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서사극적 형식’이라는 수식어를 이 연극에 붙였을까? 나는 ‘시골선비 조남명’을 보면서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연극에 대해 전문가적 식견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예술은 어디까지나 작가와 작품, 그리고 수용자의 소통 형식이라는 일반적인 측면에서 볼 때 나의 질문도 그 소통의 결과물 중 하나일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닷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연극이 서사극적 형식을 정말 차용한 것이 맞는지,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 연극을 위해 타당한 것인지를 나에게 질문해 보면서 그렇지 않다라는 대답을 스스로 끌어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기본적으로 이 연극은 유물론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서사극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 또는 그 형식과 내용 자체가 유물론적이다라고 믿는다. 유물론은 그 어떠한 관념론도 배격하고 오로지 우리가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직접 체험하고 있는 객관적인 실재로 모든 시작을 되돌린다. 그렇기 때문에 유물론은 우리의 사고가 출현하게 된 진원지를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지배하고 있는 모든 이데올로기라는 장막을 걷어냄으로써 실재를 열어 보이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물론은 이데올로기이기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흔히 말하는 맑스주의적 테마가 아니라도 좋다. 공정한 계약관계나 능력의 부족 등으로 무마하고 있는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말하지 않아도 된다. – 예술작품이 이것을 말하는 것은 얼마나 재미없는 일일까. 이미 온갖 이론서적이 충분히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 다만 예술작품이 유물론적이기 위해서는 작품을 관통하는 작가의 이데올로기적 의지를 걷어내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조건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물질적 실체성을 지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의지가 만들어내는 중력의 장으로 작품이 집중되어 있지만 않다면 우리는 실체성 자체로부터 그 작품만의 실재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라는 가상적 세계 안에서의 실재만 말한다면 말이다. –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작품의 가상적 세계가 현실 세계와의 밀접한 관련 하에 놓여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작품은 이 최소한의 조건도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유물론적이라고 허세를 떠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일관된 이데올로기를 그 중심에 놓고 진행된다. 세계의 중심에다 지식인을 두고서는 조식이 생존하던 당대를 빌어 현실을 말하려 한다. 전통문화 이데올로기에다 양반계급의 우수성까지 가미하여 자화자찬의 잔치를 벌인다. 이 철저하게 작가의 이데올로기적 의지가 중심이 된 연극이 서사극을 말하려 하는 것은 왠지 서글프기까지 하다.
연극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중심 없는 사건들의 나열만으로 서사극적일 수 있을까? 또 장면의 전환은 막을 내리지도 않고 진행되고 막간은 온갖 노래와 춤으로 메꾸어져 있다. 이 열려 있고 흐름을 끊는 장치들만으로 서사극적일 수 있을까? 그리고 배우들은 상황 속에 묶여있지 않고 때로는 바깥에서 상황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이 황당하리만치 탈상황적인 연기만으로 서사극적일 수 있을까? 나는 이 모든 물음에 대해 부정적이다. 나는 지금 브레히트의 연극과 비교하여 이 연극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연극의 내용이 담긴 형식이라는 그릇의 진정성을 살피고 싶은 것이다. 위에서 말한 연출과 연기의 형식적 요소들 속에서 나는 조식의 당대 사회 현실을 파악할 수가 없다. 유물론적 형식에서 인식은 발을 땅에 딛고 선 내용과의 만남에서 가능하지만 이 연극의 형식들은 딛고 서야 할 땅이 없다. 당대 현실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오로지 지식인인 양반 계급의 기회주의적 몸사림 속에 부패한 정치 구조 뿐이다. 당대와 현재를 비판하기 위해 기대는 곳은 지식인의 의무라는 머리 속 가상의 중심일 따름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탈중심화된 형식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
