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케이코의 일상을 묘사하는 방식은 <다음 소희>에서 혼자 춤 연습하는 소희를 바라볼 때 받은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다음 소희>의 그 장면에서 내가 소희의 춤을 거친 몸짓의 수준으로 느낀 것은 소희가 자신을 내맡긴 음악을 나는 모르며, 단지 내가 그 장면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소희의 몸놀림이 만드는 옷깃과 바닥의 소음 뿐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소희의 감각을 관객으로부터 격리함으로써 소희의 춤은 객관적인 관찰의 대상이 되었고, 동시에 소희라는 인물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보였다. 케이코의 말 없음이 화면의 공간을 채우는 생활 소음과 타인의 목소리에 대비되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도 그런 격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두 영화의 감각적 격리는 반대로 작동한다. 소희의 감각이 관객으로부터 차단됨으로써 우리는 소희의 춤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게 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에서는 케이코에게 주어지지 않은 소리 감각이 케이코에 대한 이해의 방해물이다. 케이코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이 영화에 참여하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청각의 방해를 무릅쓰고 시각적 이미지에, 케이코의 몸짓과 얼굴에 집중하게 된다. 우리는 케이코가 감각하고 지각하는 방식을 모방하면서 이 영화 안으로 들어간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케이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미지가 이야기를 창출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된다. 그런 과정을 잘 드러내는 오프닝 시퀀스는 어쩐지 사랑스럽다. 소리는 현장의 느낌을 생생하게 만들 뿐, 연속해서 제시되는 이미지가 인물과 시간, 공간을 열어 놓는다. 케이코, 눈이 흩날리는 겨울 밤, 낡은 세월의 복싱장, 관장과 코치, 화이트 보드의 글자로 주고 받는 대화, 권투 훈련, 훈련 일지, 샌드백. 어쩌면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단지 잘 배치된 이미지가 이야기를 생성하고 있다고 직감하는 감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하나 같이 정갈하게 고안된 노스탤지어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어서, 이에 감응하는 사랑스러움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 영화가 케이코를 단지 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불러 낸 것은 아닐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이 영화가 노스탤지어 세계를 정합적으로 구성하려면 케이코가 필요하다. 곧 문을 닫는 도쿄에서 가장 오래 된 복싱장의 마지막 여성 프로 복서에 대한 이야기를, 16mm 필름의 입자로 그려내는, 고전적 이미지 서사의 영화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케이코를 도구적으로 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케이코가 노스탤지어 세계의 영화적 형식을 납득시키는 열쇠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케이코의 일상을 유심히 지켜보고, 상실에 응수하는 실존적 선택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케이코의 삶을 견디고 대리 경험하기 위해서도 영화의 노스탤지어 세계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케이코가 낡은 복싱장에서 노쇠한 관장과 충직한 코치들과 함께 권투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맞는 것이 두려워진 슬럼프에도 불구하고 복싱장을 대표하는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자 하지 않았다면,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코로나 시대에 겪는 케이코의 곤란과 수어로 나누는 대화의 신비로운 침묵을 우리가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어디서 나올 수 있을까.

케이코는 영화에 대해, 영화는 케이코에 대해 정합적으로 필요하다. 이 점이 영화의 노스탤지어를 감상적 아름다움의 지옥으로만 치부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닫힌 세계다. 상대방 선수의 펀치에 고꾸라지는 케이코의 허우적거림이 너무 생동감 없어서 권투의 양식을 어설프게 흉내 내고 있다고 느낄 때, 이 세계가 그런 방식으로 구성된 환상임을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자기완결적인 세계의 윤리를 선한 타인들이 아니라 케이코가 지탱한다. 상실과 패배에 괴로워 하지만 거기에 멈춰 서지 않은 케이코의 작은 선택이 영화에 가능성의 출구를 열어 주기 때문이다. 그 선택이 설령 또 다른 낭만적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해도, 그것은 케이코가 영화의 환상을 떠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 같은 것은 아닐까. 어쨌든 예정되지 않은 현실의 불안이 그 뒤에 따라붙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은 믿음직스럽다. 달리 좋은 마지막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퓨리오사의 전투 트럭과 뒤쫓는 임모탄 조 부하들의 차량이 작은 점으로 변하고, 거대한 모래폭풍이 스크린의 우측에서 몰려와 이들을 뒤덮는다. 나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심장 박동이 제멋대로 요동치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진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이 장면처럼 무언가를 집어삼킬 듯한 에너지와 위세를 보여 준다.

