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이를테면, 서준식씨의 두가지 행동(이 신문 칼럼을 통해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공식화하고, 국가인권위원회 구성 과정에 항의 인권운동사랑방 대표직을 사퇴한)은 그 변화의 전조다. 그것은 한국의 한 견결한 사회주의자가 이제 뒤섞임 없이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선언이자, 청산과 자기모독이라는 오욕의 90년대에 던지는 고별사다.

한국의 80년대는 특별했다. 세계역사를 통틀어 그렇게 많은 인탤리 진보주의자들이 출현한 일이 있었던가. 80년 5월 광주의 깨달음 덕에, 70년대식 반독재운동은 급격히 진보적 변혁운동으로 전화했고 그 거대한 파도는 10여년 동안 한국의 인탤리들을 완전히 휘감았다. 거리에서 공장에서 세상을 갈아엎는 일에 투신하겠노라 그들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90년대에, 그들은 일제히 청산했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한국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이게 뭐더라)의 진전이 그 이유라 했다. 그러나 좀더 정확한 이유는 그들이 가졌던 진보에 대한 유례없는 열정이란 대개 그들의 적의 포악함에 기대어 유지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들의 애초 목표가 고작 그만큼의 세상은 아니었을테니 말이다.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청산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처음에 미안해 했다. 그러나 시간이 좀더 지나자 그 미안함은 기꺼이 생략되었다. 청산한 사람들은 이제 여전히 남아 암중모색하는 사람들을 “낡고 어리석은 놈들”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청산한 사람들에게, 80년대는 90년대의 원활한 처세를 위해 사용되는 `훈장’으로, 지독한 자기모독으로 남았다.

80년대의 `유례없는 열정’과 90년대의 `어이없는 청산’의 극단적인 대비는 한국인들에게, 특히 다음 세대 청년들에게 진보적 신념 자체를 회의하게 만들었다. 진보의 우물이라던 대학에서부터 진보는 메말라갔다. 그런 와중에, 80년대의 변혁운동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주장되는 `새로운 운동’이 제출되었다. `옳은 것’이 아닌 `가능한 것’을 좇는다는 그 운동은 90년대 중후반 한국의 사회운동을 거의 전적으로 대표했다. 오늘, 그런 운동을 대표할 만한 단체 건물 밖 대형걸개엔 이렇게 적혀 있다. “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꿉니다.”

그것은 분명 심각하게 과장된 것이고, 그런 운동이 `변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새로운 방식이 아니라 `변혁운동의 정신을 청산’하는 새로운 방식임을 보여준다. 생각해 보라. `이미 시민인 사람’이 무엇 때문에 세상을 바꾼단 말인가. 그들은 단지 좀더 편리한 세상을 바랄 뿐이다. 그들의 주식이 제값을 받기를, 그들의 핸드폰사용료가 좀더 적절하기를 말이다. 세상은 세상을 바꿀 이유가 있는 사람들, 제 정직한 노동으로 세상을 움직이면서도 여전히 억압과 경멸에 처한 사람들, 세상이 달라졌다는 주장을 도무지 실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꾼다.

청산 이후, 10년이 지났다. 그 10년은 그 10년의 시간 속에 끼어 산 우리에게 언제나 `최종적인 결과’처럼 느껴졌지만, 역사 속에서 10년은 매우 짧다. 그 10년 동안 우리는 `좀더 선량한’ 보수 정치와 `좀더 악랄한’ 보수정치의 차이란 참으로 보잘 것 없음을 체험했고, `국가 차원의 협조’란 단지 한 줌의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꼭두각시 놀음임을 깨달았다. 이제 우리에겐 좀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고, 이미 그런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추신 : 역사가 보여주듯, 세상은 `꿈을 꾸는 사람들’에 의해 바뀐다. 그러나 그 꿈은 `실현가능한 선으로 조정된 꿈’이 아니라 `불가능한 꿈’이다. 모든 크고 작은 역사적 성취들은 그것이 성취되기 직전까진 언제나 `불가능한 꿈’이다. 인류는 한치도 쉬지 않고 그 사회체제를 발전시켜왔다. 자본주의 역시 결국 더 나은 체제로 극복될 것이다. 믿겨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잠시 눈을 감고 중세의 암흑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자, 근대사회가 올 거라 믿겨지는가?

김규항/출판인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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