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냐 개혁이냐’를 아직까지 붙들고 있으면서 드는 잡생각
개혁은 혁명을 위한 발판이다. 개혁의 의미가 단지 그것 뿐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변화’의 근본적 의미를 혁명이 좀더 온전하게 담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이다. 진정한 변화란 산 정상을 두고 급전환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다시말해 이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의, ‘꺾이는’ 지점이 변화일 것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근본적 모순을 안고 인간의 비인간화를 향해 가열차게 달음질하는 행태의 중단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인식론적 단절’이 아닐까. 포퍼의 논의는 이러한 현사태에 대해서 확고한 판단을 유보한 것처럼 보인다. 그가 말하는 개혁은 자본주의 체제의 공고한 성벽을 철저히 자본주의화되어 있는 인간들에 의해 무너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모순이 있으며 낭만성이 베어 있다.
포퍼가 말하는 개혁은 급전환이라는 정상을 오르기 위한 등정의 과정으로서만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의 열린 사회란…일면 긍정적이고 이 시대의 문제 해결을 위한 본질적 요건으로 보이지만 모순의 중심을 논하기에는 정치적 배려가 다분히 포석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태그:] 혁명이냐 개혁이냐
마르쿠제
자려고 하다가, 뒤적거리던 ‘혁명이냐 개혁이냐’에서 문득 이 대목을 올리고 싶어 다시 컴퓨터를 켜다. 기존 과학이 연구대상으로서 가치를 버리고 사실을 취한 반면, 사회, 역사 철학이 가치 또한 연구대상으로 취하는 근거가 역주에서 대충 소개되어 있는 듯하다. (어디까지나 나의 판단이지만)
대담자 : 교수님, 선생님께서는 마르크스주의가 폐쇄된 사상적 체계이며, 모든 인식과 요구가 변증법적, 사적 유물론이라는 기본사상으로부터 엄격하게 연역적으로 도출된다는 견해에 동조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마르크스주의는 비록 과학적으로 입증되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철학적 토대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정치적, 도덕적 요구의 총체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르쿠제 : 마르크스주의는 결코 “폐쇄된 사상체계”가 아닙니다. 그 사상의 객관성이나 보편성은 역사의 객관성이며 보편성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내부에서 역사에 대해 작용하고 있는 힘이며, 역사의 내부에서 현존하면서 그 사상의 개념적 토대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이론 자체의 현실적인 표현양식을 변형시킵니다. 그 개념적 토대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과정에 대한 변증법적 분석”으로서, 바로 그 분석에서 사회를 변화시킬 인간적 필연성 – “자연적 필연성”이 아닙니다 – 이 도출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주 : 칸트의 범주론에 따르면, 필연성은 경험 일반의 요청으로 연역되는 오성개념으로서, 가능성Moglichkeit(o는 oe 발음의 오 움라우트) 그 자체를 통하여 주어진 현실성Wirklichkeit 을 뜻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가능성과 현실성을 결합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체가 가지고 있는 오성의 어떤 특수한 작용, 즉 요청Postulate이 개입되어야 한다. 이것을 사회이론으로 환원시키게 되면 “요청”은 인간의 “사회적 실천”으로 대치된다. 사회적 실천이란 부정적인 현실을 부정하는 데에 동원되는 인간의 의지적 행동인 바, 현실 그 자체는 결코 그 자체에 필연성을 내포하지 않는다. “자연적 필연성”은 인간의 실천적 행동이 개입되지 않을 때 대상에서 그 관성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인간적 필연성”은 현실에 대한 자각을 통해 얻어진 현실성이 인간의 목적의식 및 의지와 결합할 때 비로소 현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cf.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Hamburg, Felix meiner, 1956), SS115-125 S266. H. Marcuse, Reason and Revolution (Boston, Beacon Hill press, 1960), pp. 282-283.
혁명이냐 개혁이냐 : 마르쿠제 포퍼 논쟁. (사계절, 홍윤기 편역) p. 4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