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본론을 보충키 위한 곁얘기에서 본론에서 다하지 못한 그 사람의 진심을 볼 수 있다. – 본론은 내용을 진행시키기 위한 그만의 욕망으로 움직이고 있으므로. – 이 글을 다 읽기가 곤란하다면 최소한 두 부분이라도 건져낼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 모두들 영화비평의 위기를 말한다. 지금 다시 떠올려 볼만한 다네의 유명한 제안, 영화에 관한 평이란 완전하게 불필요하다. 대중은 평 없이도 영화를 보고, 극장은 글 없이도 가득 채울수 있다. 말하자면 영화평이란 잉여이다. 그런데 그게 필요하다면 왜 필요한가? 그건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이다. 영화를 본 다음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영화에 관한 평을 읽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경험의 연장이며, 보충이며, 대리이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평은 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겹쳐놓을 수 있어야 한다. 세르주 다네는 영화를 본 다음 정리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핵심은 그 인상을 보존하고, 그것만으로 버티는 것이다.  영화와 세상 사이의 중재. 그냥 영화를 본 다음 인상적으로 떠오른 생각들. 수첩을 가득 채운 두서없는 메모. 이 글은 그렇게 쓰여졌다.”


“나는 영화가 지나치게 자기를 뽐내거나(실험영화들), 반대로 너무 겸손해할 때(미디어로서의 영화들) 흥미를 잃는다. 물론 그걸 더 좋아할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취향을 말하는 중이다. 영화는 세상과의 긴장을 유지할 때, 그래서 그 둘사이의 관계에 내가 개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내 생각이 활동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다. 결국 영화는 어떤 자세로 세상을 보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어떤 자세를 선택할 때 거기서 진실을 볼 수 있느냐는 선택의 내기이다. 영화와 세상 사이를 중재하는 자세와 거리.”

 

정성일의 가을 영화 산책 [1]
2006.10.11 08:00

약간의 사연. 나는 간절하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영화는 내게 연애를 하자고조르고 있었다. 그래서 책상에서 일어나 거리로 나오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너무 오래 책상에 앉아 있었다.텔레비전이 보는 사람을 안방의 정주민으로 만든다면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거리를 쏘다니는 유목민으로 만든다. (들뢰즈가 아니라)레지스 드브레가 한 말이다. 영화를 보러 달려가는 두근거리는 마음 혹은 보고 난 다음 지금 막 보고 나온 영화를 생각하고 또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영화는 오가는 길이라는 사유의 시간 속에 있는 것이다. 나는 대부분 영화를 길에서 깨달았다.나는 교실에서 영화를 배운 적이 없다. 또다시 하염없이 긴 글을 쓸까 지레 겁을 먹은 김혜리 기자는 일단 홍상수의 <해변의여인>을 쓰지 않겠다는 약속에 안심을 했음이 분명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까스로 허락받은 산책. 나는 인터넷을 종료하고영화를 보기 위해 거리로 나갔다.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영화평은 영화 보는 경험의 연장

(그저 떠오르는 대로 열거하는) 산책의 대가들의 명단. 보들레르의 산책. 지가 베르토프의 산책. 모네의산책. 알베르틴의 산책. 다이스케의 산책. 벤야민의 산책. 로셀리니의 산책. 도미오카와 유키코의 산책. 솔레르의 산책. 차이밍량의 산책. 홍상수의 산책. (고작해야) 그들을 흉내내고 있는 나의 산책. 더 솔직히 말하면 영화에 대한 메모만으로 가득찬 산책-글쓰기는 내 오랜 꿈이었다. 나는 이러한 글쓰기를 세르주 다네의 (신문 <리베라시옹>에 1981년 7월18일프리츠 랑으로 시작해서 1986년 1월24일 펠리니의 <진저와 프레드>로 연재를 마친)‘영화-일지’(Cine-Journal)를 읽으면서 배웠다. 물론 나도 안다. 내가 아무리 해봐야 다네만큼 높이 상공 비행한 다음 내려다보지 못한다는 것을. 다네가 보여준 더 많이 보려는 욕망. 그는 어떤 영화는 슬로모션처럼 보아야 하며, 어떤 영화는 디졸브하듯이 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영화를 보는 내가 영화-되기. 지금 모두들 영화비평의 위기를 말한다. 지금 다시 떠올려 볼만한 다네의 유명한 제안, 영화에 관한 평이란 완전하게 불필요하다. 대중은 평 없이도 영화를 보고, 극장은 글 없이도 가득 채울수 있다. 말하자면 영화평이란 잉여이다. 그런데 그게 필요하다면 왜 필요한가? 그건 단 한 가지 목적 때문이다. 영화를 본 다음 생각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영화에 관한 평을 읽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경험의 연장이며, 보충이며, 대리이다. 그러기 위해서 영화평은 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겹쳐놓을 수 있어야 한다. 세르주 다네는 영화를 본 다음 정리하지말라고 충고한다. 핵심은 그 인상을 보존하고, 그것만으로 버티는 것이다. 영화와 세상 사이의 중재. 그냥 영화를 본 다음인상적으로 떠오른 생각들. 수첩을 가득 채운 두서없는 메모. 이 글은 그렇게 쓰여졌다.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척하다가 정말 바람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바람난아저씨가 카바레를 떠돌듯이 영화관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아아, 바람난 영화야, 여기 아저씨가 왔다. (후렴) 지금은가을이니까. 그래서 급기야 마감일에 다시 한번 전화를 하고 말았다. 내 말도 안 되는 푸념을 들은 김혜리 기자는 한주 미루는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한 다음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그런데 몇매를 쓰고 있어요?”라고 물었다. 우물거리면서 대답하자잠시 기다리라고 한 다음 누군가에게 분량을 의논하였다. 그러자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진짜 그것만쓴대?” 그 말이 들리는 수화기를 든 나는 저 멀리 끝나가고 있는 늦여름의 한강을 무심코 보고 있었다. 지난여름에 골뱅이가나타나서 현서를 잡아먹었던 그 한 많은 강. 또 누군가가 뛰어들 강.

 

