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이후의 사건들은 이 ‘~일 것 같은 주체들'(subjects supposed to…)의 사례에 추가할 만하다. 약탈과 강간을 저지를 것 같은 주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우리는 모두, 공공질서의 붕괴, 흑인들의 폭력 분출, 강간과 약탈 등에 대한 보도를 기억한다. 그러나 이후의 조사로 입증된 일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런 폭력의 아수라장과 같은 사태는 벌어지지도 않았다. 미디어가 근거도 없는 소문을 마치 사실인 양 보도했던 것이다. 실례로 9월 4일 <뉴욕타임스>에는 뉴올리언스 경찰국의 경찰서장의 말이 인용되었는데, 그는 컨벤션 센터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주변에 관광객들이 있는데, 관광객들은 이 지역 사람들의 눈에 띄기만 하면 먹잇감이 돼버립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백주대낮에 폭행과 강간을 자행하지요.” 그런데 2주 후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발언 중 가장 충격적인 몇몇 부분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고 인정한다. “살인이 일어났다는 공식 보고는 전혀 없습니다. 강간이나 성추행에 대한 공식 보고 역시 한 건도 없습니다.”

(…)

물론, 진짜 무질서와 폭력이 위기의식을 촉발시켰다는 점은 틀린 말이 아니다. 폭풍우가 뉴올리언스를 휩쓸고 지나가던 순간에는 정말로 약탈이 시작되긴 했다. 그 양상은 좀도둑질에서 생필품 조달을 위한 약탈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제한적이긴 하지만) 실제로 범죄가 발생했다 해서 법과 질서가 완전히 붕괴했다는 ‘보도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런 보도가 ‘과장된’ 것이라서가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 때문이다. 자크 라캉의 주장에 따르면, 환자의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외도했다는 게 사실이라 해도 환자의 질투는 병리적인 것으로 다뤄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령 1930년대 초 독일에 거주하던 부유한 유대인들이 ‘실제로’ 독일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그 딸들에게 추근대고, 대중 언론을 장악했다 해도, 나치의 반유대주의는 분명한 ‘허위’이며, 병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왜냐고? 반유대주의가 병리적인 이유는 ‘부인된’ [억압된] 리비도를 유대인이라는 형상에 투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도착된 애증의 대상이었고, 매혹과 혐오감이 뒤섞인 유령 같은 형상이었는데, 아무튼 모든 사회적 적대감의 원인은 ‘유대인’에게 투사되었다. 뉴올리언스의 약탈 사태도 이와 똑같다. 설사 폭력과 강간에 대한 ‘모든’ 보도가 실제 사실로 밝혀졌다 할지라도, 폭력에 대해 떠돌던 이야기들은 여전히 ‘병리적’이고 인종주의적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유발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인종주의적 편견이며, “그것 봐, 흑인들은 정말 그렇다니까. 문명이라는 얄팍한 껍질에 덮인 폭력적인 야만인들이라고!”라 말하는 이들이 느낀 만족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우리는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이라 부를 만한 현상과 마주친 셈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 실제로 진실이라 해도, 내가 그런 말을 하는 동기가 거짓인 경우이다.

(…)

뉴올리언스는 부유한 이들과 빈민가 흑인들을 갈라놓는 미국 내의 내부적 장벽이 가장 두드러지게 존재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 벽 너머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환상을 품는다. 벽 너머는 점점 더 또 다른 세계가 되어가며, 우리의 공포와 불안과 은밀한 욕망이 투사될 수 있는 텅 빈 스크린이 되어간다. ‘약탈과 강간을 저지를지도 모르는 주체들’은 이 장벽 건너편에 있다. 윌리엄 베넷이 그 혀를 잘못 놀릴 수 있었고, 자기검열이 작동하는 와중에조차 자신의 그 끔찍한 꿈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주체에 대해서다. 카트리나의 여파에 대한 온갖 소문과 거짓 보도들은 그 무엇보다 뚜렷하게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계급 분열을 증명해 준다.

