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배달부 키키>

1. 내가 키키를 처음 만난 건 대학 신입생 때였다. 제목만 들어 온 <마녀 배달부 키키> 비디오 테입을 학교 어학실에서 발견했을 때 나는 침묵이 흐르는 어학실 안에서 흥분한 입을 애써 막아야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드디어 보는구나. 하지만 들뜬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내가 발견한 그 테입은 한국어 더빙도 자막도 없는 일본판이었다. 그 때는 일본 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귀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드문 경험을 했을테지만 그림만으로는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기 어려웠고, 한동안 키키는 내게 미지의 사연을 간직한 아이로 남았다. 개인사를 끄집어 낸 것은 키키와의 완벽한 첫만남이 무산된 것이 여전히 아쉽기 때문이다. 그 때 키키의 이야기를 온전히 만날 수 있었다면 나는 키키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부모의 품을 떠나 낯선 서울에 홀로 던져진 스무 살의 내가 달리 구하지 못했던 위로와 용기를 여기서 얻지는 않았을까.

2. 열 세 살에 독립해 낯선 바닷마을 도시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고군분투하는 키키를 나는 이제 그저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나도 여전히 키키처럼 타인을 만나 관계를 만들고 세상에서 내가 해 낼 몫을 찾는 데 노심초사하는 경험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처 받거나 낙담하고 두려움에 휩싸여도 삶은 이 과정을 매번 되풀이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에 부풀었던 키키가 바닷마을에 도착하고 이내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노라면 그 감정이 또렷하게 와 닿아서, 그런 마음의 움직임은 예감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내가 익숙해지지 못한 문제라는 생각에 빠진다.

3. 내가 키키의 낙담에 공감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마음 먹기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새겨진 것으로부터 발현되는 불가피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키키가 노부인의 의뢰로 그의 손녀에게 청어 파이를 배달하면서 직감적으로 갖게 되는 손녀에 대한 적대감은 손녀의 불친절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계급적 괴리에서 연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키키는 타인과 세상에 대해 적대하며 존재할 수 없다. 키키의 마법 능력은 선의를 잃는 순간 상실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키키가 자기 존재의 본질을 세상에 도움이 되는 마녀로 규정하는 한 그는 적대를 마주하고서도 삶을 의지로 낙관하고야 말 것이다.