2006년 여름, 정치적 계절의 도래

<괴물>

물론 <괴물>은 아직도 상영 중이다. 나는 ‘(하지만…)’으로 글을맺었고(<씨네21> 제 565호, ‘노골적이고 단호한 정치적 커밍아웃’), 그리고 허문영이 그 다음을 이어 썼다. 그글은 내가 놓친 부분을 정확하게 찾아서 다시 쓰고 있다(<씨네21> 제566호, ‘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은누구인가’). 하지만 나의 ‘하지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좀더 정확하게 나는 서문을 쓴 것이고, <괴물>은이제부터 더 이야기되어야 한다. <괴물>이 내게 가장 새로운 것은 이야기 구조에 있다. 봉준호는 이야기가 진행되면될수록 점점 인물들을 흩어놓는다. 혹은 일부를 빼낸다. (박희봉) 말하자면 여기에는 고전적인 이야기 구조에 역행하는 배치의분산화가 있다. 아니, 차라리 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면서 편집은 점점 산만해지고 있는데, 그걸이용해서 무언가를 회피하고 있다는, 이렇게 무책임하게 인상적으로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그걸 말하지 않기 위해 각자의 인물이자기 차례가 왔을 때 책임을 떠넘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걸 말해야 하는 숏이 다음에 나와야 할 때 갑자기 영화는 다른장소에 있는 다른 인물 신으로 달아나버리고 만다. 물론 술래는 괴물이다. 더 미룰 수 없을 때 그 자리에는 아무 말도 못하는괴물의 차례가 돌아온다. 중심의 결여라고 할까, 주변의 점으로 이루어진 가운데가 빈 원형이라고 할까, 이 이상한 이야기의 진행안에서 종종 이야기를 구경하는 것 같은 수평 트래킹 카메라는 분산되는 인물과 그걸 붙이려는 편집 사이의 무심한 매듭이다.이를테면 괴물이 한강에서 뛰쳐 올라와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는데 그냥 무심하게 원효대교를 지나가는 버스 안에서 그걸 쳐다보는승객의 수평운동의 시선. 나는 <괴물>에 대해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서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한 가지 더 지적할 점. <괴물>의 날씨는 박강두와 그의 가족이 병원에서 탈출한 다음부터종잡을 수 없다. 심지어 한강 둔치로 들어가는 굴레방 다리를 지나기 전에 그렇게 내리던 비가 거길 지나가자마자 개어 있다.그런데 여길 지나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걸어서도 1분이면 충분하다. 이 비현실성 혹은 초현실주의적인 날씨. 겨우 50m 이쪽과저쪽이 마치 다른 도시처럼 보이는 거리. 나는 한강에 나타난 괴물보다 이쪽이 훨씬 신기해 보인다. 그런데 봉준호는 그게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괴물>에는 무언가에 고착된 채 그걸 집행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요소를 끌어안고 거기서 눈에보이는 광경만을 펼친다. 혹은 무언가 상상을 덧쓰려는 현실효과를 뿌리치려는 완강한 저항이 있다. 대중 안에 이데올로기의 폭탄을던지는 것은 오늘날 그렇게 점점 상상이 환상을 덮어쓰는 방식으로만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는 <괴물>이 좀더많은 질문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질문을 온통 돈문제로 환원시키는 것은 대한민국 영화담론의 빈곤함이다. 아무래도<괴물>을 말하기 위해서는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질문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다세포 소녀>

<다세포 소녀>

하지만 여기 나는 한편을 더 추가하고 싶다. ‘B급 달궁’(이라는 예명을 쓰는 채정택 작가)의, 얼짱김옥빈의, 혹은 이재용의 <다세포 소녀>는 건드리기도 전에 끝났다. 이 영화를 말할 때 성 정치학이나 장르의 혼합,혹은 패러디를 말한다. 하지만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에 대해서는 애써 질문을 피한다. 그 반대로 나는 이 소녀가 가장궁금하다. ‘B급 달궁’의 원작에서는 주변 인물에 지나지 않는 이 소녀가 갑자기 이야기의 중심에 왔을 때, 그래서 계급모순이중심에 올 때 성 정치학은 왜 창백해지는가? 왜 이 영화에는 도착은 있는데 전복이 없는가? 혹은 성에 대한 애착만큼프롤레타리아를 사랑하는 것은 왜 불가능한가, 라는 질문과 마주하게 만든다. 그걸 이재용이 질문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그 반대로 질문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성애자 앞에서 트랜스젠더는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받는’ 타자이지만, 부자앞에서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는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타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괴물>을 본 다음 <다세포 소녀>를 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올 여름, 마침내 다시 정치의 계절이도래하였다. 혹은 <괴물>은, <다세포 소녀>는 2006년, (평화로운 국면인 척하는) 대한민국을(계급모순과 반식민지 분단체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위기 아래 놓인) 대한민국답게 만들어주고 있다. 내년에는 대통령 선거를 한다고한다. 다가올 미래 앞의 기기묘묘한 예고편. 내년 대통령 선거는 괴수와 싸우는 영화가 될까, 아니면 정치적 복장도착의 뮤지컬이될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야기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지난 여름이 끝나기 전 몇편의 영화를 더 보았다. 먼저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 두편을 모두 본 것은 <파이란> 때문이다. 나는 <파이란>이 지닌통속성에의 향수를 놓치고 싶지 않다. 그해에 <순애보> <봄날은 간다> <번지점프를 하다><소름>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나왔다는 사실을 환기해 주기 바란다. 나는 지금 멜로드라마만 열거한것이다(그해에 가장 대중적인 영화는 <친구>였다). 이 명단은 예외없이 사랑을 포기함으로써 사랑을 잃지 않는 행위를선택한다. 그것을 우리 시대의 쿨한 사랑법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파이란>은 갑자기 낭만적 사랑의 제스처를 택한다.거의 복고취향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의 통속성. 나는 이 반시대적 연애영화의 행위가 너무도 용기있어 보여서 그걸 방어해야 한다는어떤 만족을 얻었다. 그러나 그 만족은 어떤 망설임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파이란>을 본 다음 이 영화의 장점이(김해곤의) 시나리오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송해성의) 연출 몫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해성이<카라>로 데뷔한 것은 (적어도 내게) 악재로 작용하였다. 세 번째 영화 <역도산>은 송해성보다는 어딘가(이 영화를 제작한) 차승재의 영화처럼 보였다. 그런 다음 <우리들의…>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연애…>을 먼저 보고 난 다음 보게 되었다. 결과는 좀 이상한 방식으로 대답하였다. 이 두편의 영화는<파이란>을 둘로 나눈 것 같았다. 둘 다 거의 벼랑까지 밀고 간 다음 눈물을 요구했고, 둘 다 지지리 궁상을 떨면서바닥을 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둘 다 사랑에 빠진 커플에서 남자쪽에 기대 이야기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신파조 이야기 안에서조차그래도 산다는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는 끈덕진 장점은 김해곤의 것이었고, 강재라는 남자에게 부여한 피와 살은 송해성의 것이었다.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먼저 <연애…>. 영운은 비루하지만 그만큼 흥미있는 등장인물이다. 그러나 <해변의여인>의 김승우를 ‘직전에’ 먼저 본 것은 김해곤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홍상수는 일단 자기 영화 안에 배우가 들어오면거의 일그러뜨리다시피 한 다음 자기 이야기 안에서 반쯤 자백을 하듯이 연기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는 배우에게 일종의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이다. 그리고 그걸 점점 더 잘한다. 문제는 그게 너무 인상적이어서 다른 영화에 그 배우가 나올 때 그렇게홍상수 마음대로 구겨지고 이리저리 잘라낸 이미지가 남아서 (혹은 복원되지 않아서) 남의 영화 안에서 홍상수 영화 속의 인물의이미지와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승우는 이상하게 이야기의 시선이 잘 투영되지 않는다. 홍상수는 그걸 안 다음,이를테면 세 그루의 나무 앞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울음을 터트려도 김승우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같은 자리에 김태우는갈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연기의 문제가 아니라 모델의 문제이다. 그런 다음 홍상수는 재빨리 고현정과 송선미에게 응시의 자리를돌려서 문숙과 선희를 번갈아 그 곁에 앉혀놓고 그 앞에서 김승우에게 말하게 만든다. 그때 김승우는 항상 보는 대신 보인다.그러나 <연애…>에는 그럴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술집 여자 연아(장진영)는 보는 사람을 설득시키기 매우 힘든등장인물이다. 그러므로 이 인물을 믿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영운이 동원되는 구조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혹은 연아라는 인물의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은 영운뿐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연아는 영운의 환상의 대상이다. 그런데 연아쪽에서 영운을보게 되면 이 주관적인 감정선을 객관적으로 노출시킬 위험과 만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납득할 수 없는 연아쪽에서 영운을볼 때 이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이비) 브레히트적 조건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인물을 믿을 수 없을 때 이야기는 앞으로나아가지 못한다. <연애…>는 그 상황이 가슴 아프게 우습지만, 그 안의 인물들이 그 상황을 구경하는 듯한 느낌을끝내 떨치지 못한다. 그러면 그걸 보는 나는 무엇을 구경해야 할까?

