
왜 현실이 이러한가. 왜 우리는 이같은 땅 위에서 비루하게 남을 짓밟지 않으면 짓밟혀야 하는 척박한 생을 이어가야 하는가. 캔 로치가 보여주는 이 비루고 팍팍한 주인공의 몇 일간은 끊임없이 그 질문만을 되뇌이게 만든다. 그리고는 밥의 장인어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제도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제도를 바꿀 수는 있을 것이다.’ 돈 앞에서 사람이 사람일 수 없음을 여실히 확인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환기하고 있을 때 이 말을 듣노라면 아직도 소심하고 싱거운 나까지도 기꺼이 그의 진영에 서서 힘이 되어주고 싶다.

자신의 몸을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나눠 준 예수의 삶은, 그 숭고한 정신은 과연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없단 말인가. 성찬식에서 예수의 몸을 나눠주는 신부와 엄숙하고도 처연하게 그것을 받는 밥의 마지막 장면은 그 말을 수없이 되뇌이게 한다.

켄 로치는 신부가 되어 밥의 삶을 쓰다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