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말이지만 문득 이 사회의 먹물들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의 과도한 언어체계를 갖기를 열망하는 것 같다.(반대로 말하면 이 사회가 많이 부족한 것이 되겠지만.) 때로는 수많은 이론적 용어들로 가득찬 글들을 볼 때 이것들이 생활언어로 번역 가능한 차원의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만약 생활언어로 번역 가능한 것이 되었다면 이 사회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관조하는 자세가 매우 중요한 덕목이라고 믿는다. (내가 속해 있고 부대끼고 있는 사태에 대한 인간의 어떤 정신병적인 자기분열과 탈출의 욕구이기도 하고 일종의 소격효과처럼 주관성으로의 몰입을 끊임없이 방해함으로써 그 사태의 객관적 본질을 바라보도록 자극하는 것으로서 관조는 필요하다.) 그러나 때로, (나를 포함한) 많은 먹물들이 행하고 있다고 믿는 관조가 실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아무것도 자신의 관점으로 취하지 않은 자신의 비겁함에 어떻게든 핑계를 대 보려고 하는 애처로운 노력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칸트나 니체, 맑스, 헤겔, 하버마스, 기든스, 리프킨, 라깡, 뭐가 어찌 됐든 이들에 대한 지식 목록들 사이로 이리저리 미끄러지면서 행하는 적당한 푸념의 종착지는 결국 현실 속에서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거부가 그리 많지 않다는 씁쓸한 패배감 같은 것이 아닐까.
나조차도 누군가가 방대한 지식 목록으로 들이대면 일종의 자괴감을 느낀다. 그보다 더 방대한 지식 창고를 소유하지 못했다는 데서 움츠려 든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방대한 지식창고보다 그만의 전시관, 갤러리, 상영실이 더 중요하다는. 어떻게든 당파성은 불가피하다. 모든 인간의 것에 회의적이고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이에게조차 인간의 현실 속에서는 어떤 입장을 취하기를 강요받는 것이다. (지젝도 대통령 선거에 나가지 않는가.) 그 순간 자신의 행위를 보여주는 것, 자신의 입장을 제시하는 것, 자신의 창고에서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해 제시해야 한다는 것, 결국 자신이 어떤 삶의 방식을 결정해 구성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명령과도 같은 것이다. 끊임없이 미끄러지기, 그러면서도 멈춰 서는 지점을 정확히 알기. 그것을 잘 해 가는 것이야말로 이 땅의 먹물들에게 필요한 미적인 삶의 방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미적인 자세”에 대한 한 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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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열망이 허영심인가 지적인가라는 물음은 열등감을 불러오곤 합니다.
말하는 의미는 대명사일 뿐이라는 것.
진지한 자세는 수많은 대명사를 알게 모르게 관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