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11일 화요일. 1914년 사라예보의 총성이 20세기를 실제로 맞이했듯이 이날은 21세기를 실제 맞이한 날로 기록될 것이다. 특히 `본토에 대한 진주만 공격’으로,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상징에 대한 강타로 인식할 미국으로선 더욱 그러할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온갖 선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동시 다발 테러를 “자유를 공격 목표로 한 전쟁 행위”라고 평가하면서 “악에 대한 선의 전쟁”을 선포했고,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미국에 대한 전쟁이 아니라 문명에 대한 전쟁”이라고 말했다.

충격을 표현할 말의 부족을 느꼈다는 <르몽드>의 콜롱바니 주필은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 1962년 베를린에서 스스로 베를린인이라고 선언했던 존 에프 케네디처럼 우리는 모두 뉴욕인이다”라는 말로 시작해 “광기는, 그것이 비록 절망에서 비롯되었다는 핑계가 있다 하더라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라고 칼럼을 끝맺고 있다.

무고한 사람을 수없이 희생시킨 테러행위는 그 누구의 동의도 끌어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절망과 증오의 광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처럼 원한에 차고 증오심으로 불타게 만든 근본 원인을 규명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가령 지금까지 미국은 보복 행위의 실천에서조차, 특히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관계에서 편파적이었다는 칼럼리스트 윌리엄 파프의 지적은 타당하다. 또 좀더 넓은 시각에서, 호혜평등과 인권의 보편적 가치라는 수사 너머 실제 세계에서 힘의 논리 아래 빚어지는 인간 차별과 존엄성 무시와 굴욕 강요에 관한 근본적 성찰이 요구된다. 콜롱바니의 `우리는 미국인이다’라는 선언이 제1 세계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시엔엔>을 비롯해 세계의 모든 매체를 통해 우리가 거의 일상적으로 느끼는 것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의 가치는 각 인간의 에너지 소비량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걸프전쟁 이래 미국의 `제로 사망’ 전술도 이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 전술은 코소보 전쟁에서 거듭 확인되었는데, 부시 행정부의 등장과 함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에서의 편파적 거리 두기 국제경찰 노릇과 미사일방어(엠디) 전략의 신고립주의로 나아갔다. 이와 같은 부시의 전략전술에는 실상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제로 사망, 대량 폭격 전술과 미사일 방어전략은 아무튼 얼굴 있는 적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이번에 `얼굴 없는 전쟁 상대자’를 만난 것이다.

테러 행위의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받는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재정 지원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중대한 시사점을 남긴다. “어떻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지원할 수 있느냐?”는 자신의 질문이 미국쪽의 “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싸운다”라는 단 한마디로 일축되었다는 클로드 셰이송 프랑스 전 외무장관의 술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은 이슬람 근본주의도 세력 관계에 이롭게 작용한다고 판단되면 장기판의 알로 이용했다.

부시 행정부가 기존의 전략전술, 특히 미사일 방어전략을 수정할지는 미지수다. 또다른 나라와 달리, 본토에서 단 한 번도 외침의 불행을 겪어보지 않은 미국에게 이번 테러가 자기성찰의 계기가 될지도 분명치 않다. 그들의 단순한 선악 구분법과 오만이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러를 막는 방어는 전쟁이 아니라 정의”라는 어느 평자의 지적은 진리임을 미국은 알아야 한다.

한편,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 한국인은 미국인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사회 현상을 바라보도록 특히 언론이 작용하지 않는지 돌이켜봐야 할 듯하다. 유럽인들처럼 우리가 아무리 “오늘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라고 선언해도 미국은 결코 우리를 유럽인들처럼 바라보지 않는다. 멀리 되돌아갈 것 없이 최근의 매향리, 독극물 유출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오늘 우리가 `뉴욕인이다’라고는 말할 수 있을지언정 `미국인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다.

