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보칼럼] 가족주의를 넘어서

이장규
(nlflee@chollian.net)

교육이민에 대한 씁쓸함

  요즘 언론 등에서 이른바 ‘교육이민’문제가 심심찮게 논의되고 있다. 한국사회의 비인간적인 입시경쟁과 학벌절대주의 풍토에 대해 절망감을 느낀 사람들이 그 해결방법으로서 아예 우리 사회를 떠나는 이민을 생각하고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할 말 안 할 말 마구 하는 신문’ 조선일보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조차, 사람들이 이민을 떠나는 배경에는 우리 사회의 이념적 정체성의 혼란이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늘어놓고 있다. 이민을 가는 것도 ‘불순세력들’ 때문이란 말인가? 혹시 조선일보는 산불 나는 것도 붉은 색 좋아하는 빨갱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무척 궁금하다)

  조선일보의 헛소리야 무시해버리면 그만이지만, 교육이민이라는 사안 자체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무척 씁쓸하다. 과연 그런 식의 해결방법 밖에 없는 것일까? 아,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 나는 이민을 무슨 조국을 등지는 배반행위 쯤으로 생각하고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무한경쟁과 연고주의만이 판치는 이 처참한 사회를 벗어나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떠나는 그들의 행위를 ‘그래도 내 조국’이라는 무반성적 애국주의의 틀로써 단죄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놈의 얼어죽을 ‘조국’이 도대체 우리에게 그간 무엇을 가져다주었던가?

  내가 씁쓸하게 생각하는 것은 교육이민이라는 해결책 그 자체가 그들을 떠나게 만들었던 한국사회의 비인간적인 입시경쟁이나 학벌 및 지연 위주의 연고주의의 근본적 뿌리라 할 수 있는 가족주의의 틀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과도한 가족주의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조차 가족주의적인 방식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는 마치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도 그런 권력을 가지면 된다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 식의 해결책 속에서는 가족주의나 권력의 행사 그 자체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 논의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식의 해결책이나마 가능한 사람들이 한국사회에서 과연 얼마나 되는가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그대로 고스란히 남게 된다.

  최근의 교육이민 사태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 사회의 과도한 가족주의에 기반한 여러 현상들이 마침내는 그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주도적으로 받아들여온 중산층에서조차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에 대한 비판과 대안의 모색 등 이와 관련된 제반 논의는 공적 담론의 영역에서는 아직까지도 미약한 편이며 이미 언급했듯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조차 대개는 가족주의적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90년대 내내 거대담론의 극복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 한국인의 일상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회문제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가족주의의 문제에 대해 거의 이야기되고 있지 않는 이런 현실이야말로 우리 지식사회의 제반 담론들이 아직까지도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박고 있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가족주의 – 한국적 근대의 핵심 기제

