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쉰을 넘긴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우리 사회에서 ‘분신’이라는 극한적 항거 행위가 사라졌다고 믿었던 시기에, 더욱이 수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씨의 대통령 당선으로 개혁과 변화의 희망을 말하고 새 시대가 열렸다고 말하는 시기에, 한 늙은 노동자가 외로이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이다. 아내와 두 딸을 이 세상에 남겨둔 채, 마치 이 나라에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려는 듯이.

실제로 이 나라에는 두 개의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 하나의 세계에서 벌어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절망과 굴종은 다른 세계 사람들의 희망과 기대에 아무런 자극을 주지 않는 듯하다. 이 시대 노사관계를 그대로 보여주듯 1200명에 이르는 정리해고, 파업 이후 해고자 18명·징계 89명, 급여 가압류, 재산 가압류를 자랑하는 두산중공업의 노동탄압이 불러온 죽음에 대해 다른 세계는 개혁과 변화를 위해 무척 바쁜 듯 눈길을 주지 않고 있다. 무엇을 위한 개혁과 변화이고 또 무엇을 위한 정치인지 묻고 싶은데, 노당선자는 미국과 자본을 향해 자신의 개혁과 변화가 ‘위험’하지 않음을 홍보하기 위해 바쁜 듯하고, 인수위는 ‘정책을 인수하기 위해’ 바쁜 듯하고, 김대중 정부는 떠날 준비로 바쁜 듯하고, 특히 노동운동을 했다는 노동부 장관은 노동부 장관이 되기 위해 노동운동을 했음을 마지막까지 확인시켜주기 위해 바쁜 듯하다.

덜 바빠서인가, 분신자살 8일 만에 한나라당이 정부와 당선자 쪽에 두산중공업 문제 해결에 나서라고 성명을 냈다. 물론 “절차를 거쳐 쟁의행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불법이라니, 가진 자의 법이 아닌가”고 외친 배달호씨에게 화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도 두산 재벌은 앵무새처럼 ‘법과 원칙’을 되뇌고 있는데, 그 ‘법과 원칙’을 적극 ‘보수’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반응은 그러니까 그들의 눈에 ‘노동 친화적’인 디제이 정부와 ‘친노동적’인 노무현 당선자 쪽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노동 친화적’, ‘친노동적’이라 …, 그 눈은 다른 세계 사람들의 것인 게 분명하다.

‘노동 친화적’인 디제이 정권 아래 구속된 노동자들의 수는 와이에스 정권 때보다 40% 증가했다. 아이엠에프 위기극복이라는 현 정권의 ‘공적’은 재벌개혁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희생의 대가를 치른 것이다. 공기업 한국중공업이 사기업 두산중공업으로 탈바꿈한 예가 보여주듯 디제이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재벌을 개혁하는 대신 재벌의 배를 더욱 불려주었고, 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대신 노동자들에게 눈물을 강요했다. 구속, 해고 등 전통적인 노동탄압 이외에 손배소와 가압류라는 신종 노동탄압 무기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솔선수범했다. 필수공익 사업장은 ‘공익’이라면서 가혹한 구조조정이 따르는 사기업화에 박차를 가했고, 이에 반발하는 노동자들에겐 직권중재란 칼을 들이댔다. 발전파업, 병원파업 등 모든 파업은 그들이 정한 ‘법과 원칙’에 따라 언제나 불법이었다. 디제이 정부의 이러한 노동정책이 부른 노동자 구속, 해고와 징계, 그리고 총 1600억원에 이르는 손배와 가압류에 재계는 물론, 여야·주류언론,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모두 한쪽 세계에 속해 있음을 과시했다.

한 세계의 절망과 분노는 빈익빈 부익부의 심화와 20 대 80의 고착 때문만이 아니다. 지독한 불평등 위에 굴종까지 강요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배달호씨는 그러한 굴종 대신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해고자 모습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해지고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 더러운 세상, 악랄한 두산, 내가 먼저 평온한 하늘나라에서 지켜볼 것이다. 동지들이여 끝까지 투쟁해서 승리해주기 바란다.” 그는 “미안합니다”로 유서를 끝맺고 있다. 미안하다니 누가 누구에게 삼가 고인의 명목을 빌 뿐 할말이 없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행동하는 지성’ 부르디외를 추모하며

`행동하는 지성’의 상징인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23일 밤 7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구별짓기> <상징폭력과 문화재생산> 등에서 이룬 비판사회이론가로서의 업적과 함께 무엇보다 그는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의 저자 홍세화씨가 글을 보내왔다.편집자

에밀 졸라에서 사르트르로 이어지는 프랑스 지식인의 사회참여 전통을 이어받은 큰 별, 피에르 부르디외가 세상을 떠났다. 농민운동가 조제 보베의 말처럼, 그는 이론적 담론과 사회운동을 분리시키지 않는 의지를 한 순간도 놓지 않은 `삶 자체가 참여’였던 지성인이었다.

