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해부>

<추락의 해부>의 법정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법적 판결이 무엇을 근거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층 차양막에 난 핏자국과 사뮈엘 말레스키의 직접적인 사인, 즉 머리 왼쪽의 강한 충격에 대한 인과 관계를 재현 검증한 두 과학 수사관의 증언은 상대방의 의견을 완전히 기각하지 못한다. 4층 다락방에서 스스로 뛰어내렸을 가능성에 대한 논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이지만, 이는 3층 발코니에서 사뮈엘을 누군가 밀치고 둔기로 머리를 가격하는 것이 가능할 개연성이 적다는 것에 따른 상대적 우위일 뿐이다.

이 공판 이후로 법정 공방은 증거주의의 원칙을 잃은 것처럼 흘러간다. 검사는 산드라가 남편 사뮈엘을 정서적으로 괴롭혀 왔으며, 사건 하루 전 크게 다툰 점, 사건 당일 조에와의 인터뷰를 방해한 사뮈엘에 대해 분노했을 가능성을 부각하며 산드라를 몰아 세운다. 과학 수사가 명백하게 밝힐 수 없는 사건의 인과를 심증적 개연성을 통해 드러내는 것은 법정 증거주의의 원칙 위에서는 불가할 것이다. 프랑스의 법정이 다른 원칙을 채택하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적 심리의 관점에서 보면 과학 수사 이후 검사의 논리 전개는 초점을 맞추어 가지 못하고 산개하거나 역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다니엘의 마지막 증언도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마치 이것이 판결을 이끄는 결정적 증언인 것처럼 배치하고 있지만 말이다. 다니엘 역시 과거 사뮈엘의 심적 상태를 유추할 수 있는 말을 증언했을 뿐이다. 나는 그저 산드라가 사뮈엘을 살해했을 증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검사의 기소가 기각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영화는 판결의 이유를 알려 주지 않는다. 과학 수사의 증명 불가능성을 제시한 이후 가능한 법정 공방의 방식은 법리적 다툼이겠지만, 이 영화는 이상하게도 그 과정을 생략한다. 그리고 사건에 대한 판결이 오로지 산드라와 사뮈엘의 관계나 그들의 심적 상태에 달려 있는 것처럼 바라본다. 그러나 이 영화의 법정이 인물의 내면을 향해 무대화되었다고 하기도 어렵다. 이 영화는 법정이 사건과 인물의 표면을 다루는 곳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영화는 사건 표면의 진실, 즉 사뮈엘 추락사 직전의 순간을 가려 놓고 산드라의 중립적으로 굳어 있는 얼굴 밑으로 뚫고 들어 갈 균열도 보여 주지 않는다. 아들 다니엘의 마지막 증언도 온전히 믿기 힘들다. 판단하기 어려운 다니엘이 마르주의 조언대로 그저 산드라를 믿어 보기로 결정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판은 인물 내면의 동기를 향해 전개되지만 정작 인물의 내면은 파악 불가능한 대치 상태가 이 영화를 대하는 곤란함일 것이다. 영화의 중간 지점, 사뮈엘의 추락사 용의자로 산드라가 기소되어 공판이 준비될 때 영화는 1년 후라는 자막 표지와 함께 그 시간을 모두 생략한다. 기소된 시점부터 아들 다니엘과 피의자 산드라의 상호 작용을 차단하기 위해 마르주가 산드라의 집에 파견되었다. 피의자와 아들, 그리고 법무부 파견 직원이 동거하는 1년의 맥락을 가리는 것부터 이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곤란함은 예정된 일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표면에 머물면서 판단을 미룬다. 다니엘의 시각장애 보조견 스눕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이 영화가 미루어 놓은 진실의 담지자일 것이다. 그 표면을 뚫고 들어가면 진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심장함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서려 있다. 그러나 진짜 곤란함은 사건과 인물의 진실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통찰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판결은 이루어진다는 것이 진정한 곤란함이다. 법적 판결은 맹목적으로 수행적이다. 사건이 있으면 법은 반드시 판결한다. 이 영화도 1심 판결 결과를 마지막 국면으로 삼는다. 이는 불가피하다. 이 영화는 진실의 판별 불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해 법정을 오해하거나 오용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판별의 불가피함을 이미 감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측면의 진실은 반대편의 진실이 징후적으로 드러나게 만든다.

