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에 흐르는 도도한 긴장을 언급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묘사력을 시험해야 한다. 브롱코 헨리의 이니셜이 박힌 천으로 온몸을 쓰다듬으며 심취한 필의 모습을 묘사하지 않고 필이라는 인물의 억압적, 공격적 성격 이면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필이 로즈를 적대시하고 그를 신경쇠약으로 몰아 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 역시 로즈의 피아노 연주를 조롱하는 듯한 필의 밴조 소리를 묘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이 영화는 인물의 말이 적은 대신에 움직임, 소리, 표정에 대한 감각을 좇아 가는 것으로도 벅찰 정도로 생동감 있게 긴장을 불러 일으킨다. 달리 말하면 인물들의 긴장과 갈등을 이 영화는 언어적으로 가시화하기보다 감각적으로 암시하려 한다. 발화된 상황보다 암시적인 감각이 긴장과 갈등을 더 강렬하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가 영화가 전해 주는 감각을 불안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로 감각한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어쩌면 감각적 표면으로부터 내가 발견한 왜상을 말하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필이 매번 목장의 뒷산을 응시하면서, 능선과 빛의 움직임이 만드는 형상으로부터 짖는 개의 왜상을 확인하는 것처럼 말이다. 레드 밀 식당에서 피터가 만든 종이 꽃을 짓이기는 필의 손가락 움직임으로부터 나는 왜 성적 암시를 받았을까. 또는 나는 왜 자꾸만 피터가 그의 친부 역시 살해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새아빠 조지 역시 안전하지 못할 거라는 암시를 곱씹고 있을까. 나는 이것이 왜상적 오인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에 강하게 이끌린다. 이 영화는 확증하지 않고 암시함으로써 왜상적 오인을 유도하는 단서를 남기는 것이 영화의 본질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가 하는 일은 영화의 이미지로부터 저마다의 왜상을 만나는 일인 것만 같다.
영화적 왜상은 그저 허상일 뿐일까.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이야말로 나라는 자아 그 자체인 것처럼, 왜상적 환영이야말로 영화의 정체 그 자체는 아닐까. 우리가 발견한 왜상이야말로 영화가 던져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필이 뒷산의 형상에서 찾은 왜상의 정체를 피터가 알아차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왜상적 마주침을 밀어붙여 나와 영화의 교차점을 파악해 나가는 것 말고 달리 영화를 이해할 길은 없지 않을까. 어쩌면 이 영화의 묘사에 너무나도 사로잡혔기 때문에, 나는 이 같은 생각 언저리를 맴돌기만 한 것 같다.
그나마 사족을 붙이자면 나는 이 영화에서 피터라는 인물이 필보다 더 관심이 갔다. 피터는 이 영화의 비밀과 암시 전체에 연루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어머니 로즈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병적인 집착을 보인다. 어머니의 히스테리에 피터가 말한다. “이럴 필요 없게 내가 정리할게.” 남성성에 대해 맹목적 애착을 보이는 필이 거의 반사적으로 로즈에 대해 극도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피터는 운명적으로 필과 대결한다. 피터는 이 영화가 공들여 묘사하는, 필로 대변되는 남성성의 대척점에 선 남성성이다. 피터는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고, 필을 두려워 하며 순종하는 듯한 태도로 필에게 접근해서, 그의 욕망과 환상, 그리고 취약함을 간파하고 이용해 나간다. 피터는 연약한 외양을 한 포식자다. 어쩌면 로즈가 조지와 결혼할 때부터 피터는 이미 살인을 단계적으로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게 된다. 어머니에 대한 억압적 아버지-적대자를 기꺼이, 가차없이 살해하는 피터의 강박과 증오는 필의 그것보다 더 복잡하고 뒤틀린 남성성을 드러낸다. 필의 장례식에서 돌아온 로즈와 조지를 창문 너머로 지켜보는 피터의 응시가 필의 나르시시즘보다 더 위험해 보인다. 이 때 피터의 옅은 웃음이 우리에게 일그러진 환상을 되돌려 주고 있지 않은가.
