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퓨리오사의 전투 트럭과 뒤쫓는 임모탄 조 부하들의 차량이 작은 점으로 변하고, 거대한 모래폭풍이 스크린의 우측에서 몰려와 이들을 뒤덮는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심장 박동이 제멋대로 요동치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진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이 장면처럼 무언가를 집어삼킬 듯한 에너지와 위세를 보여 준다.

이 영화가 집어삼키는 것은 물론 우리의 환상이다. 우리는 영화가 쫓고 쫓기는 추격과 질주에 몰입해 온 긴 역사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운동하는 이미지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눈의 관계를 은유하기도 하고, 운동 이미지에 대해 우리가 투사하는 환상의 양태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가 앞으로 나가기를, 지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질주하는 이미지가 그 환상을 재현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퓨리오사의 전투 트럭이 달리는 동안 우리의 환상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추격과 질주가 아찔한 향락적 층위로 우리를 인도해 주리라는 기대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만큼 강렬하게 구현하는 영화는 찾아 보기 힘들다. 이는 단지 황량한 사막과 갈증을 불러 일으키는 건조한 공기, 그리고 모래 바람이나 거대하고 고독한 차량과 위태로운 속도 같은 물적 감각으로부터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의 물적 속성은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우리의 환상을 구성하는 맥락 위에서 상상적으로 감각된다. 이 영화가 우리를 도로 위로 끌어 들여 절박하고 긴급한 추격을 감각하게 만든다는 것은 우리가 이 영화의 선악 대립에 연루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얽히게 되는 이 선악 감각을 무시하고 이 영화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간의 전쟁이 야기한 황폐한 지구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반복하고 있는 극심한 착취와 폭력의 구조를 지켜본다. 지배자, 임모탄 조는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다. 식량, 물, 석유와 같은 자원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을 예속시켜 성적으로 착취하는 권력을 누리면서 신적 존재로 추앙받기까지 한다. 우리 현실을 잠식한 경제적, 사회적, 성적 착취의 폭력 구조가 이 가상의 세계에서 폭로되는 것 같다. 우리의 환상에 절박함을 불어넣고 질주의 욕망을 배가하는 질료가 이 닫힌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그렇게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질주의 환상을 이 영화의 미덕으로 얘기하는 것은 어딘가 부족하다. 정말 중요하다고 할 것은 다른 지점에 있다. 이 영화는 자기 자신의 전통을 비튼다. 아포칼립스의 세계에서 곤경에 처한 이들을 구하는 것은 맥스가 아니라 퓨리오사다. 맥스는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퓨리오사는 해방을 위해 투쟁한다. 맥스는 투쟁을 돕고 방향을 조언할 뿐, 퓨리오사가 승인하고 결행한다. 맥스는 혁명의 주체의 자리를 퓨리오사에게 양도하였다. 임모탄 조 체제에서 희생자의 총체적 모습을 띈 퓨리오사는 ‘당신이 기다리는 그 자는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혁명 주체의 원리를 구현한다. 진정한 혁명의 주체는 납치당한 자이고, 복종하고 노동을 착취당하는 자이며, 혐오와 객체화로 위협받는 여성인 것이다. 자신을 납치당한, 착취당하는 희생자 여성에서 혁명을 수행하는 자로 뒤집어 규정하는 순간, 이 영화는 이제 반대로 귀환하기 위해 질주한다. 약속의 땅 그린 랜드는 존재하지 않고 시타델에 두고 온 퓨리오사 자신의 역사를 해방하는 것이야말로 혁명의 실체라는 깨달음이 좌-우에서 우-좌로 뒤바뀐 귀환하는 질주 이미지로 표상된다. 그리고 이 여정은 다른 생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탈주는 해방과 희열을 약속하지만 우리는 막다른 곳에서 그린 랜드의 사막을 볼 뿐이라는 것, 그제서야 우리는 기겁하며 출발한 곳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

귀환의 질주가 완수되고 나서, 맥스는 결국 퓨리오사의 시타델을 떠난다. 맥스는 여전히 서부 영화의 영웅과 같은 운명이다. 그는 퓨리오사의 공동체에 속할 수 없다. 맥스가 왜 떠나는지 나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맥스는 퓨리오사가 새롭게 만들 시타델 체제, 그 역사 바깥에 있어야 이 시리즈의 질주하는 이야기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퓨리오사는 멈추었지만 맥스는 떠나야 질주의 향락적 상연을 멈추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이 점에 유념해야 할지도 모른다. 혁명보다, 계속 즐기기를 욕망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을 보는 내내 나는 이 영화가 < 혹성탈출>의 프리퀄이 아니라<12몽키즈>의 다른 판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2몽키즈>에서 제임스 콜이 인류 파멸의 원인을 오인한 지점, 그러니까 ’12몽키즈’라는 공상적 동물 보호단체의 동물 해방 퍼포먼스는 이 영화에서 침팬지 시저가 인간에 대항해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 기대했던 부분과 정확히 겹친다. 그리고 <12몽키즈>와 마찬가지로 이는 오인에 지나지 않았다.