2005년 10월 초, 아프리카 이민들이 계속해서 아프리카 모로코 리프 해안의 스페인령 소도시 멜리야로 필사적 잠입을 시도하자, 이들의 유입을 어떻게 막을까 궁리하던 스페인 경찰은 스페인 영토와 모로코 사이에 장벽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표명했다. (…) 이런 분리 조치를 강행해야만 했던 스페인의 호세 사파테로 정부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반인종주의적이고 관용적이라 평가받던 정권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잔인한 역설이라 할 수 있다. (…) 국경을 연다면 가장 먼저 들고일어날 것은 현지의 노동계급일 것이다. 그러므로 ‘벽을 무너뜨리고 그들을 모두 들여보내라’는 유약한 자유주의 ‘급진 세력’의 손쉽고 공허한 주장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진정하고 유일한 해결책은 진정한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 이민 관리국의 벽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벽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가 속한 세계에서 필사적으로 탈출할 필요가 없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해결책이다.

 

—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약탈과 강간을 저지를 것 같은 주체”

이웃이라는 사물

(생략)

2001년 9월 11일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을 비롯하여 다른 세 대의 비행기가 납치당했을 때, 승객들은 곧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가장 가까운 친지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전화 통화의 주된 내용이 “사랑해”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마틴 에이미스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사랑이란 하나의 추상명사이며 흐릿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고 화면이 먹통이 되는 순간,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하게 견고한 부분은 바로 사랑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남는다. 이 절박한 사랑 고백은 한편 가식적인 것, 그러니까 갑작스런 위험에 마주하거나 죽음에 가까이 갔을 때에야 갑자기 신을 찾으며 기도하는 거짓된 태도와 같은 것 아닌가? 진정한 회심이 아니라 공포에서 발생한 위선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행동 아닌가? 왜 그토록 절망적인 순간에 우리가 하는 행동은 더욱 진실된 것이어야 하는가? 오히려 그런 순간 우리는 생존 본능에 이끌려 우리의 욕망을 배반하지 않는가?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임종 자리에서 개종하거나 사랑을 고백하는 행동은 욕망의 희생물이다. 수많은 회고록을 통해 알 수 있듯, 스탈린 시대의 공개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이 대부분은 총살 집행대 앞에 섰을 때 자신은 결백하며 스탈린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대타자의 눈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만회해 보려는 노력에서 나온 애처로운 행동이었다.

(중략)

냉전 시대가 낳은 비극의 또 다른 예들은 서구 좌파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병적인 반공산주의 분위기가 자기 나라를 휩쓸었을 때 그들은 용감하게, 그리고 진심을 다해 거기에 맞섰다. 소련을 옹호하고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감옥에라도 갈 수 있었다. 그들의 주체적인 자세가 비극적일 정도로 숭고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들이 지녔던 믿음이 본질적으로 착각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 아닌가? 스탈린 치하 소련의 비참한 현실 때문에 그들의 내적인 신념은 무너지기 쉬운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로 인해 급진적이면서도 뜻밖의 결론에 도달한다. 즉,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서구 좌파들이 안타깝게도 윤리적으로 엉뚱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맹목적인 믿음으로 인해 현실이라는 것이 윤리적 판단기준이 되어야 하는데도 비참하고 끔찍한 현실과 마주치지 않고자 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그 정반대로, 바로 그런 맹목적 태도가, 보이는 것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격렬한 배제의 제스처가, 현실에 대한 부정이, 그리고 “소련의 상황이 끔찍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믿는다”는 물신주의적 태도가 모든 윤리적 자세의 핵심적 구성 요소라면 어떤가?

(중략)