 

연민으로 끝나고 마는 눈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우리들의…>는 비슷하면서 다른 문제에 부딪힌다. 누구나 하는 말이지만 강동원은‘완전소중’이다. 얼마나 멋있는지 죄수복을 입어도 빛이 난다. 곁에 선 이나영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강동원이 그저 슬쩍 슬픈표정을 짓는 게 더 안쓰럽다. 게다가 이 형무소는 차라리 기숙사처럼 보인다. 지난해 추석에는 하지원이 그 곁에서울었고(<형사 Duelist>), 올 추석에는 이나영이 옆에서 울고 있다. 내년에는 누가 그 옆에서 또 울까? 그러나영화 속에서 누군가가 우는 것과 그걸 보는 내가 우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는 영화를 볼 때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송해성은 잘 울리지 못한다. 그의 재능은 울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는 것을 보는 데 있다. 그는 남자가 우는 걸 가장 잘보는 감독이다. <파이란>은 그 순간과 만날 때 보는 사람을 움직인다. 최민식도 강재에게 공감을 가졌던 것 같다.그런데 최민식은 전형적인 메소드 액터이다. 그는 지나치게 강재 안까지 들어갔다. 그런 다음 최민식은 강재에게서 나오기 위해서거의 몸부림을 쳤다. 오대수라는 인물을 선택한 것은 배우로서 일종의 자살이다(<올드보이>). 그렇게 해서라도 강재를죽이고 내가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거기에 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그런데 반대로 강동원은 사형수 정윤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세상은 공평하다. 지나치게 멋있는 남자들은 모델은 잘할 수 있지만 배우는 힘들게 한다. 강동원은 좀더 부서져야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연기를 못하는 것이아니라 너무 근사해서 문제다. 그렇다고 모델로서 그 인물을 흉내내기에는 정윤수가 던져진 상황이 너무 드라마틱하다. 마지막 선택.그렇다면 강동원은 정윤수 그 자신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공지영은 소설을 쓰면서 정윤수를 그려낼 때 단 한번도 강동원을떠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맹세를 해도 좋다. 강동원과 정윤수는 인생에서 거의 공집합이 없는 삶을 살아오다가 여기서 처음 마주쳤을것이다. 브레송의 유명한 말. 영화에는 두 가지 인물이 있다. 하나는 인물을 배우가 흉내내는 것, 또 하나는 인물이 모델을 닮는것. 잡으러 가기와 잡아당기기. 모델이 강동원일 때 정태성은 그를 잡으러 왔다(<늑대의 유혹>). 하지만 모델이정윤수일 때 강동원은 그를 자기 안으로 잡아당겨야 한다. 송해성은 정윤수의 눈물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에서 보려고노력한다. 그러나 거기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정윤수가 아니라 강동원이다. 그때 눈물은 오로지 가련한 연민으로 끝난다. 하지만<우리들의…>는 사랑이 아니라 죽음을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죽음의 두 가지 측면, 자살과 사형은 이나영과 강동원의 눈물을 경유하여 삶의 상실이라는 슬픈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사랑의 상실은 삶의 상실과 맞바꿀 만한 가치가있는 것일까? 물론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눈물은 이미 주어진 현실을 얼룩진 왜상으로 만들어 진실을 보도록도와주지도 않는다. 눈에 머물지 못하고 그저 흘러내리는 눈물. 세상을 보는 대신 이야기에 내던져진 슬픈 눈물. ‘안습’ 내기.눈물은 영혼을 비쳐 보이거나 그 반대로 감정을 증발시켜버린다. 매우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그 둘이 함께 만든<파이란>이 그 두편의 영화 어느 쪽보다 좋다. 그러나 <우리들의…>에 대해 쓰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내게<연애…>를 쓰는 것도 그만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미있지만 너무 많은 영화가 어른거린 <천하장사 마돈나>

<천하장사 마돈나>

이해영과 이해준의 첫 번째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는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들이시나리오작가에서 시작한 사람들답게 보는 내내 이미 정해진 결론까지 가면서도 작은 반전의 대목들을 기습적으로 배치해두고 있었다.하지만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너무 많은 영화들이 어른거린다. 이를테면 어쩔 수 없이 수오 마사유키의 <으랏차차스모부>. 게다가 트랜스젠더 ‘이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후’에 대해서 어떤 작은 대답조차 할 생각이 없는 이영화의 태도는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을 결국 구경거리로 만들고 말았다(그들은 그 후일담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 그만두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영화의 윤리적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박철희의 <예의없는 것들>은 왕가위의 <타락천사>의 두이야기를 샘플 리믹스한 것 같다. 말을 못하는(금성무) ‘킬라’(여명). ‘그녀’(윤지혜)는 막문위를 흉내내고 있는 중이다.그래도 다행히 ‘망기타’는 흐르지 않는다. 조범구의 <양아치어조>는 좋지는 않지만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게만들었다. 이 영화에는 날을 세운 감정의 칼과 그것에 찔린 다음에도 그걸 참아내는 포옹이 함께 있었다. 나는 그가 멀리 갈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 번째 영화 <뚝방전설>은 좀 어리둥절했다. 내가 그의 첫 번째 영화를 잘못 보았든지아니면 영화에 대한 그의 생각이 바뀌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새 도망친 여름.