이 영화가 집어삼키는 것은 물론 우리의 환상이다. 우리는 영화가 쫓고 쫓기는 추격과 질주에 몰입해 온 긴 역사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운동하는 이미지와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눈의 관계를 은유하기도 하고, 운동 이미지에 대해 우리가 투사하는 환상의 양태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가 앞으로 나가기를, 지속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질주하는 이미지가 그 환상을 재현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퓨리오사의 전투 트럭이 달리는 동안 우리의 환상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추격과 질주가 아찔한 향락적 층위로 우리를 인도해 주리라는 기대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만큼 강렬하게 구현하는 영화는 찾아 보기 힘들다. 이는 단지 황량한 사막과 갈증을 불러 일으키는 건조한 공기, 그리고 모래 바람이나 거대하고 고독한 차량과 위태로운 속도 같은 물적 감각으로부터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영화의 물적 속성은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언제나 우리의 환상을 구성하는 맥락 위에서 상상적으로 감각된다. 이 영화가 우리를 도로 위로 끌어 들여 절박하고 긴급한 추격을 감각하게 만든다는 것은 우리가 이 영화의 선악 대립에 연루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얽히게 되는 이 선악 감각을 무시하고 이 영화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간의 전쟁이 야기한 황폐한 지구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반복하고 있는 극심한 착취와 폭력의 구조를 지켜본다. 지배자, 임모탄 조는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다. 식량, 물, 석유와 같은 자원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을 예속시켜 성적으로 착취하는 권력을 누리면서 신적 존재로 추앙받기까지 한다. 우리 현실을 잠식한 경제적, 사회적, 성적 착취의 폭력 구조가 이 가상의 세계에서 폭로되는 것 같다. 우리의 환상에 절박함을 불어넣고 질주의 욕망을 배가하는 질료가 이 닫힌 세계의 폭력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그렇게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질주의 환상을 이 영화의 미덕으로 얘기하는 것은 어딘가 부족하다. 정말 중요하다고 할 것은 다른 지점에 있다. 이 영화는 자기 자신의 전통을 비튼다. 아포칼립스의 세계에서 곤경에 처한 이들을 구하는 것은 맥스가 아니라 퓨리오사다. 맥스는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퓨리오사는 해방을 위해 투쟁한다. 맥스는 투쟁을 돕고 방향을 조언할 뿐, 퓨리오사가 승인하고 결행한다. 맥스는 혁명의 주체의 자리를 퓨리오사에게 양도하였다. 임모탄 조 체제에서 희생자의 총체적 모습을 띈 퓨리오사는 ‘당신이 기다리는 그 자는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혁명 주체의 원리를 구현한다. 진정한 혁명의 주체는 납치당한 자이고, 복종하고 노동을 착취당하는 자이며, 혐오와 객체화로 위협받는 여성인 것이다. 자신을 납치당한, 착취당하는 희생자 여성에서 혁명을 수행하는 자로 뒤집어 규정하는 순간, 이 영화는 이제 반대로 귀환하기 위해 질주한다. 약속의 땅 그린 랜드는 존재하지 않고 시타델에 두고 온 퓨리오사 자신의 역사를 해방하는 것이야말로 혁명의 실체라는 깨달음이 좌-우에서 우-좌로 뒤바뀐 귀환하는 질주 이미지로 표상된다. 그리고 이 여정은 다른 생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탈주는 해방과 희열을 약속하지만 우리는 막다른 곳에서 그린 랜드의 사막을 볼 뿐이라는 것, 그제서야 우리는 기겁하며 출발한 곳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

귀환의 질주가 완수되고 나서, 맥스는 결국 퓨리오사의 시타델을 떠난다. 맥스는 여전히 서부 영화의 영웅과 같은 운명이다. 그는 퓨리오사의 공동체에 속할 수 없다. 맥스가 왜 떠나는지 나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맥스는 퓨리오사가 새롭게 만들 시타델 체제, 그 역사 바깥에 있어야 이 시리즈의 질주하는 이야기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퓨리오사는 멈추었지만 맥스는 떠나야 질주의 향락적 상연을 멈추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이 점에 유념해야 할지도 모른다. 혁명보다, 계속 즐기기를 욕망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미드소마>