조금만 수정하면 이는 소련을 찬양한 서구 좌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소련은 ‘일국사회주의 건설의 경험’을 했는데, 확실히 ‘비참하고 잔혹한 사태는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구경꾼들(소비에트 체제에 속하지 않은 이들)의 가슴 속에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정말 모든 윤리가 이런 물신주의적 부인이라는 제스처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인가? 가장 보편적인 윤리마저도 한계를 설정할 수밖에 없고, 어떤 종류의 고통은 묵인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가령 우리의 식량이 되기 위해 도살당하는 동물들은 어떤가? 공장식 농장에 가서 돼지들이 반쯤 눈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오로지 도살을 위해 살찌워지는 광경을 보고 난 뒤에도 계속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과연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알고는 있으나 묵인하는 편을 택한, 고문 받고 고통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떤가? 하루에도 수천 번씩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스너프 영화를 통해 지켜보아야만 한다고 상상해 보라. 눈알을 뽑고 고환을 으스러뜨리는 등의 무자비한 고문 행위들, 그 목록은 차마 자세히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 장면을 본 사람이 평소와 같은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그렇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목격한 장면을 어떻게든 망각할 수 있었을 때만 가능하다. 그것이 가지는 상징적 효력을 유예하는 행동을 통해 말이다. 이렇게 자신이 본 것을 망각하고자 하는 데서 물신주의적 부인이라는 제스처가 나온다. “나는 안다, 하지만 내가 안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알지만,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따라오는 당연한 결과들을 완전히 떠맡기를 거부한다. 그래야만 마치 모르는 것처럼 계속 행동할 수 있으니까.
모든 윤리가 물신주의적 부인이라는 이런 제스처에 충분히 의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명확해지기 시작한다. 모든 생명체와의 연대를 강조하는 불교 윤리 역시, 겉보기에는 명백한 예외 같지만,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실 불교에서 제안하는 해결책은 모든 것에 대한 보편적인 무관심, 즉 지나친 감정이입에서 벗어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런 이유에서 불교는 매우 손쉽게 보편적인 동정의 정반대 자세로 돌아서 무자비한 군사적 정복을 옹호할 수 있다. 선불교의 운명은 이를 입증하는 적절한 사례다.
이와 같은 사실에 놀라는 것은 적절한 철학적 태도라 할 수 없다. 마치 모순처럼, 특정한 윤리적 태도에서 모든 결론을 끌어내지 못한 듯한 이 사실이 바로 그 윤리를 가능케 하는 긍정적 조건이라면 어떤가? 그리고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 윤리적 범위 안에서 어떤 형태의 타자성을 배제해 버리는 것이 윤리적 보편성을 정초하는 표현 그 자체와 일치하는 것이라면 어떤가? 그리하여 보편성을 겉으로 명백히 내세우는 윤리일수록 근원적으로는 더 난폭하게 타자를 배제하고 있다면? 가령 기독교 윤리를 생각해 보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는 성 바울의 유명한 말처럼 기독교 윤리는 전 인류를 포옹한다는 자세를 취하지만, 그럼으로써 동시에 기독교 공동체 안에 포함되려 하지 않는 이들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다른 ‘배타적’ 종교들에는 그나마 타인들이 설 자리가 있다. 심지어 드러내놓고 전지구적 팽창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이슬람교에도 타인에 대한 배려는 있다. 그런 종교에서는 속으로는 타인을 자만에 가득찬 태도로 바라볼 지라도 적어도 타인의 존재에 관용을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기독교의 금언은 동시에 형제애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란 혁명 초기에 호메이니는 이와 똑같은 역설을 보여준 적이 있다. 서양 언론과의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그는 이란 혁명이 역사적으로 가장 인간적인 혁명이었다고 주장했다. 혁명가들의 손에 죽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말이다. 기자는 깜짝 놀라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사형 건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자 호메이니는 태연하게 답했다. “우리가 죽인 것은 사람이 아니라 범죄자 개새끼들이었소!”
기독교인들은 늘 자신들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인의 배타적 신앙관을 극복하고 전 인류를 포용했다고 자화자찬한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신과의 직접연결이라는 특별한 은혜를 받은 선민이라 여기면서, 사신을 숭배하는 다른 민족도 인간이기는 하다고 인정한다. 반면 기독교가 가진 보편주의의 편향적 태도는 비기독교를 인류의 보편성 그 자체로부터 배제해 버린다.