 

스튜디오로 귀환한 타르코프스키의 세계 <리턴>

가을이라고 느꼈을 때 처음 본 영화는 안드레이 즈비야긴체프의 <리턴>이다. 이 영화는 임상수의<바람난 가족>이 베니스영화제에 간 해에 황금사자상을 받은 데뷔작이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이 영화는 ECM영화다.집 떠나간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아들 앞에 나타난다는 이야기는 레닌 ‘이후’ 러시아영화에서 줄기차게 반복해서 다루어온억압에의 귀환이다. 말하자면 서방세계의 아버지와 달리 러시아영화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정신분석적이라기보다는 역사적 무게가 더크다. 이미 많은 영화들이 그러한 화법을 택했고, <리턴>은 그러한 전통에 기대어 진행된다. 그러나 즈비야긴체프가새로운 것은 그 앰비언트 사운드의 디자인이다. 돌아온 아버지가 두 아들과 집을 떠난 다음 모든 장면은 야외에서 진행된다. 그런데사운드는 거의 밀폐된 것처럼 완전하게 통제된 스튜디오 안에서 작은 소리들을 일일이 만들어서 장면 안에 배치하였다. 그때 이사운드의 느낌은 ECM 음반을 들을 때의 그 차가운 명징함과 소곤거림, 어떤 노이즈도 없는 제로 상태, 허락되지 않는 잔향효과,모자이크에 가깝게 편집된 선율의 카탈로그, 어떤 작은 팬 홈도 남겨두지 않은 채 매끈하게 다듬어진 방음효과 안의 공간에 초대받은것 같은 인상을 준다. 즈비야긴체프는 그렇게 아버지의 대지를 스튜디오의 영토로 만들고 있다. 여기서 시간은 음향 안에 있다. 그안으로 돌아온 리듬적 인물과 그 속으로 떠나는 선율적 풍경. 그때 세상은 하나의 음향-기계처럼 느껴진다. <리턴>은타르코프스키 영화의 귀환의 실패이다. 물론 미학적 실패가 아니라 그 목적론의 실패라는 의미에서이다. 여기에는 타르코프스키가소망하는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지나가는 시간(의 경험) 안에서 되찾을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 희망이란 없다. 아버지가돌아오지만 그는 상자를 되찾은 다음 미처 열지 못하고 예상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므로 그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를추론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버리고 영화의 기호들에 우리의 감각을 열고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리턴>

그때 타르코프스키와 즈비야긴체프는 둘 다 바람에 관심이 많다. 타르코프스키는 심지어 헬리콥터를 동원해서바람을 만들어 들판의 나무를 뒤흔든다. 하지만 즈비야긴체프는 여기서 바람에 움직이는 나무를 찍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스튜디오에서 녹음된 바람 소리를 들려준다. 혹은 자연 속에서 찍은 이미지를 일일이 DI 작업을 해서 디지털 풍경으로 만든다.그때 타르코프스키를 연상케 하는 이 여행은 정반대로 기계적인 녹음으로 배열된 음향과 이미지로 자연을 인공의 영토로 코드화한다.흐루시초프 혹은 브레즈네프 시대를 산 타르코프스키는 스탈린 시대의 아버지가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타르코프스키의 아버지들이 이미 죽었거나, 유령이거나, 끝내 돌아오지 않거나, 바보이거나, 미쳐버리는 것은 이유가 있다. 푸틴시대의 즈비야긴체프는 고르바초프 시대의 아버지를 우스꽝스럽게 기다린다. <리턴>의 질문은 아버지가 왜 돌아왔느냐가아니라 왜 떠나갔느냐, 에 있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지 않는다. <리턴>은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음울한유머이다.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홍상수 영화 <해변의 여인>

그 다음. 안 쓰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냥 몇 가지 메모. 홍상수의 일곱 번째 영화는 장 르누아르가 미국에 가서 1946년에 찍은 첫 번째 영화와 제목이 같다. 그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인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영화에서 홍상수는 해변가 빌라 이층에 빌린 중래의 방을 중심에 놓고 복잡한 동선을 그은 다음 그 사이를 넘나들거나 되돌아오거나혹은 쳐다보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그때 불투명한 문과 커튼 사이로 (반)투명한 창문은 프레임의 숨바꼭질을 위한 알리바이가 된다.갑자기 프레임의 일부가 안 보이거나(저 문 너머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혹은 프레임의 일부가 구멍이 난것처럼 뚫려서(창문 너머에 있는 저 여자는 누구일까) 프레임 안에 프레임이 보인다. 말하자면 건축이라는 질료성을 영화적투시도법의 미장센으로 다시 구성한 장 르누아르의 화면과 동선. 문과 창문. 사실 그 둘은 모두 구멍이다. 프레임의 막힌 구멍과뚫린 구멍. 여기서 막힌 문은 분리에 실패한 소외이며 그 창문은 소외당한 욕망의 블랙홀이다. 그때 그 방문과 창문에서 내가떠올린 것은 루이스 브뉘엘의 <안달루시아의 개>에서 미처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개미들이 기어나오는 구멍 뚫린손이다. <안달루시아의 개>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변가에 부서진 상자가 보이고 난 다음 모래에 파묻힌 두 남녀가 보이자거기 “봄날에”(au printemps)라는 자막이 떠오르면서 끝났다는 사실을 떠올리시길. <해변의 여인>은 이제까지그가 만든 영화 중에서 가장 가까이 초현실주의에 기대고 있다. 심지어 그게 좀 아슬아슬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가 비유에기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해변의 여인>

(이미 당신께서 읽었을) 두개의 글을 읽고 나는 홍상수를 배운다. 김소영은 두명의 중래를 놓고 그사이에서 벌어지는 표면 위의 기호의 싸움을 본다(<씨네21> 제569호, ‘영화적 재미의 새로운 경지’). 이를테면“(중략)… 우연성을 필연으로 엮어내는 서사가 영화감독 중래의 강박관념인 셈이다. 그래서 그는 문숙과 선희가 닮았다고 말하게된다. 그리고 이 진술은 둘을 함께 목격한 식당주인, 그리고 선희에 의해 반복된다. 그러나 이 반복으로 가는 대한(??)의미화로 가는 대신 영화의 서사적 추동성은 문숙이 이것을 잘라내는 중단, 정지로 간다. 그녀는 중래를 놀리듯 말한다. 나는 반복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나는 이 대목을 읽다가 잠시 멈춘 다음 다시 읽었다. 기호의 반복과 서사(-운동의) 중단. 혹은정지. 반복 안의 중단. 사유하도록 강요한 다음 다시 이야기 안으로 끌어(attractive)들이기. 홍상수의 내밀한 몽타주.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 나는 항상 남의 글을 읽고 배운다. 그때 배움은 여전히 나의 행복함이다. 그런 다음 허문영은 오랜친구에게 보내는 듯한 더할 나위 없이 예를 갖춘 사랑이 그윽한 향처럼 번져나오는 글을 썼다(<씨네21> 제 560호,‘남자와 여자와 개의 시간’). 허문영은 여기서 이상하게 아무도 지적하지 않은 ‘해변의 개’를 끌어안고 개의 자리를 둘러싼인간의 형상에 대해서 <해변의 여인>을 거의 다시 쓰다시피 했다. 나는 이 개가, 그러니까 ‘돌이’, 혹은 ‘똘이’,또는 ‘바다’가 <해변의 여인>의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라고 믿는다. 나는 두개의 글을 읽은 다음 그 ‘이후’에 또쓰는 건 중언부언이야, 라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나는 <해변의 여인>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훔치면서 배운다. 이것이8월 말, 9월 초의 나의 첫 번째 배움이다.