중심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만 만들어진다. 중심이 없는 것은 오로지 실재 세계의 사물들 그 자체의 모습 뿐이다. 세계의 사물들이 이루는 무질서의 나열들 속에서 우리는 나름의 질서를 임의로 지워줄 뿐이어서, 예술의 탈중심적 형식들은 오로지 그렇게 무질서 속에서 이루어진 작품의 물질적 현실성으로 나름의 객관적 인식을 생산해내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거꾸로 간다. 작가의 인식틀이 전제되어 있고 그것을 우리가 알아주기를 바란다. 작가의 의지는 이미 작품의 중심을 구축해 놓았는데도 작품의 형식은 애써 중심을 이탈해 가려 노력하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원심력과 중(심)력은 상쇄되어 균형을 만들어내지만 예술의 내용과 형식의 경우에는 어긋난 힘이 혼란만 거듭한다. 그래서 내용과 형식은 부조화를 이룬다. 부조화 속에 언뜻 비치는 조율의 노력이 형식적 측면에서 발견되는데, 예컨대 무대 전환을 하는 도중에는 조명을 끄거나 노래와 춤으로 그 과정을 결합시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든지, 조식이 조정의 부패 상황을 지켜보더라도 조명은 조정에 집중되어 있다든지 하는 것이다. 더하여 나는 배우들의 연기도 사실주의적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배우가 연기하는 무대 위의 공간은 관객들이 참여를 하는 광장이 아니라 – 서사극에서 제4의 벽이란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질료로 삼아 관객이 지적 인식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삼투막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 이미 주어진 것들(인물과 사건, 그 안에 담긴 질문과 대답 등)을 제공받는 교단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작가는 굳이 채택한 서사극적 형식이 자신이 담을 내용의 중심력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막연히나마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작품에 대한 나의 비판적 태도의 근원이 작품을 형성하는 동기로서의 작가의 의지가 내용과 형식을 구조화하는 우연의 영역에서 그리 현명지 못한 선택을 한 데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결국 작가의 선택, 또는 연출의 방향은 이데올로기적 자기 확인을 서사극이라는 유물론적 실재 인식의 형식적 요소로 채우려 한 데에서 이 작품의 불행은 시작된 것이리라. 언젠가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공감을 표시한 아도르노의 말이 생각난다. ‘예술은 간접적이다.’예술은 간접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 작가/연출가나 배우 또는 관객의 – 이데올로기를 투사하여 작품이 그 이데올로기에 대한 직접적인 화답이게끔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말하려 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방식이 되어야 한다. 예술은 작가나 관객의 이데올로기로 묶여버릴 수 없는 존재이므로. 더구나 서사극적 공간은 차라리 온갖 이데올로기들이 충돌하는 공간이자 그것이 (연극적) 현실에 의해 부서지고 그 폐허 위에서 새롭고도 명확한 – 이것을 유물론적 변증법의 과정이라 해두자 – 인식이 구축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오히려 직접적일 만큼 순박한 형식이며(따라서 미적 즐거움은 덜할 것이며) 따라서 이데올로기를 말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더 말하자면 이 연극의 작가와 연출가는 동일인물이며 배우와 작가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 공동생활을 해나가는 상황이니 연극을 창출하는 거의 모든 구성요소들은 어떠한 변증법적 충돌을 일으킬 일도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들의 강한 일체감이 연극을 만드는 힘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어쩔 수 없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중심을 동력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아무런 충돌과 갈등도 필요치 않은 상태, 자기 확인의 확고함에 기반한 연극이 간접성을, 더 나아가 그 안에 진정성을 담기 위해 서사극이라는 유물론적 형식을 선택한 것은 가련한 한 청년이 달콤한 단어에 우회적인 표현의 연가가 아니라 무뚝뚝한 말투의 직설화법으로 여인에게 보내어 진심을 거부당하는 것과 같은 실수임에 틀림없다.
