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줌마>를 싫어하는 두세 가지 이유

김영하의 이창

화제의 드라마 <아줌마>가 끝났다. 나는 만세를 불렀다, 라고 쓰고 싶지만 그건 너무 속보이고 그저 <아줌마>가 끝났다, 라고만 적는다. 나는 드라마 <아줌마>가 싫었다. 왜냐하면 나는 먹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나는 먹물이다. 그리고 나는 먹물인 내가 좋다. 나는 지식인으로 교육받았으며 지식인으로서 생각하고 지식인으로서 산다. 또한 나는 지식인으로서 드라마를 본다. 침대에 누워 발가락을 까닥거리며 월화드라마를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든다. 그때에도 나는 역시 먹물이다. 왜 <아줌마>가 싫다는 거지? 너 장진구지? 그렇다. 나는 장진구다. 손에 흙이나 기름을 묻혀본 일 없으며 오로지 이 주둥이로만 먹고 사는 존재다. 입만 열면 이 땅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문제점에 대해 떠들기 좋아하지만 투표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투표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한 시간은 떠들 수 있다. 영화 <트래픽>을 보고 나오면서, 환각은 자유 아니냐, 도대체 국가가 개인의 환상에 대해 개입할 권리가 있느냐며 열변을 토할 수는 있으나 스스로는 마약을 결코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게 먹물이다. 해본 적이 없는 일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자, 그들이 먹물이다. 군대에 갔다오지 않고도 징병제와 모병제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떠들고 국가가 과연 폭력을 독점하는 것이 옳으냐를 가지고 논쟁할 수 있는 자다. 먹물들은 태생적으로 경험주의를 싫어한다. 한마디로 먹물들은 꼴보기 싫은 자들이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을 것이다. 노동은 하지 않고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소설이니 철학이니 하는 책들을 들여다보며 젊은 날을 허송하고는 국가와 사회를 향해 왜 우리 같은 고급두뇌들을 썩히느냐며 항의한다. 가족과 아내 앞에서도 결코 기죽지 않는다. 아직 우리나라는 여건이 성숙하지 않아서, 혹은 인문학의 깊이가 천박해서 그렇다며 조금만 참고 기다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줌마>는 그런 먹물들에 대한 태클이었다. 오삼숙으로 대표되는 이 땅의 상식들은 장진구의 장광설을 한마디로 일축한다. 이름하여 ‘놀고 있네’ 주먹이다. 그 어떤 논리도, 그 어떤 요설도 한방에 작살난다. 목숨이 아깝거든 모두모두 비켜라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나는 오삼숙이 싫고 오삼숙의 그 ‘놀고 있네’가 싫다. 왜냐하면 나를 비롯한 먹물들은 정말로 ‘놀고 있’기 때문이다. 먹물은 노는 사람이며 사회의 잉여이다. 문학도 철학도 영화도 미술도 모두 삶의 잉여다. 그러므로 작가도 영화감독도 철학자도 모두 한때는 장진구였다. 한권의 소설이, 한편의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이들은 갖은 요설을 동원하여 주변의 오삼숙들에게 곧 다가올 장밋빛 미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의 숭고함을 각인시켜야 한다. 생각해보면 소크라테스만한 장진구가 또 어디 있는가. 공자도, 유비도, 그리고 예수도 알고 보면 한때 모두 장진구였다. 예나 지금이나 오삼숙으로 대표되는 상식들은 이런 먹물들을 싫어한다. 좋다. 얼마든지 미워하라. 어차피 우리 먹물들은 사회에 기생하도록 진화해왔으니 이런 상황이 별로 새롭지 않다. 그렇지만 (먹물답게) 한마디는 하고 가자. <아줌마>는 분명 문제 있다. 우리를 씹고 싶거든 좀더 정교하고 세련되시라. 세상에 장진구 같은 먹물은 없다. 있다면 머릿속에나 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교활한’ 먹물들이 드라마를 보며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장진구를 이렇게 부른다. 저런 바보 같은 놈! 뿐만 아니라 오삼숙과 그의 일당들 같은 순결한 민중도 없다. 죄짓지 아니하며 언행이 일치하며 언제나 서로를 위하며 결코 배신하지 않는 그들. 설마. 이것이 1930년대 소비에트의 사회주의 선동극이 아닌 바에야 이런 고결한 인물들이 어찌 한 뭉텅이로 모여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고종석은 드라마 <아줌마>가 입센의 <인형의 집>에 필적할 작품이며,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새로운 기원이랄 만하다고 찬사를 보냈지만 그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 아니었을까. 고종석은 보수적 논객들이 가정과 결혼의 파탄을 부추기는 선동물로 <아줌마>를 비난하고 있다고 보았지만 그것은 우리 먹물들의 오버일 뿐이다. 이혼을 통해 과거의 구질구질한 삶과 결별하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 행복해진다는 단순한 드라마가 (우매한) 대중을 선동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먹물들 특유의 착각이다. 대중은 최소한 먹물들보다는 영악하다. 어쩌면 <아줌마>에 오래도록 찬사를 퍼붓는 자들은 오히려 먹물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아줌마>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 이 드라마는, 너무나 건전하고 너무도 올바르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김영하/ 소설가 youngha@writem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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