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친구들>

뉴욕의 뒷골목에서 잘 나가는 갱스터가 된 헨리는 캐런과 첫 데이트에서 고급 레스토랑의 특별한 통로로 캐런을 이끈다. 그 통로는 레스토랑 앞에 늘어선 인파의 긴 줄 옆에 숨은 지하로 향하는 작은 문이다. 문을 열고 좁은 복도를 지나면서 헨리에게 인사하는 사람들과 주방의 분주한 직원을 물리치고 나면 레스토랑 매니저가 헨리와 캐런을 챙겨 가장 좋은 자리에 테이블을 놓고 앉힌다. 이내 옆 테이블에서 선물한 와인을 받아 들고 나면, 헨리와 캐런 바로 앞에서 헤니 영맨의 스탠딩 코미디 쇼가 시작된다. 헨리만을 위해 준비된 레스토랑의 특혜 티켓 통로인 셈이다.

길거리에서 레스토랑 직원에게 자동차 열쇠를 맡기는 헨리의 손에서 시작해 헤니 영맨의 공연 무대까지 이어지는 이 3분짜리 쇼트는 앞선 30분의 러닝타임이 무엇을 향해 할애되었는지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헨리가 어릴 적부터 동경해 온 길 건너 갱스터 세계의 화려한 매력이 이 한 쇼트에 담겨 있다. 모두가 자신을 알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특별대우를 받는 잘 나가는 갱스터의 생활에 캐런과 관객이 한 번에 매료되도록 만들기 위해 스테디 캠의 유려한 움직임이 활용된다.

헨리와 캐런의 뒤를 따르는, 시간과 공간, 시선의 방향과 이동의 강약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이 눈의 운동은 그 자체로 선망의 대상이 되어 관객을 홀린다. 스탠리 큐브릭이나 브라이언 드 팔마가 그랬던 것처럼 마틴 스콜세지의 스테디 캠은 자신의 눈이 카메라 시선이 되기를 바라는 관객의 오래된 욕망의 목록에 유영하듯 부드럽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카메라의 운동성을 더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카메라가 바에 걸터앉은 갱스터 무리를 차례대로 비추며 소개하는 동안 그들이 카메라를 쳐다보며 말을 거는 또다른 스테디 캠 쇼트는 이 양식이 관객을 영화 세계 안으로 호명하고 빠져들게 만든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는 관객이 영화적 환상에 깊이 뛰어들도록 이끄는 고전주의적 면모를 띄지만 동시에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규칙을 거스르면서 이 허구적 세계를 성찰하게 만드는 예외적 순간을 담고 있기도 하다. 갱스터 헨리의 회고록인 <좋은 친구들>의 마지막이 헨리가 웃으며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장면인 것처럼 말이다. 이 웃음은 영화가 스스로를 비웃는 것 같아서, 갱스터를 현명한 사람(Wise Guy)이라 부르고 그들 서로를 좋은 친구들(Good Fellas)이라 칭하는 이 세계에 갑자기 균열을 일으킨다. 어쩌면 스콜세지의 영화를 특징 짓는 것은 이 성찰적 균열을 내포하고 있는 강고한 환상일 것이다. 파국적 진실과 반복적으로 부서지는 환상을 다루는 <셔터 아일랜드>를 보고 나면 이 생각은 확고해진다.

그가 평생을 뉴욕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바쳐 왔음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그의 영화를 보며 뉴욕과 미국의 역사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뉴욕, 미국, 그리고 어쩌면 인간을 관통하는 이면의 폭력이 관철되는 세계를 반성적으로 관조하고는 한다. 영원할 것 같았던 화려한 갱스터의 삶이 한낱 이권과 배신, 그리고 마약으로 무너진 후 살해 위협의 공포에 떨며 평생 숨어 살아야 하는 헨리의 후일담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런 반성적 감상으로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찰을 좀더 확장해야 한다. 우리는 폭력을 타자화해서 관조하는 것에 머무르면 안 된다. <좋은 친구들>에서 그리는 가족애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마피아의 일원이 되는 의식을 치르러 가는 아들 토미를 기쁜 마음으로 안아 주는 어머니에게서, 또는 헨리와 캐런의 결혼식을 찾아 진심으로 축하하는 갱스터 패밀리에게서 감지하게 되는 폭력이 무화되는 가족애의 순간을 우리에게 되돌려 준다면, 세계가 품고 있는 구조적 폭력을 무화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진공 상태가 평범한 우리의 일상적 삶을 지탱하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 순간도 만나지 않을까.