  가족주의는 오늘의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이다. 게다가 보다심각한 것은 이것이 단순히 개별가족의 차원을 넘어서서 혈연이나 지연, 학벌 등에 의한 연고주의나 패거리주의의 수준으로 확대됨으로써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상당수의 사회문제들을 핵심적으로 규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가족주의야말로 전근대와 강고하게 결합된 근대라는 한국적 현실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가족주의의 문제가 우리 사회에만 고유한 현상은 결코 아니며, 이른바 ‘가족의 가치’에 대한 옹호는 서구에서도 우익들이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기치의 하나이다. 또한 가족주의를 매개로 한 한국사회의 전근대성이란 언술 역시 자칫하면, 가족주의를 극복하고 개인주의를 제대로 확립하는 것이 진정한 근대라는 식으로 이미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근대의 완성’이라는 문제틀 속에 함몰될 위험성도 있다. 사실 서구에서조차 ‘근대의 완성’이란 하나의 이념형일 뿐, 실제로는 어떤 방식으로든 전근대와 결합하지 않은 완전한 근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자본주의’나 ‘공정한 시장원리’가 환상이듯이 ‘근대의 완성’이란 것도 일종의 환상일 뿐이며, 근대를 핵심적으로 규정하는 자본의 논리는 오히려 그 속에 자기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전근대를 중요한 한 요소로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사실들을 감안하고 본다 하더라도 현재 한국사회의 가족주의는 그 역기능이 너무나 많이 나타날 정도로 심각하다. 앞에서 이미 언급된 교육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누구나가 문제로 느끼고 있는 우리 사회의 과도한 교육열은 단순히 입시 위주의 교육체계라든지 서울대로 대표되는 학벌 위주의 사회질서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틀림없이 지금과 같은 입시 위주의 교육체계는 변화되어야 하며 현재 서울대가 누리고 있는 과도한 특권적 지위는 혁파되어야 한다. (서울대 문제에 대해 잠깐 언급하자면, 나는 현재의 서울대는 해체하고 인문, 사회, 자연과학 등 순수학문과 기초과학만 국립대로 남겨서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법대나 의대 등 소위 ‘잘 나가는’ 학과들은 국가의 지원이 없더라도 알아서 ‘우수한’ 학생들이 지원할 것이다. 추후 얼마든지 개인적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실용학문 분야에까지 전국민의 세금이 지원되어야 하는가? 이런 말을 하면 무슨 대학을 다녔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꼭 있는데 나는 서울대 출신이다) 그러나 현재의 과도한 교육열 현상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사회문제에 대해 집단적이고 공공적인 관점에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신분상승을 통한 개별 가족의 사회경제적 지위향상만을 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가족주의가 이러한 교육열의 배후에 기본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개별적이고 가족주의적인 해결방식 그 자체를 넘어서기 위한 모색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다른 어떤 해결책도 문제의 본질적인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리라는 생각이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에게서 보여지는 어떤 문제의 공공적 성격에 대한 인식의 부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족주의의 결과이면서 또한 동시에 그 가족주의를 강화하고 합리화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나는 일전에 어떤 잡지에서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각 가정이 깨끗한 물을 마시기 위해 생수나 정수기 등에 지출하는 비용을 모두 합치면 우리 국민 전체가 깨끗한 수돗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공투자재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는 지적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돈을 더 벌어서 더 좋은 정수기를 살지언정 생수 사먹는 돈으로 세금을 좀 더 낼 테니 국가가 책임지고 이런 일을 해달라는 식의 해결책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우리 국민들의 탓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선 꼬박꼬박 세금 내봐야 대부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그 세금이 국민 개개인의 생활에 구체적으로 도움이 된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간의 우리 역사에서 국가권력이란 개개인을 억압하는 구조적 폭력이었거나 잘 봐주어도 하는 일없이 세금만 축내는 집단이었을 뿐이며, 이런 국가에 대한 불신은 워낙 뿌리깊은 역사적 근거를 가지는 것이어서 국가 따위엔 기대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가족주의적 해결방식은 틀림없이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타당성을 가지는 방식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가족주의적 해결방식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커녕 문제를 오히려 확대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으로 개개인과 개별 가족의 차원에서 모든 문제를 각자 능력껏 해결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능력을 키우는 것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 속에서 사회 전체의 공공적 이익이란 부차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문제의 전체적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누구나 입시위주의 교육현실이 문제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 자기 자식만은 기필코 경쟁에서 승리하도록 닥달하는 이율배반 속에서 우리의 교육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지 않는가?

   가족을 위한 희생?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과도한 가족주의는 ‘가족의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이라는 자기합리화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가족의 구성원인 개개인에게 전혀 행복한 삶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민이 늘어난다는 것은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이 땅에서의 삶이 그만큼 소망스럽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한국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듯 하며 이는 단순히 지금의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그간 지속적으로 유지·강화되어온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가 마침내는 개별 가족 스스로에게조차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울 정도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는 생각이다.