<아네트>는 영화가 그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원리에도 불구하고, 내밀한 사적 세계를 들여다 보는 예술이기도 함을 보여 주는 한 예다. 주어진 시간 동안 우리가 카메라라는 유일한 시선에 사로잡혀 그 시선의 망막 앞 또는 뒤를 공개적이지만 은밀하게 체험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시선의 진짜 주인이 존재한다고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허구적 세계를 믿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감독 레오스 카락스와 그의 딸 나스티야가 직접 등장해 영화의 시작을 알리고 나면, 표현주의적 모험 같은 이 영화의 낯설고 익숙한 모든 면모에 대해 레오스 카락스의 자의식과 욕망을 연결하고 싶어지는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이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레오스 카락스와 나스티야임을 알아 채는 것은 중요한 일일 것이다. 이 영화가 감독 개인에 붙들려 있다고, 감독의 고백을 대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을 형성하는 것이, 어딘가 익숙한 원형적 이야기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영화적 선택을 견디는 한 방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어떤 환상에도 관대할 수 있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것이 레오스 카락스가 온전히 사적인 환상을 자유롭게 표출하게 위한 선택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 볼 수도 있다. 안의 죽음부터 헨리의 자기 혐오적 불안과 도취적 충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낯설게 침입하는 인서트 쇼트부터 여과 없이 밀어 붙이는 무대 장면의 맹목성까지. 이 영화를 독해하는 것이 대개 레오스 카락스의 취향과 감정, 욕망과 성찰을 탐색하는 길로 향하는 것은 관객인 우리에게 피하기 힘든 여정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숨막히게 내밀해 보인다.
영화가 레오스 카락스의 욕망-상징 체계에 포섭되어 있는 것 같은 이 작가주의적 질식 상태를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네트의 존재가 아닐까. 정확히 말하면 인형 아네트에서 인간 아네트로 변신을 감행하는 순간 말이다. 아네트가 인간의 육체로 등장하는 순간은 영화의 내밀한 환상을 실현하는 순간이면서 동시에 그 실현이 환상을 무너뜨리는 순간이 된다. 인간 아네트는 아버지가 사랑할 것은 더 남아 있지 않다면서 아버지, 심지어 어머니로부터도 착취 당했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 선언은 어쩌면 영화의 내적 진실 또한 폭로하는 것 같다. 나는 이 말이 영화가 인형 아네트를 착취했다는 것도 동시에 암시한다고 느낀다. 영화 내부의 환상에 예속된 존재로서, 인형 아네트는 영화가 재현하는 살인의 안전한 목격자, 착취적 상황의 무해한 대리자이지 않았는가. 아네트는 이제 영화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표정을 짓지 않는다. 말하고 노래하는 인간 아네트는 긴장과 어색함 같은 통제되지 않은 진짜 얼굴의 잉여를 품고 있다. 인간 아네트는 헨리에게뿐만 아니라 영화 자신에 대해서도 거부의 몸짓으로 자기 존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헨리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짐짓 인형 아네트를 진짜인 것처럼 재현하는 영화의 환상을 전복하는 적대자로 나타난 인간 아네트. 그는 헨리의 소위 심연이라는 환상으로 향하는 영화의 움직임을 중지시킨다. 이 때 영화가 진실을 직시할 유일한 가능성이 열린다. 그것은 레오스 카락스를 경유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성립되는 영화적 경험, 자폐적 환상을 종식시키고도 지속 가능한 이야기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어떤 시간을 거쳤더라도 마지막에는 결국 인간 아네트를 선택했다는 것이 우리가 이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미덕이 아닐까.
영화의 시작에 나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처럼 이 영화는 정말 우정에 대한 이야기일까. 이런 질문을 먼저 하는 이유는 <퍼스트 카우>가 다루는 피고위츠와 킹 루의 우정이 기대한 것만큼 깊고 자세하지는 않아서인 것 같다. 차라리 영화는 이 둘의 이야기를 빌어 미국 초기의 시대상을 살펴 보려 하는 것 같다. 변방을 지키는 군대가 오가고,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 백인 이주민과 원주민이 섞여 살며, 수렵과 채집이 흔해 보이고, 허름한 움막 같은 것이 듬성듬성 자리잡은 시장이 가장 번화한 곳이라 해도 될 정도로 척박하게 묘사되는 미국 서부 오리건주 틸리컴이라는 마을은 현대 미국의 정치경제적 삶이 시작된 지점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이끌어 낸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영화는 꾸준히 미국의 역사를 의식하고 있다.
