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제의(祭儀), 새로 시작하는 자리
– 이영진(46·시인·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시간은 잔인과 위안을 동시에 내재한 것인가. 나는 지난 시대를 기억하고자 할 때마다 영 편치가 않다. 지나간 것을 지나간 것으로 치부하지 못하는 불구의 마음 때문이다. 역사라 이름지어진 순간들은 과연 시간의 저 너머 어딘가에 묻혀 발굴을 기다리는 유물 같은 것일까. 나는 결코 끝나지 않는 ‘역사의 시간’을 단순히 ‘복원’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80년 5월과 87년 6월을 거의 동시적인 순간으로 기억한다. 엄연히 7년이라는 시간적 거리가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전혀 그 거리를 느낄 수 없다. 지긋지긋한 유신이 막 끝나가는 순간 터져나온 피와 학살의 5월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한꺼번에 욕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존재가 지워진 사람들! 죄책감과 굴욕과 부끄러움만 남은 사람들!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의 무리들이 이 땅에 저질러 놓은 죄악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자신의 동족을 살해하고 헌정을 중단시킨 80년 5월 ‘피의 석탄일’은 역사에 대한 폭거였을 뿐만 아니라 삶을 삶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정당한 가치와 그 당위를 빼앗아간 거대한 테러였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의 당위를 한순간에 지워버린 그들의 통치 밑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더러운 목숨 몇 개로 그 죄를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업보를 쌓으면서 그들은 죽은 시신 위에 “제5공화국”을 세웠다.
나는 지금도 이 ‘오공’이라는 말과 ‘민정당’이라는 말 그리고 ‘안기부’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올릴 수 없다. 이 학살자들과 함께 정당을 꾸리고 그들과 야합해 역사를 기만한 언론들과 그들의 하수인이 되어 삶의 정당성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을 고문하고 투옥했던 법조인들과 경찰들 그 하수인들의 야만을 인정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해 벌어진 역사의 오욕과 역류를 나는 오늘의 시간 속에서도 본다. 정말 ‘좋은 게 좋은’ 것이 역사인가. 한 번도 속 시원히 죄는 죄대로 용서는 용서대로 자기 정당성이 완료되는 그런 역사를 우리는 가져볼 수 없는 것일까. 내게 6월은 바로 이렇게 끝나지 않는 역사의 불구로 살아 있다.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동기는 박종철의 억울한 죽음과 4.13 호헌 조치 바로 그것이었다. 80년 5월 이후 ‘지하에 묻힌 자유의 씨앗들이 잠시도 끊이지 않고 지표를 뚫고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의 삶을 정화시켜가는 대장정이 줄기차게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빨갱이로 몰아 구속하고 고문하는 저들의 폭력 속에서도 저항은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진실에 단련되어 갔다. 계속되는 지식인 종교인 학생 노동자들의 저항에 군복을 벗고 정권을 탈취한 쓰레기들은 당황하고 곤혹스러워 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국가보안법과 공권력 남용은 젊은 육신들을 갈갈이 찢어 놓거나 죽음으로 몰아갔다.
박종철의 죽음도 그 연장에 놀이는 사건 중의 하나였다. 수사를 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것이 당시 경찰의 발표였고 신문과 방송이 보도한 내용이었다. 한 국가의 공권력과 언론과 사법부가 개그맨들의 코미디보다 더 우습고 슬픈 희극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다지도 기만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러 놓고서도 이를 왜곡하고 오도하려는 자들에게 국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총칼과 국가보안법과 폭력적인 공권력에 대한 공포보다 아무런 위엄도 정당성도 갖추지 못한 부도덕한 정권에 대한 분노가 더 커지고 있었다.
박종철의 죽음에 대한 대규모 국민 집회가 87년 2월과 3월에 이어졌다. 죽은 시신 위에 세워진 정권이 수구 언론들을 내세워 아무리 국민들을 기만하려 해도 또 하나의 선명한 죽음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정권 말기의 전두환은 위기 의식을 느끼고 보다 강력한 철권 통치를 위해 4.13 호헌 조치를 들고 나왔다. 박정희처럼 영구 집권을 통해 위기를 돌파해 보려는 시도는 바로 벽에 부딪쳤고 국민들의 분노에 불을 당겨 놓는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신부들의 단식과 문인들의 성명서가 발표되었고 이어 교수 해직 언론인 화가 및 각 운동 단체들의 성명이 이어졌다. 당시 문인들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를 중심으로 박종철의 죽음을 둘러싼 진상 규명 투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포 사무실에 검은 천으로 둘러싼 제단을 만들어 놓고 억울한 박종철군의 죽음에 분향하러 오는 문인들을 맞이하고 단식 농성을 주재하는 것이 당시 사무국장인 내 일과였다.
김남일 현준만 이재현 김인숙 공지영씨 등이 함께 고생하던 실무자들이었다. 박종철의 억울한 죽음에 이은 호헌 조치에 반대하는 성명전은 광범위한 국민적 연대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유신 이후 꾸준히 국민들의 도덕적 신뢰와 합의를 얻어왔던 저명한 민주 인사들과 33개가 넘는 각 부문별 단체들이 결합해 느슨하지만 하나의 상설화된 국민적 연대기구를 발족시켰다.