4.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비행의 쾌감은 중요하다. 그의 작품이 원초적이고 불가능한 환상을 긍정한다고 볼 수 있는 징표가 비행 장면에 새겨져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에서 나는 것의 쾌감과 실감은 바람으로부터 일어난다. 찰랑이는 머릿결과 옷깃이 창공을 날면서 부딪치는 공기 저항의 촉각을 시각화한다. 모든 프레임을 손으로 하나 하나 그려 내야 하는 고된 셀 애니메이션 작업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가 시종일관 생략하지 않고 공 들여 묘사하기를 고집하는 것은 인물을 감싸고 도는 공기, 바람이다. 필모그래피에 ‘바람’이 들어가는 제목이 두 작품 있을 정도로 하야오는 바람을 사랑한다. 바닷마을의 계단 꼭대기 또는 수풀 우거진 언덕 위에서 하늘거리는 키키의 단발 머리로부터 바람을 생경하게 감각하다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세계를 낙관하는 근거는 우리가 여전히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고 나면 세상에서 선의는 드물고 항구적이지 않다고 여기게 된 내가 사실은 세계를 감각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누가 영화는 단지 소비하는 상품이라 생각하는가. 마찬가지로 누가 만화 또는 애니메이션은 철부지 어린이들의 전유물이며 유치하고 일고의 생각의 여지도 없는, 수준 낮아서 어른은 볼 수 없는 그림 놀이 상품이라 생각하는가. 만약 이같은 생각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마디, ‘하야오는 보았는가?’ 그만큼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은 어린이에게 꿈을 안기고 즐거움과 만족을 가져다 주면서도 어른들도 쉽게 소화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은 어리석다. 대체로 거의 모든 인간은 하나의 안경 밖에 지니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 안경을 갈아치울 생각을 하거나 아예 만화경으로 ‘개량’할 시도를 잘 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과연 얼마나 그 안경을 바꾸어 봤으며 만화경으로 바라볼 엄두를 내기라도 하였는지.
인간은 하나의 안경만으로 세상에 대해 착각을 한다. 모든 인간의 합의하는 것, ‘인간은 존엄하다’라는 명제도 – 물론 아직도 이 명제의 실현이란 꿈 속의 일이지만 – 그 안경을 통과하면 ‘인간만이 존엄하다’가 되어 버린다. 이 굴절된 명제를 발판으로 삼아 최소한의 이기심이 무한의 이기심이 될 때, 그것이 던져주는 묵시록적 디스토피아는 아마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그려내는 그러한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철저히 우려먹고 재탕 삼탕하며 이용해 먹음으로써 인간의 물질적 풍요를 위한 유용한 ‘도구’로서 기능할 줄로만 알았던 자연도 이 세상 안에서는 인간을 등져 버린, 더이상의 ‘비전 없음’을 알아차린 존재자들이다. 인간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자연의 본뜻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자들이고, 이제는 더이상 자연을 그들의 도구로 사용할 자격조차 없는 족속들이다.
하야오가 그리는 이 디스토피아의 세계는 그런 암울한 비전을 바탕에 깔고 시작한다. 보통 SF에서 그려지는 디스토피아가 인간의 인간성 상실을 문제의식으로 삼는다면, 하야오의 디스토피아는 확실히 그것을 포함하여 인간의 자연적 본성, 세상에 존재하는 타존재들과의 공생을 위한 조화의 본성 자체의 상실을 문제의식으로 삼는 것 같다. 그리고 자연이라는 것의 대명사로 하야오는 곤충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 곤충들은 생각보다 거대하고 딱딱해서 인간이란 그 앞에서는 한없이 연약한 생명일 뿐이다. 그들은 인간이 저질러 놓은 죄업인 부해를 ‘스스로 그러함’의 원리로 소리없이 그러나 분명히 정화해 나간다. 그러나 그 원리에 동참하지 못하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 또다시 출현할 때 곤충은 스스로 그러함의 원리에서 벗어나 인간을 응징하고야 마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은 너그럽지도 인간에게 우호적이지도 않으며 한편으로는 잔인하리만치 그냥 그러한 대로 움직이고 존재해 나갈 뿐이라는 인식이 스며있다고 생각된다. 하야오는 그러한 곤충들의 세계를 무채색의 차갑고 딱딱함의 느낌으로 표피를 삼으나, 그 이면에 내재한 촉소의 부드러움, 황·적색의 따뜻함으로 이면을 덧칠하는 탁월한 감각으로 묘사해 낸다.

나우시카는 일면 메시아적 존재이다. 곤충들의 세계와 타협할 수 없는 인간의 세계 사이에 화해의 가교가 기꺼이 되기 때문이다. 부드럽고 포용적이며 생산의 숭고함을 간직한 여성이 그 가교가 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의 행동과 말은 적마저도 포섭하는, 권위적이지 않은 흡인력이 있고 인간성이 자연과 맞닿을 수 있는 일말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녀는 곤충을 사랑하고 오염되었으나 발딛고 있는 지구를 사랑하며, 동시에 타자를 존재자로 인식치 못하는 우매한 인간을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상적인 공동체, 바람계곡 마을이 군사 국가 토르메키아인에 의해 풍지박산 당하고 새로운 생명을 가꾸려던 숲이 망가져 갈 때 나우시카는 이 우매하고 사악한 인간들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키우지만 종국에는 인간의 비타협성에 화해의 비전을 제시하고 거대 곤충 오모에게 ‘그래도 소중한,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생명으로서의 인간’을 이해시킨다.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여 타인의 사랑에 미치고, 현실의 모순에 닿아서는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느끼면서 자기 부정을 하고, 그럼에도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화해를 모색하는 이 과정은 하야오가 인간에 대해 성찰하고 고뇌해 오는 과정을 차분히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나우시카가 화해의 가교가 된다고 해도 과연 인간이 자연과 화해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화해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엔딩의 카타르시스는 부정할 수 없으나 인간은 자연에게서 너무나도 멀리 내달려 오지 않았나라는 의구심에 그 엔딩은 단지 판타스틱한 카타르시스 이상으로 승화되기가 힘겨워진다(어떤 기사에서 이런 비슷한 평가를 본 적이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하야오는 철학하는 예술가이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날아오르는 판타지가 보여주듯 불가능한 이상에 대한 희망 있음의 처절한 고집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