  개인이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모든 문제들을 개별 가족의 차원에서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은 모든 이들을 무한경쟁의 전쟁터로 내몬다. 결혼을 해서(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지만) 한 가족을 이루고 난 후 우리들의 삶이 어떠한 식인지 한 번 생각해보자. 신혼 초기의 달콤함은 순간일 뿐, 아이를 낳고 난 후부터 우리는 정신차릴 새도 없이 거대한 수렁에 빨려들어가게 된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당장 육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나마 친정이나 시집에 맡길 수 있으면 그래도 괜찮지만(이 역시 가족주의적 해결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럴만한 처지가 못되는 사람에게 있어서 육아는 말 그대로 ‘전쟁’에 가깝다. 애가 어느 정도 크고 난 뒤에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믿을만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찾아서 주변을 온통 전전하고 다녀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처절한’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이 문제가 개별 가족의 차원을 넘어 사회가 공공적으로 담당해야 할 영역이라는 인식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처절한 노력을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해서라도 적어도 내 자식만은 남들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야만 한다는 식으로 거꾸로 가족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그리하여 상당수의 젊은 부모들은 시설이 안 좋다는 이유로 그나마 있는 국공립 유치원에도 보내지 않고 비싼 사립 유치원을 찾아다니면서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쉴 틈도 없이 일에 매달리곤 한다. 자식에게 보다 ‘훌륭한’ 교육을 시키기 위해 본인들의 ‘처절한’ 노력은 감수하는 이 놀라운 희생정신 — 이걸 언제까지 찬양만 하고 있을 것인가? 하기야 지난 개발독재 시기에 우리의 누이들이 이런 식으로 가족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게 해 준 것이야말로 박정희의 진정한 위대성이라고 떠들고 있는 이인화 같은 이들에겐 씨도 안 먹힐 이야기지만.

  맞벌이가 아닌 부부라고 해서 특별히 나을 것도 없다. 전업주부라는 이유로 육아의 책임을 모두 떠맡게 되는 여자 쪽의 경우, 자신이 집안에 있는 만큼 자식들에게 더 신경을 써서 남들보다는 낫게 키워야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게 될 뿐 아니라 지금과 같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 개별 가족의 능력에 맡겨지는 상황에서 가족의 경제적인 측면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가족 내의 가부장적 질서에 알아서 순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맞벌이 부부에게서도 이런 가부장적 질서는 강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전업주부일 경우 더 심한 것이 일반적이다) 남자 쪽에서도 다른 가족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혹사시켜야만 하는 가장의 의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양쪽 모두 집 안팎에서의 노동 중독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이 가족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실제로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 급선무이며 모든 문제를 개별 가족에게만 떠넘길 게 아니라 이를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공적 영역이 확장되는 것이 필요함에도 이를 위해 가족 단위를 뛰어넘는 노력을 모색하기보다는 다른 가족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기존의 가족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현실이다.

  자녀 쪽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런 식의 가족주의는 오히려 그들을 더 힘들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너희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만큼 열심히 공부해서(요즘은 공부가 아닌 다른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긴 했지만 본질은 마찬가지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부모의 요구는 실제의 희생에 바탕한 것이므로 쉽사리 거역하기 힘든 것이 되고, 그런 가운데 대다수의 자녀들은 어릴 때부터 기를 쓰고 부모의 요구에 따라가다가 그 요구를 더 이상 만족시킬 수 없게 되면 급격히 좌절하거나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부모와 주변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각인되어 온 가족제일주의는 그들이 하나의 독립적 인간으로 자라나는 것을 가로막고 있으며, 많은 청소년들을 머리 속에서는 가족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으로는 가족에 따르기를 거부하게 만드는 정신적 아노미 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가족을 위한 희생이라는 신화는 결코 찬양할 것이 못된다. 가족주의에 기반한 이 신화는 오늘날 청소년을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노동 중독에 빠뜨린 주범이며, 많은 사회적 의제들이 공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해결되는 것을 가로막는 핵심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 가족이 부닥친 문제는 결코 우리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혼자서 기를 쓰고 해결하려 할 게 아니라, 공공적 논의로서 제기하고 사회적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 더 첨언하자면, 나는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한국언론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언론의 핵심적인 기능은 공공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의제의 설정 및 여론의 형성이다. 그런데 우리의 언론은 수많은 사회문제들을 본격적인 공론의 장에 끌어내기보다는 피상적인 사실보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거니와 조선일보 등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임에도 기존의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서 의제설정 그 자체를 아예 묵살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언급한 바 있지만, 언론이 바뀌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도 바꾸기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지적하고자 한다)