(중략)

프로이트와 라캉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에는 본성적으로 문제적인 데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보편성이라는 개념이 모두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가치로 윤색돼 있으며 따라서 암암리에 어떤 것들이 배제된다는, 단순히 비평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견지의 주장이 아니다. 프로이트와 라캉이 강조한 것은 이웃과 보편성이라는 특징 그 자체가 양립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웃이 가진 비인간적 특징으로 인해 이웃은 보편성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입장에 선다는 것은 매우 폭력적인 것이며, 심지어 상처를 받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을 받음으로써 나는 확정적인 존재로서의 나, 그리고 내 안에서 사랑을 유발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X 사이의 간극을 직접 느끼게 된다. 라캉은 사랑에 대해 “사랑이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라고 정의했는데, 이 말에는 “…원치 않는 이에게”라는 구절을 덧붙여야 한다. 예이츠의 유명한 시구가 너무나도 밀실 공포증적인 별자리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우리는 알고 있는 걸까?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만든
하늘의 천이 있다면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발 밑에 깔아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 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 밑에 깔았습니다.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한 마디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처럼 “만약 당신이 타인의 꿈속에 갇힌다면, 끝장이다!”인 셈이다. 닐 게이먼의 그래픽 노블 『샌드맨』의 다음과 같은 대목도 사랑의 이런 속성을 잘 드러낸다.

사랑에 빠져본 적 있나요? 끔찍하지 않나요? 사랑은 당신을 상처받기 쉬운 상태로 만들죠, 사랑은 당신의 가슴을 열고 마음을 열어놓지요. 그건 누군가가 당신 안으로 들어와 당신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은 어떤 것도 당신을 해칠 수 없도록 온갖 방어막을 두르고,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하지요, 그리고는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이, 다른 어떤 바보 같은 사람과도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당신의 바보 같은 삶 속으로 헤매며 들어옵니다….당신은 그에게 당신의 일부를 내줍니다. 그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그는 어느날 당신에게 키스를 한다거나 미소를 지어준다거나 하는 아무 것도 아닌 행동을 했을 뿐인데, 그 때부터 당신의 삶은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니게 됩니다. 사랑은 인질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은 당신 안으로 들어와 당신을 좀먹고 당신을 어둠 속에서 울게 합니다. 그래서 “아마 우리는 친구로 남아야 할지도 몰라”라는 간단한 말은 당신의 마음에 길을 내듯이 조각난 유리가 됩니다. 사랑은 아프게 합니다. 그저 상상 속에서 느끼는 아픔이 아닙니다. 그저 마음이 아픈 것도 아니지요. 사랑은 영혼에 상처를 내고, 당신 안으로 파고들어 당신을 고통 속에 찢어내 버립니다. 나는 사랑이 싫습니다.

소련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말년에 스톡홀름에 살면서 영화 <희생>을 연출했다. 그가 일하던 작업실은 당시 스톡홀름에 살고 있던 잉마르 베리만의 작업실과 같은 건물에 있었다. 두 감독은 서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높이 샀지만,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조심스레 서로를 피해 다녔다. 마치 직접 만나게 되면 그 대면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지고, 두 사람이 같은 분야에 속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둘의 만남은 운명적으로 실패로 돌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두 감독은 각자의 재량 규범을 설정하고 그것을 존중했던 것이다.

– <폭력이란 무엇인가>, 슬라보예 지젝, 난장이, p80~95

자유주의적 공산주의 마을

 

…(생략)…

“그리고 이것이 언뜻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진실이라면 어떤가? 또 우리 사회의 진정한 악이 자본주의 동학 같은 것이 아니라, 이윤추구에 대한 끈은 놓지 않으면서도 우리들을 자본주의 동학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시도라고 한다면 어떤가? 빗장 공동체에서 배타적인 인종이나 종교 단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자기폐쇄적 공동체 공간을 일궈 나감으로써 말이다. 오늘날, 말을 통해 진실한 감정을 직접 표현할 수 있는 진정한 공동체,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의 공동체로 회귀한다는 것은, 매우 부유한 이들을 위한 구경거리로서 연출될 수밖에 없는 가짜라는 사실, <빌리지>는 정확히 이를 입증하려는 것 아닌가? 오늘날 악을 대표하는 좋은 예는 환경을 오염시키고 사회적 유대가 무너져 가는 폭력적인 세상에 살아가는 평범한 소비자들이 아니다. 그런 전반적 파괴와 오염을 조성하는 데 전적으로 관여했으면서, 돈을 써서 자기 자신이 저지른 결과로부터 쏙 빠져 나오는 자들, 빗장 공동체에 살면서, 유기농 식품을 사다 먹으며, 자연 보호 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자들이 바로 악이다.