<작은 빛>

예술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다. 청중과 관객 앞에서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일회적 순간을 딛고 예술은 오직 현존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라서 관객과 만나는 현재적 순간이 아니라면 영화를 이루는 다른 것은 그저 셀룰로이드 필름과 그 밖의 것처럼 사물의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예술, 영화가 사물 이상의 존재일 수 있는 것은 환상도 기억도 현재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능력 덕분일 것이다.

<작은 빛>에서 진무는 기억을 잃을지도 모를 뇌수술을 앞두고 훗날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한 기록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카메라를 든다. 카메라에 담길 영상은 진무가 잃어버릴 기억의 보충물이다. 진무는 자신이 일하는 선반 공장의 작업 과정을 제외하고는 흩어진 가족을 만나 그들을 카메라에 담는 데 시간을 쏟는다. 이 영화에 존재하는 세 개의 카메라 중 영화의 카메라는 진무와 그의 가족에게 벌어지는 변화를, 진무의 카메라는 흩어진 가족에게 한 데 모여 산 과거를, 그리고 말미에 등장하는 진무 아버지의 카메라는 이 가족에게 공통으로 새겨진 기억의 환상적 층위를 현재화한다.

진무는 기억의 누수를 막을 제방인 것처럼 카메라를 들고 카메라는 진무의 가족을 다시 모으기 위해 움직인다. 진무가 자신을 규명하기 위해 반드시 바라보아야 할 결핍의 장소가 가족에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운동이다. 어머니 숙녀는 정선에, 누나 현은 시흥에, 그리고 형 정도는 부천에, 뿔뿔이 흩어져 한동안 각자의 삶을 살아 온 것 같은 이들을 진무가 방문하면서, 우리는 아버지의 오랜 폭력이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음을 천천히 알게 된다.

이 영화는 일견 아버지의 폭력이라는 외상적 기억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치유하는 가족의 이야기로 보인다. 영화의 말미에 충격적으로 제시되는 무덤 속 아버지의 부패한 주검은 이 가족의 상처를 체현하는 끔찍한 물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이 장면을 향해 달려 왔다고 말할 수 있을 법한, 유일하게 스펙터클한 이 장면은 아버지에 대한 진무 가족의 원망과 증오라는 오랫동안 억압된 감정을 응축하고 있다. 영화는 가족들로 하여금 서로 함께 지낼 수 없도록 만드는 실체를 드러내어 직시하게 만든다. 오랜 세월 묻혀 있던 것은 아버지의 주검 뿐만 아니라 가족 각자를 고립시키는 상처에 대한 침잠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주검을 직접 손에 쥐는 행위를 통해 진무의 가족은 과거 아버지가 자행한 폭력이 입힌 상처를 공유하고 서로에게 인정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상징적인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진무의 가족이 직시해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상처만이 아니다. 그들은, 또는 아버지는 아버지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가족의 삶을 상처로 지배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유령에 대해 아버지 당신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줘야만 한다. 이것이 진무 가족의 현재적 고통을 종식시키기 위한 마지막 제의이다. 영화는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아버지의 관에 나무 뿌리를 박아 둔다. 이장을 포기하게 만들고 아버지의 주검을 가족이 직접 손에 쥐게 하기 위해. 이는 진무의 뇌수술을 앞두고 흩어진 가족이 재회하는 것이 너무 뻔한 서사이기 때문에, 또는 그것으로는 너무나도 미진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죽은 아버지를 극복하고 가족을 회복한다는 목적지에 완벽하게 도착하기 위해 이뤄지는 신적 개입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암시하는 가족 회복 여정의 이면은 매우 미묘하다. 이 영화는 가족의 복원을 위해 아버지를 벌하고 지우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오히려 아버지를 희구하는 욕망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주검 장면을 이어서, 주검을 담은 상자를 든 진무와 그 뒤를 따르는 가족이 어둠에 갇힌 선산으로부터 빛이 내린 들로 천천히 내려오는 것으로 끝난다. 빛과 구도가 의미하는 태도를 따른다면 이 영화는 죽은 아버지를 제 손으로 모셔 오면서 비로소 가족이 회복되는 것을 보여 준다. 비록 주검의 모습이라 해도 아버지의 자리가 채워짐으로써 다시 가족이 완성되는 것이다.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동시에 필요로 하는 이 상태는 진무의 엄마 숙녀의 대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진무야, 어제 엄마가 얘기 잘못 한 것 같다. 네가 아빠 양복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걸 보니까, 네 아빠한테 좀 고맙더라.”