  확장된 가족주의와 지역감정

  한국사회의 가족주의는 주로 개별 가족의 층위에서 작동하지만, 개별 가족의 경제적 안정을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는 자기 주변의 친척이나 친지, 지연이나 학연 등을 통한 연고자에게까지 확장되는 경우가 많다. 즉, 우리 사회에 만연한 — 흔히 빽이라고 표현되는 — 연고주의의 폐해 역시 본질적으로는 또다른 가족주의의 일종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연고주의의 폐단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거니와, 여기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하나임에도 원론적이고 당위적인 차원에서의 접근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지역감정의 문제에 대해 가족주의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사회의 맹목에 가까운 지역감정을 언급하면서 흔히들 이는 아직까지  한국사회가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한 증거이며 대중들이 지역감정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이해에 따른 계급적 자의식을 획득할 때만이 진정한 근대적 주체가 형성될 수 있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즉 지역감정이란 어떤 물적 토대의 반영이라기보다는 대중의 의식 속에 아직까지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전근대적 잔재의 표출이며, 이런 비합리적 정서에 따라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전혀 대변하지 못함에도 단지 같은 지역에 기반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 좌파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 정치적 선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식의 접근에서는 지역감정의 해결책 역시 대중의 계급적·정치적 각성 및 이를 추동할 수 있는 보수 대 진보의 이념정당구도 확립을 그 방안으로 내놓게 된다.

  물론 이런 지적은 틀린 말은 전혀 아니다. 나 역시 지역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역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지지정당을 선택하는 이념정당구도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식의 대답이 실제로는 일종의 순환론에 빠져서 아무런 실천적 함의를 갖지 못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즉, 진보정당이 없어서 지역감정이 지속되고 반대로 그 지역감정 때문에 진보정당이 성장할 수 없다는 식으로 지역감정의 창궐과 진보정당의 미성숙간의 상호악순환에 빠지게 되면 실천적으로는 하나마나한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또한 이런 사고방식 속에는 지역감정이란 전근대의 잔재일 뿐 실제로는 아무런 물적 토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식으로 일종의 관념론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런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도 반영하지 않는 관념이란 없다. 글 앞부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완전한 근대’란 일종의 환상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그 안에 필요한 만큼의 전근대를 포함하고 있다. 지역감정이란 바로 이런 전근대와 긴밀하게 결합된 근대라는 한국적 현실의 반영일 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 보면, 한국사회의 확장된 가족주의에 의해 공공적 자원의 상당부분이 지역 연고에 따라 정치적으로 배분되는 현실이 바로 지역감정의 물적 토대로 작용하는 것이다.