미국은 킹 루의 말대로 역사의 손길이 닿지 않은 기회의 땅이다. 체제가 공고해지기 전에, 누구든 그 기회를 잡아 꿈을 이룰 수 있다. 그런 희망, 또는 욕망에 이끌린 자들이 미국을 만들었다. 어쩌면 그 기회에 대한 믿음과 성공에 대한 욕망이 미국을 번성하게 하는 원동력일지 모르지만, 불행히도 성공은 극소수의 몫일 뿐이다. 이를테면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팩터 대장과 빵장수나 비버 사냥꾼 또는 금광을 찾아 헤매는 서부 개척자 사이에 성공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비교 불가능하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이를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고찰로까지 밀고 가지는 않지만 이 영화에는 이런 생각을 촉발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 있다. 화폐와 암소. 피고위츠와 킹 루가 맛있는 빵으로 거둘 수 있는 교환 가치가 당시 암소 자체의 교환 가치를 초과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피고위츠의 빵이 팩터 대장의 암소로부터 훔친 우유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더더욱. “우유 한 컵이면 빵이 열 두 개, 그럼 최소한 은화 60개는 벌어”라며 성공을 꿈꾸는 킹 루의 구상이 팩터 대장이 쥐고 있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소박해서 안타까워진다. 게다가 이 같은 킹 루의 사업 아이디어가 팩터 대장이 데려 온 암소 한 마리를 보고 떠오른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피고위츠와 킹 루의 이야기는 허용치를 넘어 선 모방 욕망에 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희생양적 징벌을 다룬 우화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두 남자가 사업 성공의 꿈을 좇는 과정을 차분하게 대한다. 그 꿈이 위법한 경계에 걸쳐진,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예정한 것처럼. 그리고 이 영화는 두 남자의 우정에 대해서도, 언제나 그렇듯이, 관계의 표면 이상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영화를 보고 나면 그래도 피고위츠와 킹 루는 이 세상에서 서로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두 남자의 개별적 우정의 감정에 대해서보다 우정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 더 생각해 보게 만든다. 불평등한 세계가 조건 지은 도처의 착취적 위험 속에서 인간이 기거할 안식처는 선의와 믿음에 기반한 우정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맞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는 개별 인물의 감정과 서사를 구축하기보다 그것의 공백을 만들고 그 공백을 구성하는 태도에 관심을 둔다. 서사의 결 바깥, 또는 그 위에 진짜 재현하고 싶은 것이 놓여 있다고 해도 될까.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 서사의 부피가 커 보이는 <퍼스트 카우>에서도 공백은 중요하다. 피고위츠와 킹 루의 대화 사이에 재현되는 온갖 종류의 노동, 질퍽한 시장 바닥 곳곳에서 물건을 팔고 음식을 짓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 사이를 돌아 다니는 개 한 마리나 팩터 대장의 저택에서 대화가 오가는 동안 이를 듣고 있는 원주민의 표정 등이 서사에 통합되지 않은 채 영화의 물리적 시간을 채운다. 나는 이것이 앞서 말한 미국의 역사성에 대한 구체적 재현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 역시 미국 사회에서 소수자에 속할테지만, 미국적 신화를 희구하는 역사의 변방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환경의 척박함과 생존의 양태, 그리고 분명히 존재하지만 생략된 타자를 드러냄으로써 비로소 미국의 역사성을 구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다고 이 영화는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켈리 라이카트에게 구체적 경험이란 곧 타자를 감각하는 일이 아닐까.