글: 정성일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가을 영화 산책 [2]
2006.10.11 08:00

 

동해로 향하는 서해안의 여인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생각. 서해안에 가서 찍은 이 영화는 서울을 꼭짓점으로 한 다음 지정학적으로 남서쪽에 가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도 그 세 사람이 도착해서 바다를 바라볼 때 이상하게 자꾸만 동해안에 가서 진행되는 것처럼 90도 상상선을 그은 다음 그들을 바라보고 왼쪽 45도에 카메라를 세운다. 그런데 <강원도의 힘>에서는 강원도의바닷가에 가서 반대로 진행하였다. 지숙은 그녀의 두 친구와 함께 강원도 해변가에 간다. 짧은 신이지만 여기서 <해변의여인>과 거의 동일한 장면이 나온다. 그녀들은 해변에 도착해서 바다를 본 다음 돌아서 모텔을 보는데 그 앞에 웬 말이 서있다. 주인은 이 말 이름을 ‘주필이’라고 가르쳐주는데 지숙의 친구는 그 이름을 듣고 “주피야, 주피야, 넌 어쩌다 여기까지왔니”라고 묻는다. 그런 다음 다시 그 세 사람은 해변가에 앉는다. 그런데 카메라는 구태여 그녀들을 마치 서해안에 온 것처럼,그러니까 이번에는 상상선의 오른쪽에 가서 보여준다. 바다는 건물이나 길과 달리 고정된 것이기 때문에 마스터 숏으로 방향을 정하면그걸 반대로 틀어놓기 매우 힘들어진다. 나는 <강원도의 힘>을 보았을 때 이 신이 너무 이상해서 무척 인상적이었다.사실 난 이런 장면을 만나서 설명이 안 되면 거의 못 견디는 쪽이다. 이 장면에서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홍상수는 아직영화에 서투른 예술가이거나(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원도의 힘>은 에릭 로메르 ‘이후’에도 새로웠다) 아니면 그 스스로의이미 완성된 세계 안에서 결론을 갖고 영화를 시작한 셈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시행착오란 없다. 이미 그는 영화에 대해 결론을내렸고, 다만 그 안에서 반복의 역설 아래 차이로서의 반복과 반복 안의 차이 사이를 오갈 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끈질기게 내기를 미루었다. 그런데 꼭 10년 만에 <해변의 여인>으로 서해안에 간 홍상수가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바다 앞에서 반대로 진행할 때 어떤 쇼크를 받았다. 홍상수는 <강원도의 힘>에서 해변가를 ‘서해안의 힘’처럼보여준다. 그런데 <해변의 여인>은 내게 <동해안의 여인>으로 보인다. 나는 문숙의 차가 마지막 마지막신에서 지정학적으로 서해안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면서 가다가 갑자기 수렁에 빠진 다음 두 남자의 도움을 받아 거기서 빠져나오자마자갑자기 유턴을 할 때 아니, 여기서 유턴을 할 거면 뭐 하러 여기까지 왔을까, 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여기는 길도아니고 모래사장 한복판이다. 나는 거기서 차를 수렁에서 건져주는 두 남자 대신 그녀 스스로 ‘똥차’라고 부른 하늘색(푸른바다색?) 마티즈의 유턴을 보았다. 그때 서해안을 가던 차는 유턴을 해서 천연덕스럽게 동해안처럼 되돌아간다. 이때 나는 가까스로되찾은 긍정된 세계로부터 재빨리 다시 물러나는 홍상수를 본다. 똥차 혹은 버림받은 개. 개의 예와 아니오와 문숙의 예와 아니오.그것은 되돌아오는 것일까, 나아가는 것일까.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변덕스러운 봄날의 뿌연 공기.

 

김기덕에 대한 작은 연대

<시간>

나는 <해변의 여인>을 본 다음 막 개봉한 김기덕의 <시간>을 다시 보러 갔다.그러는 동안 김기덕은 소란의 한복판에 외롭게 던져져 있었다. 나는 그가 하는 말에 거의 개의치 않는 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그의 영화이지 그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사회가 끝난 다음 이루어진 기자회견을 거의 소설로 각색한 기사에 항의하는 배급사의회견 전문을 다운받았고, 심야에 생방송으로 중계된 <100분 토론>을 산만하게 보았고, 그 방송이 끝난 다음 김기덕이연합통신에 보낸 메일 전문을 읽었다. 김기덕은 네이버 조회 인기검색어에도 올라왔다. 김기덕의 메일에 달린 글은 그의 영화에 대한글보다 더 많았다. 심지어 그 메일에 수능시험 논술고사 채점하듯이 문장 단위로 일일이 토를 단 기사마저 있었다. 김기덕은텔레비전 인터뷰에 응한 다음 “나는 언론을 실험용 쥐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제 누가 누구를 조롱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지경까지 가고 있었다. 그런 다음에 다시 보는 <시간>은 나를 매우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텅 빈 영화관에는 나를 포함해서 8명이 쓸쓸하게 앉아 있었다. 조롱의 게임은 누가 바보인지를 놓고 벌이는 내기였다. 대답은 둘 다이다. 그것을 그자리에 앉아 있는 관객 수가 무심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나는 <시간>의 개봉을 촉구하기 위한 격문의 형식을 빌려 단지줄거리 소개만 했기 때문에(<씨네21> 제549호, ‘반복 안에서 찾은 새로움: 김기덕 감독의 신작<시간>을 최초로 보고 쓰다’), 좀더 안을 들여다보는 글을 쓰고 싶었다. 이 영화에 가장 따뜻한 글을 쓴 사람은 남다은이다(<씨네21> 제566호, ‘죽음만 남을 때까지 계속되는 반복’). 하지만 <시간>이 한국에서 개봉한 것이 김기덕에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에 대해 이제는 솔직하게 판단하지 못하겠다. 꼭 내가 쓴 글 때문에 개봉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 일정 정도 개입한 글을 쓴 나는 이 황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그저 쳐다보았다.<시간>에 대한 담론은 정작 빈곤하기 짝이 없었고 모두들 김기덕의 말에 대한 주석에 매달려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걸 보는 내 느낌은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흘려가면서 물어뜯듯이 매달린다는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렇다고 그 주석에 어떤 집요한 성찰이 있거나 혹은 그 말을 경유하여 영화 안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물론 김기덕의 영화를 싫어할 수 있다. 그러나 싫어하는 것이 김기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걸 혼동하면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이 김기덕의 열네 번째 영화를 보기 위해서 칸이나 베니스 혹은 뉴욕, 어쩌면 도쿄까지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가 서울에서 다시 ‘개봉’할 때까지 나는 더이상 그의 ‘새로운’ 영화에 대해 쓰지 않을 생각이다. 이것이 김기덕에 대한 나의 작은 연대이다.