반면에 이후에 본 연극, ‘슬픔의 노래’는 충실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극중 현실은 가상의 세계에만 충실히 머물러 있고 그 안에서 광주 항쟁과 그 상처에 대한 작가의 의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 작품은 세 인물을 둘러싼 사건들이 광주 항쟁이라는 하나의 사건 – 그러나 보여지지 않은 사건 – 에 의해 유지되고 진행되면서 오로지 우리의 의식을 그 하나의 중심 안에 놓이게 한다. 시종일관 관객들은 숨소리조차 내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극중 가상의 권위를 체감하며 작품에 몰입하고, 이로부터 우리는 생산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의식 전반의 전수라는 것을 경험한다. 내 생각에 사실주의 연극의 힘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사실주의 연극은 작품 내에 스며든 이데올로기적 중심을 간접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해 주는 힘이 있다. 관객은 그 작품의 가상을 무리없이 그 안에서 이해하고 또한 그래야만 감상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만일 ‘시골선비 조남명’이 예술로서의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실주의 연극에 더 가까웠어야 했다.
이 글 처음에 제기한 나의 의문은 이 정도로 충분히 논의가 된 것 같다. 나는 여기서 한가지 질문을 더해야만 한다. 그것은 이 연극이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 자체를 의문에 부치는 것이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실천하는 지식인의 부재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 연극에 배태된 주된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이다. 이 문장에서 ‘실천’은 ‘지식인’의 수식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연극은 실천을 말하기보다는 지식인을 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조식의 실천적 면모를 말하려 한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중요한 것은 지식인이라는 실천의 주체이다. ‘배운 자들이 사라졌으니 세상의 중심을 잃었다’나 ‘글을 가르치지 마시오’ 등의 대사들은 그것을 웅변한다. 작가이자 연출가 이윤택씨가 전통문화를, 그 중에서도 양반 문화의 격조높은 인식 수준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 말은 정확한 근거이다. 높은 지적 수준에 대한 작가의 향수병은 지식과 권력의 가까운 거리만큼이나 강하다. 때문에 조식이 세상에 대해 상소를 쓰는 것은 오로지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되며 세상의 중심에다 배운 자들의 높은 지적 수준을 둔다. 그들의 인식 수준이 세상에 중심을 정해주더라도 결국 세상의 만물은 어지럽게 흩어져 있을 뿐인데도 말이다. 더 문제시되는 것은 당시의 지식인은 지배계급이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에 대해 쓰는 상소는 피지배 계급의 해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지배 계급 내에서의 권력 분배 문제에 대한 상소일 뿐이다. 지식인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은 사실 배운 자 본연의 의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에 가까우며 그들에 대한 중요시는 자기확인 또는 자위의 폐쇄적 체계 안에서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은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지식인의 실천이 아니라 인간 일반의 실천을 통한 변혁이며 세상의 중심은 지식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전체 그 자체일 뿐이다. 전통문화를 강조하는 데 대한 논의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자기확인을 경험하는 바, 이데올로기는 폐쇄회로 안에서 응답이 필요없이 이루어지는 자기확인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 때문에 우리는 그 폐쇄회로 바깥으로 나가 때로는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특히 예술에서는. – 나는 이 작품의 폐쇄회로 안에 참여할 의사가 없으며 차라리 자위를 포기하고 자책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논의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말하여지는 방식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미적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미적 영역이 아니라고 엄밀히 배제할 일은 아니다. 미학과 철학, 과학 등의 영역은 명확한 경계선을 지니지 않았을뿐더러 미적 즐거움도 신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이 작품에 대한 판단에 있어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식도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로서의 이같은 이데올로기가 서사극의 예술적 형식을 상당히 거스르고 있다는 점에서 미적 불균형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예술을 즐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술로 살아가는 것이 문제일 때 더욱 그러하다. 예술을 즐긴다면 이데올로기에 동의하지 않고서도 작품의 요소들을 반길 수 있겠지만 예술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작품의 이데올로기는 내 삶의 존재론적 질문과 반드시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