<12몽키즈>의 결말 부분과 마찬가지로 <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 역시 인간의 파멸은 공항에서 암시된다. 이는 심증을 굳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오자마자 검색해 본 결과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12몽키즈>에 대한 기시감 속에서 봤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 말하기 싫어졌는데,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영화는 원숭이의 인간에 대한 혁명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 정도다.

시저는 인간의 손에 길러졌고 그에 대한 애정을 여전히 갖고 있다. 시저의 목표는 삼나무 숲이라는 원숭이의 해방 공간을 만드는 것, 그의 각성한 동료들과 함께 자치구를 형성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원숭이와 인간의 대립 양상은 그러한 원숭이 자치구를 위한 투쟁으로 요약된다.

어쨌든 이 영화에서 인간은 원숭이에게 대립되는 타자로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원숭이는 인간과 공존할 수 없다는 최종적인 각성에 ‘아직’ 들지 않았고,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 약품 ALZ113의 확산은 ‘일찍’ 암시되고 있다. 요컨대 원숭이의 해방구는 만들어졌지만 혁명은 임박하지 않았고, (이게 가능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이라는 대립물의 파멸은 일찍 찾아올 것 같은 암시. 이것이 이 영화의 원숭이 혁명에 대한 적절한 타협점이다. 작가는 각성한 타자의 혁명보다는 차라리 인간 자신의 과오에 의한 멸망이 더 받아들이기 쉽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아무튼 이 영화가 원숭이들의 ‘혁명의 시작’이 아니라 ‘진화의 시작’이라는 이야기. (원제는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원제가 오히려 정직하지 못한 경우다.) 그리고 오랜만에 12몽키즈를 떠올려 반가웠다는 이야기.

내일부터 여름휴가가 시작이고 제주도를 갈 계획인데 아직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아 이렇게 밍기적거리고 있는 중. 설레지 않는 여행이라니…하지만 대부분의 내 여행은 그랬고 이게 내 방식이겠지.

추신1: 이 영화에서 시저가 처음으로 하게 되는 인간의 말은 ‘No’다. 시저는 인간에게 통제 받는 운명을 거부함으로써 각성한 주체가 된다. 주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부하는 용기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일상의 운명을 거부하지 못하는 조종당하는 주체에 지나지 않는다.

추신2: 이 기회에 12몽키즈를 한 번 보시라. 아마 테리 길리엄의 영화 중 가장 이해하기 쉬울 것이고 다양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발견할 것이며 덤으로 브래드 피트의 놀라운 연기력과 매들린 스토의 매력에 빠질지도 모른다. 아, 브루스 윌리스 형님은 이 영화에서도 대머리니까 기대하지는 말고.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1414

뜸하게 찾아보는 박노자의 글이 요즘 점점 좋아집니다.
제가 과연 소위 맑시스트나 좌파 뭐 이런 수사적 범주에 포함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들이 일면 옳다고 생각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제게는 원하고 노력한다면 최소한 중산층 언저리에 낄 수는 있을 만한 사회적인 조건이 조금이라도 있기는 하고
그것이 주는 최소한의 안정성을 또 원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관념적으로는 자본주의의 극복을 위해 혁명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이것이 현실적으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객관적인 존재로서 제게 있어서조차도 혁명은 간절함과 동시에 두려움이나 불안함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봐 온 혁명을 보면 또한 혁명을 쉽게 말하기 힘들어집니다.
박노자의 지적처럼 지금까지 혁명은 권력과 부의 철폐가 아니라 이동으로 귀결됐으니까요.
저는 혁명을 낭만적인 형태로 바라보는 편입니다.
어떤 변화의 양상들이 축적되어 시간이 흘러 돌아봤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질적인 단절이나 이동이 발생했음을 뒤늦게 알게 될, 즉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 뒤늦게 알게 될 그런 긴 호흡의 혁명.
(지구상의 몇몇 국가나 지역에서가 아니라, 즉 변화의 전위가 아니라 전체가 바뀌는 것이 혁명이라고 한다면 긴 호흡일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과연 이런 긴 호흡의 시기를 지나고 난 후에는 과연 모순이 종식될 수 있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혁명 자체에 모순이, 모순 자체에 혁명이 내재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내게 사회적 변화는 그래서 혁명보다 급진적 개혁에 가까운 것이 오히려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집니다.
방금 떠올린 엉터리 가설인데 혁명은 무의식의 형태에, 개혁은 의식의 형태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진보적 또는 급진적 의식이 사회 개혁을 주도해 가면서 서서히 무의식의 영역을 바꾸어 나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것 아닌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