홍세화/<아웃사이더> 편집위원

시장 논리 만에 지배하는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그 이상의 것을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경웅

새로 등장한 어릿광대

전경련 산하 자유기업원의 민병균원장의 `시장 경제와 그 적들’이라는 글은 이렇게 끝난다. “어찌하다가 우리가 좌경의 길로 들어섰는가. 지금이라도 국정 파탄을 규탄하는 국민 궐기가 필요하다. 좌익이 더 이상 국정을 농단치 못하게 우익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익의 궐기를 비장한 투로 선언한 그의 글을 읽으면서 박홍씨와 함께 `부퐁’이 떠올랐다. 부퐁(bouffon)은 중세 유럽에서 왕이나 귀족 밑에서 익살부리고 재롱떠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던 어릿광대를 가리키는 프랑스말이다. 실제로, 전경련의 기업가들과 신문 족벌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귀족들이니 휘하에 부퐁을 부리면서 즐길만도 하다. 다만 옛날 부퐁의 익살과 재롱에는 그래도 삶에 대한 연민과 해학이 담겨있었던 데 반해, 한국의 현대판 부퐁에겐 그런 면은 없고 섬기는 귀족들의 나팔수 노릇을 함으로써 귀염받는다는 차이가 있다.

`시장 경제와 그 적들’이라는 글 제목이 말해 주듯이, 자유기업원 원장은 한국 부퐁계 선배들이 즐겨 찾던 `자유민주주의 체제’ 대신에 `시장 경제’를 내세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오래 써먹어 이젠 신선함이 없어진데다가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씨가 증언해주듯이 그것은 주로 골프채에 의해 지켜져온 것임이 밝혀지고 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시대에 맞게 레퍼토리를 바꿨음직한데, 그에 따르면 김대중 정부가 지금 한국 사회를 “참여연대, 전교조, 민노총 등과 합세하여…자본주의 근간을 침식하는 체제변혁적”으로 몰아가고 있단다. 이건 큰 일 정도가 아니라 `역사적 결단’ 이상의 사건이다. 사회당, 녹색당, 공산당이 연정 중에 있는 프랑스에서도 볼 수 없는 `자본주의 근간을 침식하는 체제변혁’이라니 한국 땅에서 세계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가보다.

그런데 무지에서 온 것일까, 그는 `시장 경제’와 `시장 사회’를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 경제 부문을 시장 논리에 따르는 게 `시장 경제’라면, `시장 사회’는 사회의 모든 부문을 시장 논리에 복속시키는 `시장 전체주의 사회’를 말한다. 그는 속내에 있는 `시장(전체주의) 사회’ 대신에 아무도 부정못할 `시장 경제’를 사용하는 속임수를 쓴 셈이다. 시장 전체주의 사회에선 오직 시장만 존재한다. 교육이 사립학교 법인의 돈벌이를 위한 장에 지나지 않듯이, 건강도, 문화예술도, 사회보장도, 심지어는 가족 관계도 시장 논리에 의거하게 된다. 조지 오웰의 또 하나의 신세계가 그려지는가.

비정규직이 60%에 이르는 땅에서 “민노총이 힘을 쓰고 있어서 어느 기업도 마음대로 해고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공정 거래를 요구하면서 소액주주운동을 벌이는 “참여연대에겐 `민(民)에 의한 자본의 통제’라는 무시무시한 목표가 숨어 있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마이크로소프스사 분할을 명령한 미국은 자본주의에서 일탈한 것이 된다. 놀라운 경지의 재간이다.

과거에 박홍씨의 등장에 환호작약했던 족벌신문들은 물론 새로 등장한 부퐁을 쌍수로 환영한다. 특히 조선일보는 “국정 기조에 이념적 성향 문제를 최초로 수면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계쟁점으로 부각시켰다는데 더 큰 의미를 둘 수 있다”면서 그 의미를 더 크게 부각시킨다. 새 부퐁의 등장은 “국민이 개혁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으니 개혁한다고 더 벌이지 말고 마무리나 잘하라”고 떠들고 있는 족벌신문들에게 한 줌의 소금과 같은 것이리라. 끝으로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기어이 꺼내야겠으니 진중권씨는 표절 운운하지 않기를. -한국의 우익님들, 부디 수준 좀 높이시라!

홍세화/<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을 남북을 가른다>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