 

오즈의 계절에 듣는 밥 딜런의 음악

그런 다음 잠시 망연자실하게 돌아보았다. 이제 막 여름이 끝나고 가을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 사이.늦은 여름 혹은 이른 가을. 말하자면 오즈의 계절. 지금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노래다. 밥 딜런의 (‘공식해적음반’ 연작을 제외하고, 그러나 5장의 라이브와 그레이트풀 데드와의 라이브와 한장의 사운드트랙을 포함해서) 39번째 앨범<모던 타임스>는 그냥 한마디로 심금을 울린다. 이 앨범은 누구나 연상하듯이 채플린의 그 유명한 마지막 무성영화와같은 제목이다. 하지만 밥 딜런이 여기서 채플린에게 오마주를 바치거나 패러디를 하는 것은 아니다. 구태여 떠올리자면 채플린이토키시대에 끝까지 무성영화로 저항한 것처럼 밥 딜런은 여기서 ‘옛것이지만 근사한’ 재즈 블루스 백 밴드에 기대어 중얼거리면서노래한다. 그는 이번에는 엘모어 제임스와 윌리 브라운, 머디 워터스, 로버트 팻웨이 혹은 토미 존슨 사이 그 어딘가에서,말하자면 미시시피 델타 블루스의 탁류에 몸을 내맡기고 세션 맨들과 어울려 흘러가듯이 노래한다. 그런데 비평가들은 로니 존슨의영향 아래 놓여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도 세 번째 트랙에서 느닷없이 머디 워터스처럼 <롤링 앤 텀블링>을 노래할 때는이상하게 걷잡을 수 없는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밥 딜런의 모든 앨범이 훌륭하지는 않지만 거의 동시에 데뷔한 폴 매카트니의 행보와비교하고 있으면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역사의 실패를 노래하는 고다르 <사랑의 찬가>와 <아워뮤직>

<사랑의 찬가>

나는 똑같은 마음을 고다르에게서 느낀다. 광화문에서 <사랑의 찬가>와 <아워뮤직>을막 보고 나오면서 고마워, 고다르, 라고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두 영화를 마치 동시상영처럼 보여주지만, 두 영화는 전혀 다른자리에 있다. <사랑의 찬가>는 일상의 물건들이 이미지가 될 때 우리로 하여금 지금 우리가 우주의 질서 안에 살고있다는 숭고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때 고다르는 단지 숭고함의 물신주의에 매달리는 대신 이미지가 덧없이 영화라는 시간 속에서사라져가는 것을 다루면서 이미지를 다루는 영화의 운명과 임무에 대해서 계속 질문한다. 고다르의 영화를 보려면 무엇보다도 질문을견뎌야 한다. 질문은 고다르에게 영화의 존재 이유이다. 아니, 차라리 고다르의 카메라가 사물의 이미지를 건드릴 때 세계가 질문을던진다, 라고 말하는 편이 맞다. 반대로 <아워뮤직>은 이미지의 교육학이라고 부르게 만든다. 그건 반드시‘연옥’편에서 고다르가 하워드 혹스의 <그의 여자 프라이데이>를 텍스트 삼아 숏과 상대 숏의 관계에 관한 긴 강연을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미 이 토픽은 1963년 장 피에르 우다르가 로베르 브레송의 <잔다르크의 재판>을 본 다음(라캉의 ‘봉합’(suture) 개념을 빌려) 문제제기를 하였고, 그때 고다르는 이미 나나가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수난>을 보다 말고 갑자기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비브르 사비>를 찍은 다음이다. 핵심은 왜 그걸 지금다시 끌어들이고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역사적 관계, 그에 영화가 대응하는 판타지와다큐멘터리, 그런 다음 숏과 상대 숏의 비대칭성이라는 삼항 관계로 놓고 진행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그리고 이 영화는 단테의<신곡>을 빌려 지옥, 연옥, 천국이라는 삼부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 고다르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진행중인 역사가 변증법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고다르는 실패한 것이 역사이지 변증법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진행이 중단된모순으로서의 상대 숏, 좀더 정확하게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물어본다. 상대 숏으로서의 팔레스타인. 안티테제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변증법은 잘못된 종합명제로서의 천국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낸다. <아워뮤직>의 ‘천국’은 불길하다. 말하자면 주한미군에게  ‘작통권’을 갖게 해달라고 하소연하는 우파들이 날뛰는 대한민국은 고다르에게 21세기의 천국이다. 제국의 천국. 역사 속의이미지들은 지옥의 피에 젖어들고, 현재 진행 중인 연옥의 이미지들이 모순의 불평등에 시달릴 때, 미래의 천국은 미군의 이미지들이점령할 것이다. 그것이 고다르가 부르는 ‘우리의 음악’(notre musique)이다. 음악은 아직 (혹은 영원히) 도래하지않은 이미지를 부르는 호명이다.
그렇게 노래하는 고다르와 밥 딜런. 나는 이 두 사람을 같은 해에 ‘발견’했다. 그런 다음 그들의 새로운영화 혹은 노래를 기다리면서 살았다. 때로는 실망했고, 때로는 의심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아니,그러기는커녕 항상 나보다 훨씬 멀리 나아갔다. 그걸 뒤쫓아가면서 나는 배우고 또 배웠다. 그 안에 있는 앎의 비밀. 아니 차라리 세계라는 비밀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기호. 지치지 않는 사랑. 앎과 사랑 사이를 연결하는 긍정. 그 사이(entre). 그 둘이연결될 때 배움의 느낌이 불러일으키는 상위형식의 비밀에 대한 간절한 궁금증. 그 형식 안에서 활동하는 나의 능력의 한계가안겨주는 슬픔. 그러므로 그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사랑의 찬가>와 <아워뮤직>을 보면서, 혹은 밥 딜런의<모던 타임스>를 들으면서 또 배운다. 이것이 이번 이른 가을의 두 번째 배움이다.

 

디지털카메라의 놀라운 클로즈업 <퍼펙트 커플>

그리고 종로에서 짧은 축제가 있었다(당신이 이 글을 읽을 때는 이미 끝났다. 멀어서 오지 못한 것은유감이지만, 게을러서 보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일곱 번째를 맞는 서울영화제는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나는 올해가 가장 재미있었다. 나는 영화가 지나치게 자기를 뽐내거나(실험영화들), 반대로 너무 겸손해할 때(미디어로서의 영화들) 흥미를 잃는다. 물론 그걸 더 좋아할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취향을 말하는 중이다. 영화는 세상과의 긴장을 유지할 때, 그래서 그 둘사이의 관계에 내가 개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내 생각이 활동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다. 결국 영화는 어떤 자세로 세상을 보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어떤 자세를 선택할 때 거기서 진실을 볼 수 있느냐는 선택의 내기이다. 영화와 세상 사이를 중재하는자세와 거리.

스와 노부히로의 <퍼펙트 커플>과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더 선>은 동시상영처럼 볼필요가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여기에 마이클 만의 <마이애미 바이스>를 더하고 싶다. 본 것은 내게 매우 큰 의미가있었다. 스와와 소쿠로프는 자기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전혀 다른 영화를 만든다. 스와 노부히로는 지금 막 이혼을 결심한 부부의이틀간의 감정적인 위기를 다룬다. 소쿠로프는 1945년 8월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다음 유폐되어 살고 있는 천황히로히토를 다룬다(그리고 마이클 만은 마이애미의 두 형사를 다룬다). 이 세개의 인물 다루기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셋다 디지털카메라로 인물에게 다가간다. 그래서 필름 카메라로 다가갈 수 없는 거리까지 바짝 다가간다. 그 놀라운 클로즈업이 전혀다른 내용, 전혀 다른 스타일, 전혀 다른 인물에게서 동시에 벌어진다. 이때 클로즈업은 카메라와 얼굴 사이에서 그 이전에 한번도본 적 없는 거리를 창조한다.

