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잡아가라며 자진해서 경찰차에 올라타는 ‘시민불복종 운동’의 촛불문화제 참여자들의 얼굴에서 19세기 미국의 한 시민,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얼굴을 본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그는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표어를 진심으로 찬성하던 사람이었다. 정부란 기껏해야 하나의 편의기관임을 역설한, 진정한 근본주의 정치학자이자 행동주의자였다. 수많은 정치학자들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지만, 소로우처럼 민주주의와 국가에 대해 간명하게 통찰력을 보여준 사람은 흔치 않았다. 그는 말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정부는 피통치자의 허락과 동의를 받아야 한다. 정부는 내가 허용해 준 부분 이외에는 나의 신체나 재산에 대해서 순수한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입헌군주제에서 민주주의로 진보해 온 것은 개인에 대한 진정한 존중을 향해 온 진보이다. 중국의 철인조차도 개인을 제국의 근본으로 볼 만큼 현명했다.
소로우는 6년 동안 인두세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어 1846년 7월 하루 동안 감옥에 갇혔다. “두께가 60~90센티미터쯤 되는 단단한 돌벽과, 30센티미터 두께의 나무와 쇠로 된 문과, 햇빛이 스며 들어오는 쇠창살을 바라보며” 그는 인간을 단지 살과 뼈로 된 존재로만 여겨 잡아 가두는 감옥이라는 제도와 국가, 정부에 대해 근본의 성찰을 하면서 시민불복종 사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노예제도를 운영하고 멕시코와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키는 미합중국 정부를 소로우는 도저히 정부로서 지지할 수 없었다. 소로우의 생각으로는 그런 정부에 대해서 시민들이 비폭력 불복종운동을 통해 저항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이며, 시민 불복종의 권리는 정부 위에 존재하는, 너무나 당연한 천부의 권리였다.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고 그 법을 어길 것인가? 나는 조용히, 내 고유의 방식으로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는 바이다.
자신의 감옥 체험과 시민불복종 사상에 대해 소로우는 2년 뒤인 1848년 콩코드 문화회관에서 대중들에게 강연했다. 그리고 이듬해 이 강연을 정리해서 한 잡지에 「시민정부에 대한 저항」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고, 이 글이 바로 소로우 사후에 『시민의 불복종』이라는 소책자로 출판되었다.
오만한 제국주의 강대국처럼 자국의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강요하는 미국이 지금으로부터 240여년 전에는 제국주의의 식민지로서 대영제국으로부터 수많은 수탈과 억압의 강요를 받는 처지였다는 사실은 역사의 역설이다.
미합중국이라는 국가의 탄생은 식민모국인 대영제국의 막강한 군사력에 맞서 식민지 주민이었던 미국 시민들 스스로 자신의 권리와 자유, 자신의 삶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피를 흘린 댓가였다. 미국 민주주의는 대영제국으로부터 그저 공짜로 얻은 시혜품이 결코 아니었다.
1760년대부터 보스톤을 중심으로 매사추세츠 주민들은 대영제국의 각종 세금과 수탈에 대항해서 수많은 저항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시위와 집회는 늘상 일어나는 일이었다. 청원운동에서부터 영국 상품 불매운동과 급기야는 폭동과 무장투쟁까지 수많은 크고 작은 충돌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보스턴 대학살 사건과 독립전쟁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보스턴의 시민들은 북아메리카 영국군과 영국 총독의 지배를 물리치고 매사추세츠 주 전 지역의 모든 정치 군사조직을 장악하고 사실상의 자치를 행하고 있었다.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된 대영제국의 인지세 부과는 이런 식민지 반제국주의 투쟁에 들이부은 휘발유였을 따름이다.
이런 역사와 배경 아래 미 합중국을 건설했기 때문에 당시 미국의 시민들은 정부란 결코 억압과 착취 기구여서는 안되며 시민들 스스로가 선택하는 하나의 기구일 뿐이라는 뿌리깊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1776년 1월 지금도 유명한 토마스 페인의 『상식』은 이런 사상의 상징이었다. 페인의 이 소책자는 3개월만에 무려 15만부나 팔려 나갔다. 토마스 페인이 전하는 바 국가와 정부에 대한 식민지 아메리카 주민들의 생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렇다.
사회는 어떤 상태에서도 하나의 축복이지만, 정부는 최선의 상태에서도 하나의 필요악에 불과하다.
이런 사상의 결정체가 다름아닌 미합중국 독립선언서의 전문이다. 지금도 민주주의를 얘기할 때 금과옥조처럼 인용되는 전문의 두 번째 구절을 다시 읽어보자.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한다.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개혁하거나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다.
그렇다. 새로운 정부 조직의 권한은 늘 시민, 인민, 대중들의 손에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정부란 왕권과 달리 시민들이 선택하는 것이다. 국가의 강요를 시민은 거부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다. 선거를 통하건 추대를 통하건 그 어떤 방식이든 주권은 시민들에게 있다는 주권재민 사상의 핵심은 시민불복종의 권리, 저항과 혁명의 권리이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자 진리이다.
국가 이전에 인간이, 시민이, 사회가 있다. 국가의 역사는 잘해야 5천년이지만 사람과 사회의 역사는 수백만 년이나 된다.
미국은 식민지 해방투쟁을 통해 인민의 정부를 만들었고 민주주의를 진일보시켰던 과거 자신의 국가 탄생 역사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남은 것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략한, 20세기 내내 어느 한 해도 전쟁을 멈추지 않았던 추악한 제국뿐이다. 오늘날 한국에 강요하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은 그 옛날 대영제국이 식민지 아메리카에 강요했던 인지세이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명박 정부가 앞장서서 식민모국과도 같은 미국에 엎드려 굴복하고 엎드려 양보하고 엎드려 한미 FTA를 서둘러 애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해달라고 청원하지 않는 것이 신통할 따름이다.
