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종사, 청춘과의 결별 – 허지웅의 블로그(http://ozzyz.egloos.com/4826102)

허지웅은 일대종사에 대해 과거를 추억하고 후회할 수는 있지만 되돌릴 수 없음을 알고 마음을 내려 놓는 이야기로, 이전의 왕가위 영화에서 보여 준 태도에서 한 발 나아갔다고 평가한다. 나는 엽문과 궁이의 앞만 본다는 말 뒤에 여전히 궁대인이 말한 무예의 마지막 진수, ‘뒤돌아 본다’는 가르침이 강한 자장으로 남아 있으며 내려 놓은 마음이 끝내 미결감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선택이 야기하는 미완의 상실감을 후회 없이 받아 들인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후회하지는 않지만 완성할 수도 없는 이야기인 셈이다.

64수는 이미 잊었어요. 가장 행복하던 때 당신을 만난 건 행운이었죠. 이젠 시간이 없네요. 삶에 후회 없다는 건 다들 하는 말이예요. 후회 없으면 얼마나 재미 없을까요. 엽 선생. 솔직히 당신을 마음에 담은 적 있어요. 별 뜻이 있어 하는 말 아니예요. 좋아하는 건 죄가 아니죠. 다만, 거기까지였어요. 이런 말 아무에게도 한 적 없는데 오늘 당신을 보니 나도 모르게 말해 버렸네요. 우리 응어리는 바둑판처럼 놔두죠. 잘 지내요.

The.Grandmaster.2013

김혜리 : 예전 인터뷰에서 “내 인생의 반은 회고”라고 표현했던 게 기억나네요.

김병욱 : 사람을 만나 즐거운 일이 있으면 이것도 추억이 되어 가슴이 아릴 거라는 생각에 슬퍼요. 심할 때는 기쁜 순간이 오기 전부터 추억이 될 걸 염려해요. (웃음) 그렇게 생각하니 어떤 순간도 온전히 즐겁지 않아요. 한 프로그램을 마칠 때도 비슷해요. 이것도 작은 우주이고 제 현실과 나란히 갔던 평행우주인데, 제 현실은 계속 달려가는 반면에 그쪽은 종영되는 순간부터 존재하지 않잖아요. 연기자가 없으니 그 이후로 그들이 어떻게 살았을지는 마음속에만 있어요. 추억과 비슷한 거죠. 예를 들어 과거에 갔던 장소에서도 저 없이 꾸준히 어떤 일이 일어날 텐데 나는 몰라요. 옛날에 크리스마스이브에 친구가 교회 가서 놀자고 했는데, 그게 설레고 좋았으면서도 결국 전 집에 그냥 누워 있었어요. 막연히 한곳에 속해 버리면 다른 걸 못 볼 거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웃기죠. 집에 누워 있어도 다른 걸 못 보는 건 마찬가지인데요. (웃음) 종교도 신앙은 좋지만 그로 인해 내가 다른 걸 못 볼까 두렵죠.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추억도 만들지 말고 가만히 있다가 종말을 맞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김혜리 : 어쩌면 드라마를 연출하는 행위는 아름답거나 기억할 만한 순간을 만드는 동시에 모니터를 통해서 관찰하는 것이니까, 현실에서 추억을 회고하는 일과 같다고 볼 수 있겠네요.
김병욱 : 어떤 사건도 일어났을 때 즐기지 못하고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즐겨요. 고향에 가면 옛날에 거닐었던 곳을 다시 걷는 게 좋아요. 현실을 잘 못 살고 관념 속에서 사는 것이죠.
씨네21 741호 (2010.02.09~02.23)
심히 공감 가는 이 인터뷰를 읽다가 든 생각.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
하늘이 무너질까 염려하는 기우형 인간과 그들의 걱정 덕분에 맘 편하게 사는 배짱이형 인간.
나는 실제로는 전자에 속하는 편인데 그 걱정의 고통을 피하고자 대체로 모든 일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자 애쓰는 편이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모든 인류가 겪어 온 것인데 내가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지”라고 그 걱정들을 의식적으로 떨쳐내려는 것이다.
가끔 발현되는 내 쿨한 측면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이겨 내려는 허위의식의 소산이다.
그런데 그러고도 시간이 지나면 사소하게 치부했던 것들은 다시 회한과 함께 돌아온다.
그 순간을 충분히 감내하거나 즐기지 못했다는 자책과 함께 과거를 다시 정의하고 기억하려고 애쓴다.
이게 나라는 인간이 과거를 추억하는 한 방식이다.
현재는 미래에 발목 잡혀 있고 과거는 패배하는 현재의 찌꺼기가 되는 것이다.
기우형 인간에게 회고는 충실하지 못한 현재에 대한 후회의 감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