누나 현은 어머니의 피를, 형 정도는 아버지의 피를 물려 받은 의붓 남매다. 정도가 숙녀, 현과 왕래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들 가족이 흩어진 것은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혼한 현과 함께 사는 조카 호선을 포함해, 아버지의 자리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정도를 어머니, 누나와 잇는 가교가 되고, 어머니의 남편에 대한 증오를 고마워 하는 마음으로 전치시키기 위해 진무가 존재한다. 진무는 아버지의 유산이다. 유일하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를 모두 물려 받은 진무만이 이 가족을 복구할 자격을 갖추고 있다. 진무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다른 태도를 제공한다. 서로가 혈육으로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완성시켜 주는 물질적 담지자로서의 아버지를 진무 자신을 통해 다시금 유추하도록 하는 것이다.

영화는 진무의 뇌수술 예후가 어떠했는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고 바로 선산에서 아버지의 주검을 맞이하는 마지막 시퀀스로 넘어 간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시퀀스가 기억을 잃어버린 진무의 환상인지 실제 벌어진 일인지는 단언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환상의 수준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칭하는 욕망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이 가족을 복원하고 싶다는 것. 어떤 위험이란 이를테면 아버지를 달리 기억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묻힌 선산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시퀀스에 느닷없이 삽입된 장면은 이 같은 분열적 환상을 드러낸다. 진무가 어머니 집에서 아버지의 유품인 카메라와 사진을 발견하고 그것을 한참 살펴 보는 이 장면은 그 시점도 알 수 없이 시퀀스 안에서 부유하는데, 이는 가족을 지배하는 외상적 기억의 실체처럼 등장한 나무 뿌리가 파고 든 아버지의 끔찍한 해골의 충격을 필사적으로 덮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여느 가족처럼 평온해 보이는 사진 속 허위적 환상으로라도 덮을 수만 있다면 남은 우리 가족의 결속을 지킬 수 있을 텐데.

과묵한 적자이자 내내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드러낸 적 없는 진무의 여정을 통해 영화는 어쩌면 소위 정상 가족을 욕망하는 자의 분열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빛을 향해 걸어가는 가족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진무의 손에 들린 상자 속 부패한 주검이 계속 떠오르는 것을 나는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모르겠다. 부패한 주검은 진무 가족의 무궁한 결속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닌가.

<에이리언>

SF, Sci-Fi, Science Fiction을 공상 과학이라고 번안해 부르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과학적 가능성에 기반한 상상을 헛된 공상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다니. 과학적으로 구성된 대안 세계가 지닌 이름의 자리가 너무나도 초라한 것 아닐까 하는 억울한 마음마저 짐짓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과학적 허구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과학적 허구라는 장르가 다른 것보다 과학의 측면에서 더 공상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SF는 과학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세계를 넘어서는 것에 관심이 많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인류의 문명을 잉태시킨 미지의 존재 모노리스(Monolith)는 과학적으로 추론 가능한가.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총체적 덩어리로 인식하는 외계의 지적-영적 생명체란 과학적으로 존재 가능한가. 과학적 상상은 과학적 세계에 대해 성찰적이면서 동시에 반과학적이다. 과학적 허구는 과학의 위대한 진리를 제시하기보다 역설적으로 과학이 해 내지 못하는 것, 과학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간의 열정과 신경증을 드러낸다. 어쩌면SF는 과학의 공백에 대한 인간의 불안, 과학 법칙에 대한 무의식 또는 환상의 반격 같은 것 아닐까.