노동자와 서민 생활에 대한 동질감의 정서와 배려는 처음부터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논외로 치자. 그러나 민주주의와 사회에 대한 이해, 역사에 대한 이해, 정부와 국가의 성격과 할 일에 대한 이해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기업체 사장 출신 대통령을 우리는 지금 처절하게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기업 경영하듯이 정부를 운영하면 어떻게 되는지, 비즈니스 후렌드리 국가란 어떤 것인지, 그같은 기업 경영 방식의 정치와 통치를 우리는 지금 정확히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역시 재벌 기업 총수인 정몽구 의원과 대기업 씨이오 출신인 문국현 의원의 어지러운 정치 행보도 양념으로 곁들여 지면서 말이다.
미합중국의 독립 역사와 민주주의 역사로부터 우리가 배울 점은 너무나 많다. 그 가운데서도 정부로부터 지역의 독립과 자치, 개인과 사회의 독립과 자치는 핵심이다. 한국은 국가 탄생의 역사가 60년 밖에 안된다. 그나마 그 역사도 전쟁과 강력한 중앙집권의 독재로 점철되어 지역자치와 자립, 지역 독립의 민주주의 전통은 아직 생겨나지도 않은 우리에게는 정부와 국가로부터의 독립이란 개념 자체가 불온하고 낯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가치야말로 우리가 실천에 옮겨야 할 민주주의의 첫단추이다.
소로우는 이런 민주주의의 핵심이 촛불 문화제이며 나도 잡아가d는 스스로의 시민불복종 권리라고 힘껏 외치고 있다. 이런 정부 위에 있는, 정부를 선택하고 정부를 바꿀 수 있는 천부의 시민권 사상은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으로 이어진다. 간디는 소로우에게서 깊은 영감을 얻었으며 나아가 민주주의는 마을 자치(스와라지)라는 토대가 형성되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간디의 사티야그라하(진리파악)란 바로 촛불문화제의 비폭력 평화행진, 시민불복종에 다름 아니다.
이명박 아웃(OUT)을 외치는 시민들의 구호는 선동정치인(僭主)을 시민들의 비밀투표로 추방하는 그리스의 도편(陶片)추방(오스트라키스모스), 엽편추방제를 연상시킨다. 동양의 전통에서도 이런 시민 불복종 사상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맹자를 비롯해서 천명을 거스르고 민의를 등진 군주는 추방해야 한다는 민본주의 혁명론은 그 한 예이다.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대한 촛불문화제는 어쩌면 다가올 더 큰 지진의 전주곡일지도 모른다. 한미 FTA도, 에너지와 식량위기라는 쓰나미도 머지 않아 우리 눈 앞에 엄청난 충격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이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사회, 어떤 정부를 만들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촛불을 들어야 하는가.
이 지점에서 소로우는 우리에게 참으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소로우는 “소나무의 가장 가까이에 서 있다고, 자연에서 소나무의 가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벌목꾼일까?”라고 질문하는 현자였다. 그는 『월든』을 통해 자연에 속한 인간의 한계와 인간의 야만을 고발한, 미국이 낳은 위대한 생태주의 사상가였다.
한미FTA는 우리 경제를 살리고 경제성장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광우병 쇠고기 정부의 강변에 대해 절반에 가까운 시민들이 동조하고 있다. 아마도 촛불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 가운데에도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대량생산 대량소비는 더 이상 지속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석유가, 곡물가, 모든 천연자원 가격의 급등을 통해 금방 알 수 있음에도 여전히 성장과 소비 중독의 물신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이제 그런 시장만능주의, 경제 물신주의는 종말을 고할 날이 다가왔다. 대운하가 살 길이라는 경제성장 지상주의는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하다. 저가 비행기 동남아 관광을 가서 온갖 추악한 짓거리를 저지르고 돌아오는 어글리 코리안들의 행태도 조만간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공장식 축산도 더 이상 불가능하다.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뿐만 아니라 육식 위주의 음식문화 자체에 대해 촛불을 들이대야만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광우병 쇠고기는 어쩌면 우리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기회를 제공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의 경제지상주의에 대해, 우리 스스로 기업의 노예가 되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거꾸로 된 삶의 방식에 대해, 촛불을 조용히 켜고 성찰하는 계기 말이다.
오늘 밤 새벽까지 청계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나서 한 번 소로우를 다시 꺼내보자. 그리고 나 자신과 우리 이웃들의 존엄을 지키는 삶이 무엇인지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무정부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과 달리 지금 당장 정부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당장, 보다 나은 정부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유일한 나의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법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매일매일 불의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
만약 불의가 정부라는 기계의 필수불가결한 마찰의 일부분이라면 그냥 내버려 두라, 그냥 내버려 두라… 결국에는 닳아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기라.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기계로서 자신의 육신을 바쳐 국가를 섬기고 있다. 상비군, 예비군, 간수, 경찰관, 민병대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판단력이나 도덕 감각을 자율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나무나 흙이나 돌과 같은 위치에 놓아버린다. 그래서 나무로 사람을 깎아 만들더라도 그들이 하는 일을 해내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참다운 의미의 영웅, 애국자, 순교자, 개혁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그들의 양심을 가지고 이바지한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국가에 저항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따라서 국가로부터 흔히 적으로 취급을 받는다.
모든 사람이 혁명의 권리를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정부의 폭정이나 무능이 너무나 커서 참을 수 없을 때에는 정부에 충성을 거부하고 정부에 저항하는 권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