P.D. 제임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서는 영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자유주의적 공산주의 마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때는 2027년, 인류는 생식 능력을 잃어 아이를 낳을 수 없다. 마침 18년 전 태어난 지구상 가장 젊은 주민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해당한 참이다. 영국은 항구적인 비상 상태에서 살아간다. 테러 전담반이 불법 이민자들을 뒤쫓고, 국가권력은 불임 상태의 향락주의에 빠져 무위도식하며 살아가는 점점 줄어가는 인구를 관리한다. 향락주의적인 비관주의에 겹쳐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인종차별과 공포에 기초한 통제가 만연한다.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 아닌가? 그러나 쿠아론의 천재적 재능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미래를 그린 이야기는 대부분 일종의 ‘빅 브라더’ 같은 존재를 등장시키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독재에 대한 20세기의 관점이다. 지금 일어나는 독재는 새로운 형태로 가장하고 있다. 21세기의 독재는 ‘민주주의’라 불린다.” 이런 이유에서 <칠드런 오브 맨>의 통치자들은 조지 오웰의 소설에 나오는 ‘전체주의자’ 관료들처럼 제복을 입은 음침한 행색이 아니라, 머리가 깨어 있는 민주적 관리자들이며, 교양도 높고 각자 자신만의 ‘생활 방식’을 즐길 줄 안다. 주인공은 난민을 위한 특별 허가증을 얻기 위해 고위 정부 관리가 된 옛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친구의 사무실은 마치 맨해튼의 상류층 게이 커플이 살 법한 장소이고, 친구는 캐주얼 차림으로 장애인 파트너와 함께 있다.

<칠드런 오브 맨>은 불임을 생물학적인 문제로서 다룬 영화는 분명 아니다. 쿠아론의 영화가 말하는 불임은 이미 오래 전에 프리드리히 니체가 진단한 바 있다. 니체는 서양 문명이 말인末人, 즉 어떤 열정도 헌신도 없는 무심한 인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말인은 꿈꿀 줄 모르고, 삶에 지쳐 있으며, 어떤 위험도 감수하려 하지 않고 오직 안락함과 안정성만을, 그리고 서로에 대한 관용의 표현만을 추구한다. “이따금 약간의 독을 마시고 유쾌한 꿈을 꾼다. 그리고 최후에는 많은 독을 마시고 유쾌한 죽음을 맞는다. 그들에게는 낮의 쾌락과 밤의 쾌락이 따로 있지만, 건강은 챙긴다. ‘우리는 행복을 발견해 냈어.’ 말인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빡인다.”

제 1세계에 사는 우리가, 기꺼이 생명을 희생할 만한 공적 혹은 보편적 대의를 상상이라도 해 보기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사실 제 1세계와 제 3세계 사이의 분열은 따지고 보면 한 편에는 물질적이고 문화적으로 풍족함 덕분에 수명이 연장되고 만족스러운 삶이 있으며, 다른 한 편에는 초월적인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삶이 있는데, 이 둘 사이의 적대가 더 두드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니체의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 사이의 적대 아닌가? 서구에 사는 우리는 시시한 일상적 즐거움에 빠진 말인이며, 무슬림 과격주의자들은 스스로를 파괴할 정도로 허무주의적 투쟁에 몸을 바치고 모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 드는 사람들이다. ‘안’에 있는 사람들, 즉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빗장 공동체에 거주하는 말인들과 ‘밖’에 있는 사람들 간의 이런 대립에서 점차 사라지는 것은 그토록 화려했던 중산층이다. “중산층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사치품이다.” <칠드런 오브 맨>에 나오는 벡스힐온시(Bexhill on Sea)는 유일하게 자유라는 이상한 감각이 느껴지는 곳인데, 이곳은 도처에 만연한 숨 막히는 억압이 미치지 않는 일종의 해방구다. 담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이 도시는 난민촌이 되었고, 불법 이민자인 주민들에 의해 관리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무력시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연대활동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희귀한 존재가 되어버린 갓난아기가 이곳에 등장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벡스힐은 공군의 폭격으로 무참하게 파괴된다.”

– <폭력이란 무엇인가>, 슬라보예 지젝, 난장이, p58~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