<레 미제라블>

이 영화는 파리 외곽의 작은 도시 몽페르메유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르포르타주다. 이 고착화된 슬럼 구역에는 이민자와 빈민이 밀집되어 있다. 유럽과 아프리카가 혼재하고 무슬림과 집시가 드나드는 이 곳은 21세기 비참이 압축된 공간이라 할 만하다. 영화는 이들의 삶을 탐사한다. 영화가 이 지역을 담당하는 강력반 경찰의 행적을 따라 가기는 하지만, 영화의 시선은 그들과 동행하는 기자의 시선에 가깝다. 

경찰은 이 지역의 주민들을 경계하고 적대한다. 범죄와 사건이 끊일 날 없는 몽페르메유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위험 인물이다. 실제로 몽페르메유의 사람들은 위험하다. 누구는 살인을, 누구는 절도를, 누구는 폭행을 저지른다. 이 영화는 결코 몽페르메유 사람들의 선량한 이면을 보여 주지 않는다. 반대로 경찰이 의심하는 대로, 그들 중에서 결국 사건의 범인을 찾아 내 보여 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들에 대한 이해를 단지 잠재적 범죄자와 같은 수준에 머물지 않고 싶어진다. 이것은 어쩌면 하층민과 빈민가의 삶을 다루는 영화에 대해 지니게 되는 오래 된 관습적 반응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몽페르메유의 삶을 다른 수준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 삶의 표면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계급적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걷어낸다는 뜻이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하다 — 이데올로기의 층위가 옅어지는 순간의 현상의 표면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와다가 이사의 집을 수색할 때 마주치는 아프리카식 계모임이나 공터에서 어울려 노는 아이들의 인류학적 현장뿐만 아니라,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경찰들의 소진한 모습에서도 그 표면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 내내 우리가 지켜보는 표면은 몽페르메유 사람들의 적대감 서린 눈빛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화염병을 들고 경찰을 노려 보는 이사의 눈빛은 순수하게 응축된 적대감 그 자체다. 범죄 사실보다도 이들을 더욱 위험하게 보이게 하는 이 눈빛이 어떤 현상의 표면에 가깝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경찰의 태도에 상응하는 반응이라고 서서히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정 범죄 혐의와 상관 없이 모든 주민에 대해 경계하고 적대적인 경찰과, 그것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몽페르메유 사람들을 지켜 본다. 경찰과 주민들의 적대는 서로에게 표면이자 심연이다.

시민을 존중하고 절차를 엄격하게 지키려 하는 경찰 스테판은 <레 미제라블>을 경찰의 폭력에 대한 빈민촌의 저항 같은 장르적 세계로 축소되지 않도록 만드는 인물이다. 동시에 그 역시 대결의 현장에 연루됨으로써 영화 속 적대를 당사자의 차원으로 고정시킬 수 없게 하는 균열 지점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몽페르메유에서 벌어지는 일의 표면으로부터 그 이상의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영화는 이를 강렬한 사건의 표면에 뛰어들기 전에 이미 암시한 바 있다. 즉,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프랑스 국기가 휘날리는 월드컵의 열기가 환유하는 국가, 불평등하게 구조화된 체제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더해, 중심부 국가 내부에서조차 본원적으로 주변화를 필요로 하는 세계체제 원리의 이데올로기적 시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몽페르메유의 사람들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위험에 포획되어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적대적인 눈빛은 세계의 적대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눈빛은 세계의 폭력에 대해 나 있는 입구이자 출구다. 이 순환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은 없을까? 이 근원적인 질문에 답할 지혜가 내게는 없다. 다만 <레 미제라블> 안에서 말하자면 스테판이 이사를 겨눈 그 총을 내려 놓는 것만큼 시급한 것은 없어 보인다. 스테판의 총이 이사의 화염병보다 더 파국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