87년 5월 27일 발족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가 그것이었다. 국민들의 광범위한 민주화의 욕구와 이를 수렴할 최소한의 형식이 갖추어진 것이다.
궁극적으로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을 강령으로 채택한 ‘국본’의 주도로 6.10 국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을지로와 종로 명동과 서울역 일대는 거대한 군중의 물결로 바다를 이루었고 이러한 시민들의 적극적인 가두 진출은 6월 항쟁의 역동성을 창출해냈다. 선두에 서서 화염병과 보도 블록을 깨뜨린 돌멩이로 전투 경찰과 백골단들에 맞서 전투를 벌려나가는 어린 대학생들의 투혼은 정말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지랄탄으로 눈을 뜰 수조차 없는 거리에서 젊은 육신과 순결한 영혼을 불사르며 “독재 타도, 호헌 철폐”를 외치던 그들에게 연도의 시민들은 박수를 쳤고 점차 동화되어 갔다. 해방 이래 1백여명이 넘는 문인들이 직접 거리에 나선 것도 이 때가 처음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김규동, 남정현 선생은 물론 송영 조태일 등등 수많은 문인들이 시위대를 구성하거나 시위 군중 속에서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6.10 대회는 6.18 최루탄 추방대회, 6.26 국민 평화 대행진에 이르는 대장정의 시작에 불과했다. 예기치 않는 넥타이 부대들의 합류와 대중들의 가두 진출은 6월 항쟁의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거대한 대중들이 이끌어내는 힘은 단순한 시위 그것일 수만은 없었다.
사람들은 이 시위의 과정을 통해 온몸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왜 역사가 일인칭으로 호명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하나로 부르는 이인칭의 ‘우리’인지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말 거대한 절정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곳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시위 도중에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꽃다운 생명을 잃은 이한열의 죽음은 6월 항쟁을 역사적 절정으로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도화선이었다. 또 하나의 죽음, 이한열의 추모제가 벌어지는 연대 교정은 깊은 슬픔과 분노로 무겁기 짝이 없었다.
청주 교도소에서 출옥한 문익환 목사가 극적으로 단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문 목사는 추모사 대신 이한열을 비롯해 분신과 고문 등으로 산화해 간 이름들을 하나하나 불러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떤 연설보다 강렬한 메시지였다. 문목사는 울면서 그 이름들을 불러댔고, 수만의 군중들은 고개를 떨군 채 소리 없이 오열했다.
그것은 분명히 한 시대의 역사를 구원하는, 거대한 야만을 구원하는 하나의 제의(祭儀)였다. 문목사에 이어 한열이의 어머니가 단상에 부축되어 올라왔다. 자식을 잃은 어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흐느끼기만 했다. 흐느낌은 그대로 사람들의 가슴을 베어내는 칼날이었다.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열어 울부짖었다. “다시는 한열이 같은 죽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녀는 이어 혼잣말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열아 가자! 광주로 가자!” 연대 교정에 모인 수만의 학생들과 대중들은 모두 소리 없이 울고 또 울었다. 흰 무명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이애주의 살풀이는 한없이 서럽고 힘찼다.
신촌 로터리에서 펼쳐진 노제와 대형 꽃상여 행렬을 둘러싼 군중들은 갈수록 불어났다. 신촌에서 시작된 군중의 대열은 시청 앞까지 이어지며 바다를 이루었다. 백만이 넘는 군중들이 꽃상여를 앞세우고 ‘한열이를 살려내라!’고 외치며 행군했다.
그것은 역사적 야만을 향한 행군이었다. 국본 상임집행위원이자 장례위원으로 장례차의 선두를 이끌고 가던 나는 그 군중의 바다 속에서 하나의 풍경을 보았다. 김대중 김영삼 계훈제 고은 문익환 선생 등이 서로 손을 잡고 행진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풍경이 광경이 되는 놀라운 순간” 이었다. 그들도 우리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시에 두고두고 이 광경을 저주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꿈도 꾸지 못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이날의 행로를 배반했다. 그들은 서로 잡은 손을 놓고 학살자들과 타협하거나 이기적인 독자적 길을 갔다. 김영삼 정권의 실패와 김대중 정권의 도덕적 타락은 바로 그들이 놓아버린 이 날의 ‘손’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튼 시청앞 광장에 모여 수백만의 인간이 똑같이 연호 하는 한마디 ‘호헌 철폐! 독재 타도!’는 하나의 거대한 역사의 엑스터시였다. 수백만의 가슴과 머리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체험은 한없이 존엄한 자기 확인으로 이어졌으며 승리 그 자체였다.
나는 이 날 보고 체험했던 역사를 믿는다. 누구도 의도적으로 기획할 수도 왜곡하고 훼손할 수도 없는 역사의 지평을. 한번 차오른 바다는 영원히 제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줄거나 늘지 않는다. 그것이 역사의 진실이며 우리가 언제나 되돌아가 새로 시작해야 되는 자리다. 우리는 확실히 승리했으면서도 그 승리를 담아낼 형식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6월은 아직도 형식을 요구하고 있다. 그 날의 승리는 활동가들만의 것도 기회주의적인 정치인들만의 것도 특정한 이념을 지닌 지식인들만의 것도 아닌, 순결하고 존엄한 가치를 실현한 초월적인 그러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의 진정성” 그것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