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음악극’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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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연출가 문호근(전 예술의전당 예술감독)씨가 17일 새벽 2시쯤 서울 강북구 수유6동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55.
빈소는 서울대병원 영안실이며 발인은 19일 오전 10시다.
고 문익환 목사의 장남인 문씨는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1971년부터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하면서 국내 오페라 선진화와 `한국적
음악극 만들기’에 크게 기여했다. 89년부터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을 연출하는 등 문화예술을 통한 인권, 민주화 운동에도 힘써 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은숙(세종대 음대 교수)씨와 아들 용민, 영화배우인 동생 성근씨가 있다.
우리시대 사람들 그린 ‘한국적 음악극’ 선구자
17일 문호근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는 듯 “그게 정말이냐”는 질문만 되풀이했다.
71년부터 오페라 연출가로 활동했으니 그동안 오페라와 민족극, 연극 등에서 그가 이룬 일이 허다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에게 기댈 것이
많았던지 그의 죽음은 지극히 당황스런 일로 받아들여진다. 실제 그는 공연계에서 `한국적 음악극 만들기’의 선구자이자 국내에선 최고의 오페라
연출가로 꼽혀왔다. 음악팬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그는 작고한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자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등 민주화와 통일, 인권을
위한 공연 연출자로 잘 알려졌다.
그는 31살에 국립오페라단의 연출을 맡기 시작했고 33살에는 독일 뮌헨대학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돌아와 로
국립극장 최다 관객동원, 국립극단 최초의 연장공연 기록 등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대중’을 위해 `우리 감각’으로 서양 오페라를 만들겠다는 그의 생각은 이탈리아 성악가, 연출가, 지휘자에 무대세트와 의상까지
이탈리아에서 들여와 펼치는 당시 우리 오페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지난 86년 자신의 집 지하실에 `한국음악극연구소’를 차리고
젊은 성악인들을 모아 우리 시대를 가장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한국적 음악극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연가>였다. 연장공연까지 합해 100회 넘는 공연을 할 만큼 공연은 대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이는 한겨레신문사와 함께 제작한 민족가극
(1994) (1995)으로 이어졌다.
오페라에서는 윤이상씨의 (1999), 베를리오즈의 를 국내 초연하고
등 30여 편이 넘는 작품을 연출했다. 특히 서울 예술의전당
예술감독(1998~2001)으로 일하면서 국내 처음으로 오페라 페스티벌을 기획해 오페라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일의 성과가 좋지 않아 안달할 때면 아버님께서는 `이놈아, 사람은 관뚜껑에 못질할 때 알아보는거야’라고 말씀하셨다”며 평소 푸근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의 죽음 앞에서 문화계는 지금 깊은 충격과 슬픔에 빠져있다. 신복례 기자
href=”mailto:borae@hani.co.kr”>borae@hani.co.kr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