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이 팬데믹으로 선언된 지도 이제 4년이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감염되지 않고 잘 지내왔다. 물론 무증상 감염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 동안 나는 백신도 네 차례 접종했고 마스크도 지금까지 잘 착용하면서 조심해 왔다고 생각한다. 코로나가 내게 주는 공포는 내가 감염되는 것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는 것에 대한 공포에 가까웠다. 내가 아주 건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코로나 증상이 주는 고통을 나는 견딜 만할 거라고 믿었고, 그보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는 염려가 컸다. 아직도 마스크를 쓰냐는 이상한 질문을 듣기도 하지만 나름 신경을 쓰며 코로나 감염을 피해 왔다.

그런 나도 코로나 감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추석과 부산영화제의 연속 장거리 운전의 피로와, 그 사이에 있었던 자동차 접촉 사고 처리 스트레스로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느끼던 때가 바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나를 지배하게 만드는 허술한 빈 틈이었다.

이번 주 동안 코로나 확진을 받고 재택 근무를 하며 집에서 요양을 했다. 이제 몸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겪은 증상과 전조 증상을 기록해 놓으면 누군가에게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내가 겪은 코로나 감염 증상을 적어 보려 한다.

코로나 잠복기, 전조 증상(10/8 ~ 10/14)

10월 7일부터 10월 9일까지 부산국제영화제를 다녀 왔다. 장거리 운전의 피로를 풀기 위해 10월 10일 하루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었다. 아직 여독이 덜 풀린 기분이었다. 사고 수리된 내 차를 받는 과정에서 서비스센터의 부주의로 인한 차량 추가 훼손 문제로 옥신각신하며 두 번 서비스센터를 오가게 되었다. 그런 일들이 피로를 누적시켰던 것일까. 이 한 주 동안 설사가 잦았다. 심하면 하루에 서너번의 설사를 겪었다. 평소에도 장이 약하고 설사가 잦은 편이어서 다른 의심이 없었다. 몸의 피로는 만성적이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점을 자각하지는 못했다.

코로나 증상 발생, 자각 실패(10/15 ~ 10/16)

10월 15일 일요일,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멍하고 어지러우며 귀가 먹먹했다. 코막힘도 있었고 한기가 느껴졌으며 식은땀이 흘렀다. 설사도 있었다. 입맛이 없었고 입안, 잇몸이 불편해 음식도 충분히 먹지 못했다. 나는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10월 16일 월요일, 회사에 출근한 후 병원을 찾아 이전에 처방 받은 과민성대장증후군을 완화할 약과 감기약을 처방 받았다. 이날 하루 속은 조금 편해졌다. 감기 기운이라고 느낀 증상은 크게 완화됐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식은땀은 계속 났고 침넘김이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금니쪽 잇몸도 많이 부어 음식을 씹어 먹는 게 불편했다. 지난 주 치과 치료를 받은 후유증인가 생각했다. 그렇게 코로나를 의심하지 않고 하루를 보냈다. 감기 기운이 있다고 말을 아끼기는 했지만, 이 날 같이 점심을 먹은 팀 후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코로나 자가 진단과 신속 항원 검사 확진(10/17)

10월 17일 화요일에 출근해서 회사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이게 코로나일 가능성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제.서.야. 회사에 비치되어 있던 자가 진단 키트를 받아서 지하 주차장 내 차에 들어가 검사를 했다. 이럴 수가. 수십 번 해 본 자가 진단 키트 중에서 처음으로 두 줄을 보았다. 그러나 직후에 내가 챙겨야 하는 중요한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마스크를 쓴 상태에서 회의 참석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회의를 진행해야 했다. 자가 진단 키트에 두 줄이 나왔다고 말을 했는데도 마스크를 쓰지 않은 분이 있었다. 약간 어지럽고 식은땀이 났지만 회의를 길지 않게 해치웠다. 그리고 바로 이비인후과 병원을 찾아 신속 항원 검사를 했다. 이제는 검사비 3만원을 자비 부담해야 했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 양성이 나왔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주요 증상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나는 설사가 코로나 증상 중 하나였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미 지난 주부터 나는 코로나의 전조 증상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병원에서 준 코로나 증상표를 보고 나는 대부분의 증상에 체크했다. 설사, 코막힘, 목 통증, 발열 또는 오한, 몸살 등.

자가 격리와 회복(10/17 ~ 10/22)

확진을 받고 바로 사무실에 들어와 컴퓨터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예상하지 못했던 자가 격리가 시작됐다.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이 유일한 희망처럼 느껴졌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회사 일이 있었고, 그걸 처리하는 건 견딜 만한 일이었다. 그보다 잇몸이 붓고 물렁한 걸 씹어도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 불편했다. 거울로 내 잇몸을 살피는데 갑자기 잇몸에서 피가 터지기도 했다. 혹시나 해서 검색해 보니 경우에 따라 나처럼 코로나 증상 중 하나로 잇몸이 붓고 허는 증상을 겪은 분들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이로써 내가 겪는 코로나 증상은 설사, 발열 및 오한, 식은땀, 목 통증, 코 막힘과 어지러움에 더해 잇몸 염증까지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내가 가장 불편하게 느낀 것은 잇몸 염증이었다. 한쪽 잇몸은 많이 부어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어금니 사이로 튀어나와 있었다.