나는 타자들 중에서도 아메리카 원주민을 드러내는 방식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 나는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영화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은 언제나 특별하게 시선을 끈다고 생각한다 — 플롯이 분절된 지점에는 반드시 원주민이 나타나 그 사이를 이어 주는 것 같이 느껴졌다. 이를테면 피고위츠와 킹 루의 첫 만남이 끝나고 암소가 오리건주에 처음 발을 디딜 때, 이 전환을 처음 맞이하는 것은 원주민의 시선이다. 틸리컴을 찾은 피고위츠가 홀린 듯 따라 가 당도한 선술집에서 킹 루를 재회하게 이끄는 것 역시 붉은 옷을 입은 원주민 소녀다. 두 남자가 빵을 만들어 첫 장사를 시작할 때에도 붉은 옷의 소녀가 동행한다. 우유를 훔치는 범행이 적발되는 순간도, 피고위츠와 킹 루의 도주 도입부에도 원주민이라는 존재가 분기점처럼 등장한다. 켈리 라이카트의 다른 영화에서 쉽게 찾기 힘들 법한 이런 규칙성이 이 영화에서 원주민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활용되는 것을 유념해 봐야 하지 않을까.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에 어울리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원주민이라는 타자가 영화의 서사가 구획되는 순간에 환상의 형태로 개입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원주민이 서사에 환영 같이 직접 들어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팩터 대장 일행으로부터 도주하던 피고위츠가 머리를 다치고 어느 원주민 노부부의 집에서 회복하는 장면은 인물 주변을 의도적으로 흐리게 처리하여 시야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진행된다. 이 장면이 정말 이상해 보이는 것은 정신을 차린 피고위츠가 집을 나설 때에는 노부부의 집이 폐가처럼 변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원주민 노부부는 온데간데 없고 창에 쳐진 커튼도 부인이 앉아 있던 의자도 사라졌다. 집 주변은 어쩐지 정돈되지 않은 수풀이 무성해 보인다. 이 장면을 영화의 현실 내에서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피고위츠가 위중한 상황에서 그를 구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는 것 말고는. 물론 이를 필요로 하는 것은 서사일 것이다. 그 때 영화는 이전보다 더 과감한 방식으로 원주민을 환영화한다.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에서 타자를 감각하기 위해 환상이 개입할지언정 이처럼 명징한 환영 자체로 경험하게 한 예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중심 서사 자체가 환상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시대적으로 현재로 보이는 때부터 시작한다.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어느 여인이 강가로 보이는 어딘가에서 유골을 발견한다. 여인이 옅은 미소를 띠고 올려다보면 앙상한 나무를 오가는 새들이 화면에 담긴다. 그리고 나란히 누워 있는 두 유골의 형체가 화면에 제시된다. 이윽고 피고위츠와 킹 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인이 발견한 유골이 피고위츠와 킹 루의 것인지는 영화가 확증해 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이야기가 이 유골이 촉발시킨 옛날 옛적 있었을 법한 어떤 것이라 가정해 볼 근거가 된다. 피고위츠와 킹 루의 이야기를 이렇게 유골이라는 기호가 중계한다는 점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죽어 사라진 것, 그 흔적으로부터 이야기가 생산된다. 이 이야기의 주인은 없다. 최소한 발굴한 여인이 상상해 낸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는 여인의 마지막 시선을 유골에 두지 않는다. 유골을 응시하는 것은 차라리 여인이 바라 보는 나무 위 새일 것이다. 영화가 그렇게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고위츠와 킹 루의 이야기는 인간의, 기록된 역사의 것이 아니라 자연의, 또는 생략된 타자의 응시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렇게 생각할 때 피고위츠와 킹 루의 중심 서사는 차라리 착시에 가깝고 숲속의 뒤집어진 도마뱀부터 강가를 따라 걷는 어느 아메리카 원주민까지 이 영화가 포착하는 무심한 존재의 양태야말로 유골로부터 떠올리는 과거에 대한 재현의 실질적 대상이 되지 않을까. 이제 피고위츠가 젖을 짜며 암소에게 건네는 선량한 대화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기록된 자를 향해 자신도 아우르는 우정을 지녀 달라는 타자의 바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