스웨덴의 작은 마을 호르가에 도착한 이튿날 절벽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의식을 목격하고, 대니는 이곳을 떠나려 한다. 그날 밤 대니는 이상한 꿈을 꾼다. 숙소 건물을 몰래 나온 크리스티안과 친구들이 대니를 남겨 두고 호르가를 떠나는 것이다. 이를 목격하고 절규하는 대니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절벽 의식에서 목격한 처참하게 망가진 시신, 그리고 자살한 여동생과 부모의 시신이 대니의 꿈을 가득 채운다. 하루 아침에 가족을 잃고 남자 친구와 관계마저 불안한 상황에 놓인 대니를 지배하는, 누군가로부터 버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이 트라우마가 응축된 장면에 담겨 있다. 그런데 이 꿈은 대니의 심리와 반대다. 현실에서는 대니가 호르가를 떠나고 싶어 하는데 꿈에서는 남자 친구와 그의 친구들이 대니를 남겨 두고 떠난다. 대니가 직접 목격했을 것 같지 않은 동생과 부모의 죽은 모습이 꿈에 나타난다는 점이 의아하지만, 이 장면이 대니가 꾸는 꿈이 맞다고 한다면 이 꿈의 전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대니가 당장 호르가를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 펠레가 찾아 와 대니를 설득하고 위로한다. 처음에는 이 전통을 이해해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펠레는 이 호르가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가족이고 힘들 때 붙잡아 주었다고, 크리스티안이 힘들어 하는 너를 잘 붙잡아 준다고 느끼는지 묻는다. 대니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대니는 호르가를 떠나지 못한다. 나는 이 때 대니가 펠레에게 설득 당했기 때문에 호르가를 떠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대니는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하는 크리스티안을 버리고, 이 호르가에서 자신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니의 꿈은 그 기대, 욕망을 그것이 야기하는 죄책감과 두려움 안에서 뒤집힌 방식으로 상연하고 있다.

대니의 욕망이 실현되는 방식은 파국적이다. 크리스티안은 비겁하지만 대니는 파국적이다. 크리스티안은 선택과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려 하고 대니는 그것을 감당하면서까지 매달리려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대니가 갖게 되는 원망과 분노는 증폭된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취약한 주체 대니에 대해 가혹한 반응일지 모르지만, 대니의 이 감정이 펠레로부터 매개된 욕망과 만날 때, 그리고 더불어 호르가의 이교적 의식을 통해 드러날 때, 그것은 치명적으로 위험해진다. 불타는 희생양을 바라보며 희열에 찬 듯한 대니의 웃음에 동참하는 것이 어쩐지 나는 위험해 보인다.

호르가의 이교적 문화는 이 영화를 기괴하고 공포스럽게 만든다. 물론 동시에 농담처럼 만들기도 한다. 호르가는 서구 근대 주체의 타자에 대한 왜곡된 환상을 자기 자신에게 투사해 본 농담 같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농담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는 저렇지 않지”, “스웨덴에 실제 저런 문화는 없어”라는 믿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스웨덴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며 폭소했다고 한다. 누구도 이 영화가 표현하는 세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이 영화는 단지 우리 안의 편견과 왜곡된 환상을 우리 안에서 전유해 보고 있을 뿐이다. 다만, 당신이 우리와 같은 주체라면.

그렇게 구성한 호르가에서 확인할 수 있는 타자성의 핵심은 주체가 소멸된 공동체라는 점에 있는 것 같다. 호르가의 사람들에게 개인의 삶은 모두 공동체의 종교적 의식을 수행하는 수단인 것처럼 보인다. 정해진 연령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기꺼이 희생 제물이 되기를 원하며 사랑과 슬픔 같은 개인의 감정도 의례적 집단 행위 안에서 소거된다. 전근대 종교적 파시즘에 가까워 보이는 이것이 타자에 대한 서구 근대 주체의 왜곡된 환상임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목가적 환상과 더불어 자기 지시적으로 유희한다는 것은 다소 혼란스러운 일이다.

이 영화의 공포는 호르가의 광기 어린 종교 의식에 대니의 감정과 욕망을 밀어 넣는 데서 야기된다. 그것은 정말로 공포스러운 일이다. 대니라는 취약한 주체가 이교적 타자에 대한 왜곡된 환상을 기만적으로 즐기기 위해 희생됐을 가능성을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주해야 하는 것은 유사 종교와 살인의 뒤섞인 향락 앞에서 무너진 대니의 정신이다. 영화는 왜 대니를 그렇게까지 만들어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마도 아리 애스터는 개의치 않겠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나는 그 욕망이 불가해하고 공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