개인적으로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의실에서 먼발치로 본 적밖에 없지만 나에게도 그는 큰 스승의 한 분이었다. “사회학적 성과를 이루면서 사상과 행동의 변증법을 살았다”거나 “사회 참여와 분리될 수 없는 과학으로 사회학을 살았다”는 평가들 너머 내가 그에게서 받은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지식인의 자기성찰에 관한 것이었다. 사계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사회학교수가 되었을 때 그 학교와 교수들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으로 첫 강의를 시작했던 그는 20년 뒤 마지막 강좌의 주제를 `피에르 부르디외’로 정해 자기 자신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요컨대, 그에게 있어서 사회와 만나는 방식에 관한 지식인의 자기성찰은 사회 참여의 기본 조건이며 출발점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가령 한국의 대학강사들에 대한 착취구조에 맞서 싸우지 않는 대학교수들은 한국사회를 진단하고 비판할 자격이 없다. 그들 중엔 피에르 부르디외를 자주 인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식민지땅 알제리에 대한 증언을 통해 연구 작업을 시작했던 그는 최근 몇년 동안 `행동하는 이성'(raison d’agir) 그룹과 함께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에 온 힘을 경주했다. 그에게 “신자유주의는 보수주의 혁명으로, 과거를 복고시키면서 진보인 양 드러내는, 퇴보를 진보로 둔갑시킨 기이한 혁명”이다. 그리고 “쉬뢰더, 블레어, 조스팽은 `신자유주의를 적용시키기 위해 사회주의를 끌어들인’ 가짜 좌파들”이다. 그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불러온 `비참한 세계’에 맞서, 그것이 빚어내는 사회적, 문화적 폐해에 맞서 지식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고 끊임없이 물으며 `좌파의 좌파’를 제기한다. 3년 전에 그는 귄터 그라스와 가졌던 회견에서 사회적 발언을 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발언해 마땅한 공인들이 공인으로 남기 위해 입을 봉하고 있다면서 `아가리를 열라’고 아가리를 열었다. 또 <세계의 진짜 지배자들에 관한 물음>을 통해 오늘날 정치경제적 권력보다 더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상징 권력, 즉 커뮤니케이션을 장악하고 문화상품을 생산, 유통시키는 권력에 대한 비판적 지식인들의 견제 구실을 강조하였다.

피에르 부르디외, 그는 갔다. 그러나 그가 남긴 교훈은 우리들의 현실 속에 그대로 살아 있어야 할 것이다.

홍세화/<아웃사이더> 편집위원

국가폭력과 연대의식/ 홍세화

한국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연대 의식은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경쟁 의식과, `나만 당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집단적 무의식에 압도되어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누군가 말했듯이, “인간 연대를 향한 길이 개인의 존엄성을 추구하고 존중하는 길 이외에는 없는” 것이라면, 사회를 관통하는 연대 의식은 사회가 사회구성원들 각자의 존엄성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규정된다.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듯이, 단 한 사람의 인간적 존엄성이라도 무시될 수 있는 사회에서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연대 의식은 정착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도 국가폭력에 희생되는 것을 용인해선 안 되는 까닭은 그 사람의 인권 자체가 중요하거니와 그래야만 사회의 연대 의식을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대 의식은 사회정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다.

최종길 교수 살해 사건과 수지 김 사건은 다시 국가기관이 사회구성원의 인권을 처참하게 짓밟는 범죄를 저질렀음을 드러냈다. 그런데 워낙 그런 일에 면역이 되어서일까, 아니면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일이기 때문일까, 경악과 분노의 목소리,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한 강력한 장치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는다. 가령, 탈세 혐의의 족벌 언론사주들을 옹호하기 위한 동원에 동참했던 이른바 한국사회의 원로들은 이 엄청난 사실 확인에 대해서 아직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다.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정의나 연대 의식까진 말하지 않더라도, 지금은 죽어 말이 없다 한들 그들의 인권이 탈세 언론사주의 인권이나 언론 개혁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을 `홍위병’이라고 불렀던 어느 문인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에 비해 하찮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균형잡히지 않은 그들의 사회 인식이 안타깝다고 말하기엔 `사회 원로’나 이른바 `국민 작가’이라는 말이 안쓰럽고 `어두운 시기를 잘 보낸 기득권자’의 다른 이름이 아닌지 묻게 한다.

두 사건은 국가의 안보를 담당하는 기관이 저지른 범죄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범죄를 국가안보를 빌미삼아 국가권력이 저지른 범죄라고 말할 수 있고, 또 그와 같은 국가폭력이 국민들에게 `나만 당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심리를 조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사회구성원들의 단결을 요구하는 국가안보의 강조가 실은 연대 의식을 기초에서부터 흔들었음을 알 수 있다. 곧, 국가 안보를 앞세운 색깔론은 지역주의와 더불어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연대 의식의 성장도 가로막는 중요한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국가 폭력의 또다른 희생자인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 대한 사법 살인에 참여했던 사실에 대해 소신을 밝히라는 거듭된 요구를 아예 못들은 척하는 것도 색깔론과 지역주의에 올라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해 관련 책임자들이 기억상실증과 모르쇠로 일관하고 사회가 그것을 용인할 때 연대 의식 대신에 `나만 당하지 않으면 그만’이란 의식이 팽배해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는 김대중 정부도 사회정의와 연대 의식을 배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라의 안보와 질서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관철될 때 사회정의와 연대 의식은 설자리가 없어진다. 반면에, 사회정의와 연대 의식이 서 있는 곳에 안보와 질서는 자동적으로 보장된다. 적어도 사회의 안보·질서 의식과 사회정의·연대 의식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60만이 넘는 노동자들의 조직인 민주노총을 대표하는 단병호 위원장을 질서의 이름으로 감옥에 가두고 있다. 온건한 사회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그가 어겼다는 질서가 과연 누구의 무엇을 위한 질서인지 묻지 않을 만큼 한국 사회의 질서·안보 의식은 사회정의·연대 의식을 완전히 억누르고 있다. 그리하여, 올해도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을 끝내지 못하고 또 한 해를 넘긴다. 국가보안법과 함께.

홍세화/<아웃사이더>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