<에이리언>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미지의 치명적인 외계 생명체 에일리언은 인간의 전지전능한 과학적 세계에 대한 경고다. 인간 문명이 우주를 탐험하고 동면 장치로 생명의 시간을 조절하며 인간을 닮은 로봇, 안드로이드를 창조할 만큼 발달할지라도, 아니 어쩌면 그렇게 발달할수록 물리적 세계를 관장하는 전지전능함이 완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과 불안의 응집력은 커진다. 이 응축된 강박과 불안이 공포스러운 실체를 드러낸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것이 H. R. 기거가 상상해 낸 에일리언이다. 기거의 에일리언은 이물적(alien) 요소의 총합이다. 검고 윤기 나는 피부, 길쭉한 머리를 하고 곤충을 닮은 외형은 어쩌면 괴물을 묘사하는 익숙한 관습에 가깝다. 이 괴물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게 만드는 치명적 면모는 그 외의 것들이다. 이 괴물이 성체가 되기 전, 알에서 몇 단계의 유충으로 변태하기까지의 형상은 명백히 인간의 생식 기관을 닮았다. 정자, 난자, 인간의 성기를 연상시키는 이것은 마치 과학과 지식의 세계를 침범하는 리비도, 충동의 세계를 암시하는 것 같다. 한 방울만으로도 주변을 녹여 버리는 산성 피는 어떤가. 이 괴물은 신체 기관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부터 외부를 공격한다. 산성 피를 머금고도 녹아 내리지 않는 이 존재의 장기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그리고, 그 입 속의 입. 이 괴물은 사람을 날카로운 금속성 이빨로 찢어 발기기보다 뜻밖에도 그 입 깊은 곳에서 튀어 나오는 또 하나의 입으로 인간의 육질을 관통한다. 인간의 몸에 기생하다가 인간의 몸을 뚫고 나온다는 것을 포함해서, 에일리언은 생애 과정부터 생물학적 특질까지 총체적으로 인간의 내부, 이면과 관련되어 있다. 에일리언은 상상하기도 힘든 치명적인 이물적 타자다. 그것도 인간의 심연에서 인간 자신이 잉태한 자신의 적대자다.

인간의 내면, 심연을 들여다 보게 되는 모티프는 에일리언과 사투를 벌이는 노스트로모호 내부의 폐쇄된 미로라는 공간에도, 우주의 깊은 암흑 속 미지의 LV-426 행성에도 새겨져 있다. 폐소공포증을 불러 일으키는 미로 같은 노스트로모호 내부의 통로는 심연으로 빠져드는 통로이고 LV-426 행성은 우주라는 심연의 밑바닥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노스트로모호의 인공지능 시스템 마더가 정체 불명의 신호를 포착하고 긴 동면에 빠진 승무원을 깨우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 동면 – 에일리언과의 사투 – 다시 동면으로 구성된 이야기 덕분에 나는 영화를 볼 때마다 자꾸만 이것이 모두 꿈, 2등 항해사 리플리의 악몽에 불과하기를 바라게 된다. 인간의 정신 그 심연에 잠들어 있던 억압된 괴물이 노스트로모호라는 문명, 의식의 세계로 침입하려 하고 이를 리플리가 의식과 심연을 잇는 폐쇄된 통로에서 끝내 저지하는 중첩된 꿈에 대한 은유이기를 말이다. 이 바람이 간절한 것은 에일리언이 심연에서 튀어나온 형벌, 잠재된 것이 실현된 신적 폭력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에일리언의 점액질 분비물로 노스트로모호의 기계 금속에 녹아 붙어 버린 채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울부짖는 달라스 선장의 절규는 꿈에서나 그릴 만한 지옥도가 아닌가. 그것도 과학 문명을 극도로 위태롭게 느끼는 마음이 만들 만한 지옥도. 명심해야 할 것은 에일리언이 인간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에일리언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LV-426 행성이라는 심연에서 영겁의 시간 동안 잠자고 있던 에일리언을 인간이 찾아 깨웠다. 그래서 차라리 꿈에서 깨어 난 것은 리플리가 아니라 에일리언이라고 해야 이 영화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이다.