<퍼펙트 커플>

나는 이미 마이클 만에 대해서는 말했다(<씨네21> 제568호, ‘눈물과 매직 아워’).그러므로 그 뒤를 이어 스와 노부히로,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퍼펙트 커플>은 로셀리니의 <이탈리아여행>을 파리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영화다. 스와 노부히로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생각인 것 같다. 세 번째영화 <H 이야기>에서는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을 자기 방식으로 리메이크했다. 그런데 이영화를 알랭 레네에게 보내자 레네는 “편집이 되지 않은 영화를 왜 내게 보냈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일화는스와 노부히로 스타일을 간단하게 설명해준다. 스와 노부히로는 영화에서 데드 타임을 그냥 내버려둔다. 그는 로셀리니보다는 존카사베츠에 더 가깝다. 그래서 장면은 때로 배우에게 맡겨지고 종종 한없이 이어지기도 한다. 영화는 1시간44분 동안 고작44숏이다(중간에 나오는 검은 자막은 셈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게 한신을 한숏으로 찍은 것은 아니다. 대부분 그렇게 찍기는했지만 그러나 갑자기 장면을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같은 방을 쓰다가 다른 방으로 옮긴 아내 마리를 찾아 남편니콜라스가 찾아간 장면에서 갑자기 숏을 나누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스와 노부히로는 고정된 카메라로 롱테이크로 찍을 때는 소통의단절을 보여주다가 그들의 대화가 소통될 때 갑자기 나누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영화의 비밀은 롱테이크나멈춘 카메라에 있지 않다. <퍼펙트 커플>에서 이 두 사람의 감정을 따라가는 것은 카롤린 샹페티에의 카메라와 그카메라와 거의 혼연일체가 된 동시녹음 기사 장 클로드 로뢰가 들려주는 미세한 소음들이다. 카메라는 멈춰 서 있는데 사운드의붐마이크는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있다. 그래서 어떤 장면은 마치 후시녹음을 한 다음 폴리를 한 것처럼 제한적이고, 어떤 장면은 카메라는 이쪽에 와 있는데 붐마이크는 저쪽에 있어 카메라와 붐마이크가 숏과 상대 숏의 역할을 한다. 가장 놀라운 장면은 마리가로댕의 조각이 있는 미술관에 들를 때다. 그때 장면은 모두 실내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이 실내를 두개의 전시 공간으로 나누고있는데, 그때 카메라와 붐마이크는 공간이 오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임 안에 누군가가 들어와야만 그 존재를 인정한다.말하자면 장소가 지닌 물질성과 붐마이크가 갖는 질료성 사이에서 카메라가 그것을 중재한다. 그 안에서 스와 노부히로는 이혼을 앞둔불안한 마리가 불멸의 예술품으로 남아 있는 로댕의 조각상이 주는 영원성과 우연히 어린 아들과 함께 거기를 찾아온 옛날 고등학교동창이 자신의 아내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삶의 소멸 사이에서 겪는 심리적 동요를 끌어낸다. 영화는 두번 아내 마리와남편 니콜라스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간다. 그런데 카메라가 너무 가까이 가서 표정을 알 수가 없는 얼굴을 보여준다. 그때이 얼굴은 말 그대로 풍경처럼 보인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다룬 <더 선>

세 번째. 알렉산더 소쿠로프는 매우 난처한 세명의 인물의 연작을 찍었다(아마도 이 연작은 계속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 하나는 레닌을 다룬 <몰로크>이고, 그 다음은 히틀러를 다룬 <타우르스>이고, 그리고<더 선>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다룬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그들의 결정이 정말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다루면서 소쿠로프는 그런 역사적 책임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미 전쟁은 끝났고, 히로히토는 작은 도서관에 유폐된 채 지낸다. 마치 채플린처럼 우스꽝스러운 그의 뒤뚱거리면서 걷는 모습은 미군 점령관 맥아더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지만(그는 중얼거린다. “내가 저런 인물을 또 어디서 보았을까?”), 여전히 히로히토를 모시는 가신들은 그를 ‘태양의 신’으로생각한다. 전쟁에 진 것은 인간인 신하들의 책임이며, 여전히 신인 동시에 일본 그 자체인 히로히토에게 누가 될까 인의 장벽을친다. 그래서 히로히토가 국민들에게 알리는 담화문으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전쟁에 책임을 진다”는 녹음을 한 젊은 남자는 그녹음과 함께 할복자살한다. 그때 소쿠로프는 시종일관 이 영화를 거의 꺼져버릴 듯한 어둠 속에서 진행한다. 그래서 이미지들은‘일본의 태양’인 히로히토가 마치 금방이라도 꺼져서 어둠이 세상을 삼켜버릴 것처럼 희미한 빛과 거의 화면 전체를 지워가는그림자로 가득 차 있다. 사실 그 태양은 꺼져야 한다. 그러나 히로히토는 희미하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는 유일한빛이다. 이 영화에서 다른 등장인물들은 얼굴의 일부가 그림자들이 갉아먹은 것처럼 지워져 있지만 히로히토의 얼굴은 항상 온전하게보인다. 신과 인간의 경계에 서 있는 이 인물을 소쿠로프는 자신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따라간다. 그때 소쿠로프는 ‘감히’히로히토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신이 가질 수 없는 삐죽대는 뻐드렁니와 주름 잡힌 피부를 거의 만질 것처럼 본다. 거기엔어떤 신화도 없다. 그러나 그렇게 다가가서 인간의 얼굴을 드러낼 때, 그래서 그가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볼 때조차, 그를 신으로 남겨놓기 위해 그 주변의 인물들이 기꺼이 복종하고 심지어 할복자살을 할 때 히로히토는 그가 염원하는 인간의 자리에 내려오지못한다. 소쿠로프는 종종 히로히토의 얼굴을 바짝 다가가서 찍지만 <더 선>은 소쿠로프가 쓰고, 연출하고, 찍었다.거의 폐소 공포증에 가까운 이 영화에서 이따금 히로히토의 상상을 따라 도쿄가 폭격당하는 장면이 꿈결처럼 펼쳐진다. 그때 불바다가된 도쿄거리를 날아다니는 것은 마치 헤엄을 치는 듯한 물고기들이다. 그 기괴한 장면들은 이 태양의 신이 바다에서 온 것은아닐까, 라는 환상에 빠질 만큼 소름 끼친다. 한 가지 더. 영화 중간에 나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 5번>은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이다. 내가 이 위대한 대가의 연주를 평가할 자리에 있지는 않지만 나는 이 연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봐야 하는 10시간30분짜리 영화 <필리핀 가족의 진화>