  확장된 가족주의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는 서구에서라면 사회적 시스템의 차원에서 접근이 이루어질 사회복지의 상당부분을 가족이나 친지들이 담당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는 못사는 친척이나 친지에 대해 적당한 수준에서 도와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런 저런 연고를 통해 자기 주변에 여유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도움으로 최소한의 기본생계는 유지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결손가정이나 노인문제 등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사회가 처참할 정도로 사회복지분야의 예산과 사회안전망이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IMF사태를 겪는 과정에서 생각보다는 사회문제로 발전되는 정도가 약했던 것도 한국에서는 국가가 담당해야할 사회복지의 상당부분을 친척 내지 친지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은 결국 우리 나라에서는 자기 주변의 누군가가 돈이나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도 그 ‘떡고물’을 얻어먹을 수 있는 가능성이 서구에 비해 아주 높은 편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국가로 대표되는 공공부문의 자금은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 정식 예산 이외에도 각종 공공기금이나 공사 등 준국가기구가 관장하는 준예산성격의 자금은 우리 나라 정도의 경제규모에서는 매우 큰 편이며, 이것은 대개 정치적으로 배분된다.(정책적 차원에 의해서건 개인적 차원에 의해서건) 즉, 특정지역이 정권을 잡고 있으면 그 지역민들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배분되는 공공적 자금의 떡고물을 나눠가질 기회가 그만큼 많아지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 시스템으로 접근되어야 할 사회복지의 문제가 자기 주변에 얼마나 힘센 사람이 있느냐의 문제로 바뀌어 버리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 속에서는 지역주의에 기초한 투표행위란 것이 나름대로는 충분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의 반영이 되며 이에 따라  자기 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정당을 지역주의에 의해 지지하는 ‘이변’이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지역감정의 극복이란 단순히 계급적 자의식을 가지고 진보정당을 지지해달라는 설득만으로는 가능하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과도한 가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느 정도 극복되고 시민적 합리성이 제대로 형성되어야 해결될 문제이며, 당장에 있어서는 강력한 부패방지법의 제정과 예산의 철저한 감시를 통해 공공적 자금이 권력과 가까운 인사나 지역에 정치적으로 배분되는 것을 차단하는 한편 사회복지 시스템의 제도화를 통해 지역이 아닌 생활수준에 근거한 공공적 자금에의 접근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결국 지역감정의 물질적 토대를 허무는 일이 될 것이며, 이런 과정들 속에서 진보정당의 성장도 가능할 것이다.

   가족주의를 넘어서

  그렇다면 과연 한국사회의 과도한 가족주의는 빠른 시일 내에 극복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솔직하게 말해 아직까지는 비관적이다. 가족주의 이데올로기 역시 단순히 가족주의를 극복하자는 설득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며, 개별 가족 차원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 차원에서의 접근과 문제해결이 내 가족에게도 실제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구체적 경험들이 쌓여갈 때에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나 사회적 권력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신은 오랜 역사적 기간을 통해 축적된 것이어서 이런 측면에서의 접근 자체에 대해 별로 신뢰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믿을 것은 내 가족뿐이며 국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무얼 해 줄 수 있겠는가라는 사고방식이 대다수의 한국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이러한 불신을 넘어서는 전망을 보여주고 그것이 구체적인 경험 속에 각인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모든 문제들을 개인이나 개별 가족 차원의 무한경쟁을 통해서 해결하지 않더라도 국가나 시민사회라는 공공적 영역에서의 논의를 통한 사회적 해결책이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며, 일부분이라도 이런 해결책이 실제로 관철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그를 위한 전제로서, 이런 사회적 해결책에 관련한 공공적 논의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내어야 할 것이다.

  이상의 과제들을 수행하기 위해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음의 네 가지 정도이다. 첫째,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을 전체 사회적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공적 의제로 설정함으로써 공공적 논의를 활성화시킬 수 있도록 의제설정기능을 가지고 있는 언론 전반의 개혁이 요구된다. 둘째, 개별 가족의 틀에만 매몰되지 않고 시민사회 일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민적 합리성을 형성시킬 수 있도록 제반 시민단체의 활동 속에 실제로 시민들이 적극 참여할 수 있게끔 해야한다. 셋째, 제반 사회적 해결책의 미흡으로 인해 가장 고통을 받고 있는 민중들의 대사회적 발언을 조직화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이 기업별 노조(이것 역시 임금상승 등을 통한 개별 가족의 경제적 이익증진을 주내용으로 하는 일종의 가족주의적 기제이다!) 체제에서 벗어나 산별노조를 건설하면서 사회적 의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넷째, 이런 사회적 해결책들이 실제의 정책으로 관철되기 위해서는 민중들을 정치적으로 대변하는 진보정당이 현실적인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힘있는 진보정당이 존재할 때만이 가족을 넘어선 문제해결의 경험을 실제로 보여줄 수 있다.

  네 가지 중 어느 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서로가 다른 분야의 성장을 도와준다는 차원에서 내면적으로 상호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에 먼저 힘을 집중한 다음 순차적으로 나머지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사고할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네 가지 모두가 같이 진행되면서 구체적인 성과들을 만들어 나갈 때만이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 신화는 조금씩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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