꿈을 암시하는 이야기 구조는 이 영화를 그토록 강렬하게 불길한 암시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그것을 견딜만한 고난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이후 다섯 편의 후속작이 만들어질 만큼 프렌차이즈가 되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리플리는 구원자의 면모를 확장해 갔다. 이주민의 유일한 생존자 아이를 구하는 여성 전사가 되고 추방된 죄수들을 위해 거룩한 종교적 희생을 감내하며 발달한 유전자 기술에 힘입어 200년 후에 부활해서는 인간을 냉소하는 구원자가 된다. 에일리언의 신적 폭력에 기술 문명이 아니라 순수한 투지와 집념으로 저항하는 구원자 리플리에게서 느끼는 신화적 매혹이 이 프렌차이즈를 이끌었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우주적 규모의 세계체제가 된 자본주의의 탐욕이 에일리언이라는 심연의 재앙을 자초하는 주범이 된다는 또 하나의 테마는 일련의 충격적이고 불길한 사건들을 사회적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또한 인간을 닮은 로봇 안드로이드를 통해 드러낸 창조자 인간의 자가당착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보다 인간적인 복제 생명체 레플리컨트의 고뇌를 빌어 대자적 존재의 존엄에 대한 물음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쩌면 우리는 통제 불가능한 난폭한 존재 에일리언을 숭배하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초발달한 미래의 세계에서도 인간을 압도하는 존재를 만나고 싶은 어떤 충동으로써 말이다. 프렌차이즈의 시작이 된 <에이리언>은 이 모든 방향의 영감을 지닌 영화다.

<에이리언>을 만든 리들리 스콧은 에일리언이라는 존재에 매혹되는 지점에 관심이 깊었던 것 같다. 그는 <에이리언>의 프리퀄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 커버넌트>를 세상에 내 놓으면서 이 매혹에 대해 보충한다. 그가 보충한 상상은 지구의 인간을 창조한 외계의 지적 존재가 있고 이들이 에일리언을 배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에일리언이라는 존재를 리들리 스콧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리들리 스콧에게 에일리언은 인간의 인식 영역 바깥에 대해 품는 환상의 담보물이다. 과학적 인식 체계가 발전하더라도 언제나 남는 인식 바깥의 것들, 인간의 사고가 닿지 않는 것에 대해 품는 편집증적 환상이 우리에게는 늘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주는 표식 말이다. 인간을 압도하는 산성피를 가진 외계의 생명체에 대한 상상은 인간을 창조한 또다른 존재가 있다는 상상과 다르지 않고, 이 세상이 프로그래밍된 매트릭스에 불과하다는 상상과 멀지 않다. 달이 하필이면 정확한 크기로 정확한 위치에서 지구를 돌면서 태양을 완벽히 가리는 이유부터 우주가 빅뱅으로 존재하게 된 이유까지 과학적 사고를 확장한다고 해도 사물과 존재에 대해 풀지 못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열쇠의 담지자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비켜 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과학은 체계적인 망상, 편집증에 대한 투쟁이지만 편집증은 언제나 과학의 심연에 존재한다. 리플리의 꿈 속 깊은 곳에서 에일리언이 기다린다는 상상은 과학이 자신의 심연에서 SF를 바라보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치 과학의 막다른 길에 공상과학의 신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