처방약을 충분히 복용한 덕분인지 10월 19일 목요일에는 잇몸 염증이 갑자기 사라졌다. 음식을 씹을 만했다. 바로 전날까지 부어서 피가 나던 잇몸이 아니었다. 이렇게 극적으로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놀라웠다. 식은땀도 이제 나지 않았고 귀가 먹먹하던 느낌도 사라졌다. 10월 20일 금요일에는 부었던 편도선도 가라앉았는지 침을 삼킬 만했다. 그래서 나는 그리 고통스럽지 않은 상태로 내 생일을 날 수 있었다.

10월 21일 토요일부터는 목이 조금 간지러워 잔기침이 가끔 나온다. 회사에서 흔히 보았던, 코로나 후유증 증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잔기침이 심하지 않은 것 같다. 마스크를 쓰고 바깥을 나가 동네 산책을 하고 도서관 야외 벤치에서 잠시 책을 읽고 돌아오는 사치를 부렸다. 그리고 아직 피로를 쉽게 느끼는 정도의 상태이기는 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10월 22일 일요일 현재도 피로감은 잔존하는 것 같다. 그리고 문득, 나는 코로나의 대표 증상 중 하나인 후각, 미각 상실을 겪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시험 삼아 커피를 내리고 냄새를 맡아 봤다. 냄새를 분명 느끼고 있는데 좀 약해진 것 같다. 코로나 증상을 심하게 겪던 시기보다 오히려 지금 후각이 더 둔감해진 것 같다고 느낀다.

돌이켜 보면 가을로 들어서는 시기, 피로로 면역력이 떨어지는 틈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이를 충분히 자각할 수 있는 전조 증상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평소에 자주 겪는 문제였기 때문에 이를 유의하지 않아서 때늦은 대처를 하게 되었다. 이 점이 후회된다. 지난 월요일, 화요일에 나와 접촉한 사람들이 무사하기를. 몸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익숙하게 겪은 문제일지라도, 코로나 감염의 가능성을 생각하고 검사해 보는 것이 팬데믹 시대를 사는 나에게 필요한 생활 습관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아직 팬데믹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나를 만지지 마라”는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따르면 부활한 예수가 자기를 알아본 막달라 마리아에게 했던 말이라고 한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자처하는 나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이 말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가 부활해 귀환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리스도가 내놓은 대답과 함께 묶어보련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믿는 자들 사이에 사랑이 존재하는 한 거기에 임재하리라고 말한다. 만질 수 있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과 연대로 묶는 존재로 임재할 것이다. 그러니 “나를 만지지 마라. 사랑의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지고 돌보라.”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이 창궐하는 지금,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지 말고 혼자 격리되어 있으면서 적절한 신체적 거리를 두라는 바로 그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요청은 “나를 만지지 마라”는 명령에 비출 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손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닿을 수 없다. 우리는 오로지 내면을 통해서만 서로에게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내면’에 이르는 창은 우리 눈이다. 요즘엔 우리가 누군가 가까운 (혹은 낯선) 사람을 만나서 적절한 거리를 두고 상대방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면, 한 번의 친밀한 접촉보다 더 많은 것이 드러난다. 젊은 시절에 적은 한 단상에서 헤겔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와 대립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존재와 함께한다. 우리는 오직 그 사람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되지만, 한편으로 그 사람은 더 이상 우리가 아니다. 수수께끼고 놀라운 기적이다. 우리가 알 길이 없는.

이 [엇갈리는] 두 주장을 상반된 것으로 읽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마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부분적으로만 ‘우리’, 나 자신의 일부일 뿐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수수께끼라는 식으로 말이다. 사랑의 기적이란 당신이 내가 파악할 수 없는 기적으로 남아 있는 한에서, 또한 나에게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한에서 당신이 나의 나 됨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이 아닐까? 젊은 시절의 헤겔이 쓴 잘 알려진 구절을 하나 더 가져와보자.

인간 존재는 세상 모든 것을 그 단순한 형태로 간직하고 있는 이 밤, 이 텅 빈 무無다. 아무것도 그에게 속하지 않는, 혹은 현존하지 않는 수많은 표상과 이미지의 끝없는 보고寶庫다. 사람들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볼 때 우리는 이 밤을 알아챌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에게서 이것을 앗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 육체적 거리두기가 타인들과 맺는 인간적 유대의 간절함을 오히려 튼튼하게 만들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나와 가까운 많은 사람들을 멀리해야 하는 지금 비로소 나는 그들의 존재, 그들의 소중함을 완전히 체험한다.

이쯤 되니 벌써 냉소적 비웃음이 들리는 듯하다. 그래, 우리가 정신적 친밀감을 느끼는 그런 순간들을 경험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게 계속되는 파국을 해결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어? 우리가 여기서 무언가 깨달을 수 있을까?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울 게 없다는 사실이라고 헤겔은 썼다. 그러니 감염병 덕분에 우리가 더 현명해지리라는 주장은 의심스럽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바이러스가 우리 삶의 기반들 자체를 흔들어놓을 것이며, 엄청난 양의 고통은 물론 대불황the Great Recession보다 더 극심한 경제적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사실이다.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길은 없고, 새로운 ‘일상normal’이 옛 우리 삶의 잔해들로부터 만들어지거나, 이미 조짐이 선명하게 보이는 새로운 야만에 접어들게 될 터다. 이 감염병을 하나의 재수 없는 사건으로 여겨서, 우리의 건강관리 체계를 약간만 조정한 채, 그 결과들을 삭제하고 예전처럼 매끄러운 일 처리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과학자들이 수년에 걸쳐 경고했음에도 우리를 아무 대비 없이 파국에 빠지게 만든 우리 시스템은 뭐가 잘못된 것일까?

– 「나를 만지지 마라!」, 『팬데믹 패닉』 서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2020, 북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