올해 서울영화제에서 백지수표를 위임받고 거기에 다섯편의 추천작을 써넣었다. 그중 한편이 라브 디아즈의<필리핀 가족의 진화>이다. 우선 이 영화를 보려면 그날 하루를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상영시간이10시간30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반문할 것이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건 그날 하루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로테르담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 다음날 아무 영화도 보지 않았다. 그냥 하루 종일 이 영화를 다시생각했다. 간단한 줄거리. 할머니와 그녀가 낳은 남매가 있다. 오빠는 세딸을 남겨두고 아내가 도망갔으며, 여동생은 돈 벌러마닐라에 갔다가 강간을 당한 다음 미쳐서 쓰레기장에서 자기의 아들이라고 믿는 아이를 주워서 고향에 돌아온다. 마르코스 대통령독재치하의 필리핀은 이 작은 시골에서도 혁명군과 정부군의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진다. 오빠는 골치 아픈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혁명군 편을 들면서도 빨치산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일이 문제가 되어서 매를 맞은 그는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된다. 오빠가돌아왔을 때 여동생이 동네 남자들에게 납치되어서 강간을 당한 다음 매장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가 주워온 소년은 총을 구한다음 그들을 쏘아 죽이고 고향을 떠난다. 그런 다음 이야기는 이제 오빠의 집과 소년이 떠돌다가 흘러들어간 집을 오가면서진행된다. 오빠는 소년을 대신해서 감옥에 갔다 온 다음 소년을 찾아서 필리핀을 떠돌다가 도둑이 된다. 오빠는 그러면서 마닐라의범죄조직에 연루된다. 그러는 동안 고향에서 오빠의 어린 딸을 노리는 시장은 계속 할머니를 찾아와 어린 그녀를 첩으로 달라고조른다. 한편 소년이 머무는 집에서 그를 양아들로 받아들인 아버지는 금맥을 발견하겠다고 세 아들과 함께 정글을 헤매다가 그의아들 중 한명이 금을 둘러싼 갈등 끝에 옛 친구의 부하들에게 맞아 죽고 실종된다. 아버지는 복수를 맹세한다. 그러는 동안독재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마닐라로 돌아온 민주인사 베그니노 아키노는 공항에서 총에 맞아죽고, 그의 아내 코라손 아키노가 투쟁을계속한다. 마르코스는 실각하지만 군부가 재집권을 하고, 민중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필리핀 가족들은 아직도 투쟁중이다.

좀더 놀라운 이야기는 <필리핀 가족의 진화>가 5시간30분의 <남부, 바탕>,그리고 9시간의 <예레미아>와 함께 3부작으로 이루어진 영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보아도 다보지 못한다. 나는 두 번째 이야기만을 보았을 뿐이다. 라즈 디아브는 필리핀 근대사라고 할 이 거대한 서사를 8년에 걸쳐찍었다. 문제는 영화 속의 인물들은 정말 나이를 먹고, 한편으로 베타 캠으로 시작한 촬영은 DV로 바뀌면서 영화의 화질이바뀐다! 게다가 필리핀 근대사의 사건들을 발췌한 텔레비전 화면들도 그냥 사용하였다. 말하자면 기술적인 완성도로 본다면 일부는마치 아마추어가 찍은 것처럼 약점이 많고, 무엇보다도 사운드의 문제는 부분적으로 너무 손실이 커서 일정 수준에 맞춰놓고 상영하면중간에 안 들리다가 갑자기 큰소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흑백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보는 사람을 움직인다. 단지 그것이 정치적인문제를 다루거나 혹은 역사를 건드려서가 아니라 여기에는 새로운 화법이 있다. 라즈 디아브는 역사와 가족사를 단순하게 도식적으로병렬시키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필리핀의 근대사는 숨 가쁘게 바뀌고 있는데도 거의 나라 끝에 위치한 것 같은 이 두 가족은자본주의와 봉건적 관료제, 반근대적인 인습과 이기적이고 야만적인 개인들의 욕심, 정치를 내세운 교활한 잇속, 민중투쟁을 하다가독재 권력을 타도하는 순간 권력으로 변모하는 해방전선의 동지들, 그 속에서 부서져가는 여자들, 여자들 사이의 착취, 그 악순환의고리들이 어떻게 필리핀이라는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때로 이것은 마치 현장에 취재나온 기자의 생방송 중계처럼진행되기도 하고, 때로는 거의 시적인 실험영화처럼 DV를 이용한 무한정한 롱테이크로 진행되다가, 마닐라의 범죄 소굴에서는장르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산만하기보다는 인물들의 사건 안에서 피와 살을 부여하는 것은 이것이 누가 보아도전투적으로 연출되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앙드레 바쟁은 영화를 보지 말고 영화를 만든 과정을 보라고 충고했다.만일 라즈 디아브의 <필리핀 가족의 진화>를 영화사의 계보에 놓아야 한다면 오페라풍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를 만든 루키노비스콘티의 <대지는 흔들린다>로부터 이어지는 긴 미학적-사회적-정치적-여정의 21세기 버전일 것이다.

사적인 고백. 그런데 이 영화를 추천한 다음 의기양양해하다가(*^^*) 갑자기 그날 아침 아, 어쩌면 그상영시간에 질려서 아무도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다. 그리고 영화관에도착했다. 나를 놀라게 만든 것은 그 자리에 28명의 관객이 각오라도 단단히 한 것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도 그 곁에앉았다. 이걸 처음부터 다시 본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힘들었지만 나는 그들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사람이 중간에가고, (중간에 세번의 휴식이 있었다) 신기한 건 중간부터 보기 시작한 몇 사람이 있었다. <필리핀 가족의 진화>를본다는 것은 영화가 주는 관습과 싸우면서 투쟁적으로 획득하는 자유로운 리듬의 쟁취의 일부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영화는2시간이라는 상영시간에 굴복해 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이야기를 하건 그 시간 안에 풀어내야 하는 시간의 물리적 경제성 앞에굴복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모든 이야기가 2시간 안에 해결될 수 있는가?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다고 결정하는 순간 영화의시간적 경제성이란 무효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28명의 투쟁적인 관객에게 동지들, 이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단 한번의 상영.우리는 2006년 9월11일 월요일, 하루 종일 함께 있었다. 나에게 영화 친구란 말하자면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분들이다.

 

지아장커에게 배우다

<스틸 라이프>

마지막 수다. 내가 가을이 막 시작되려는 9월의 첫 번째 주말에 들은 기쁜 소식은 지아장커가베니스영화제에서 <스틸 라이프>(三峽好人)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는 뉴스였다. 물론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걸읽으면서 문득 구정이 쓴 글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구정은 베이징전영학원에서 문학과 영화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그런다음 지아장커 영화의 시나리오를 함께 쓰고 그의 조연출이 되었다. 그는 지아장커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고하는 글을 쓴 적이있다. “1997년, 우리는 졸업할 때가 되었다. 친구들은 각자 앞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지아장커는 여전히 영화를 찍고 싶어했으나, 아무런 대책없이 그와 함께할 친구는 없었으며, 모임은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조금도슬프지 않았고,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시간은 벌써 이렇게 흘렀고, 우리는 생계의 부담을 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서로 바라볼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다. 졸업하기 4개월 전, 지아장커가 돈을 구해왔다. (중략) 지아장커가 나와왕홍웨이(<소무>의 주연)를 찾아왔다. 우리 같이 영화를 찍자. 구정, 네가 조감독을 맡아주고, 왕홍웨이, 네가주연을 맡아줘. 역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야. 우린 거절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영화를 찍으러가니까.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찍는거였으니까. 우리는 결코 거절할 수 없었다.”(구정, ‘우리 같이 영화 찍자’, <지아장커, 중국영화의 미래>) 그영화가 <소무>이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다음 1980년대 중국을 통과하는 가무단 이야기<플랫폼>을 찍었고, 다퉁에 사는 두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임소요>를 그렸고, 베이징 테마파크에서 일하는청춘을 그린 <세계>를 찍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지아장커는 여전히 중국 사회주의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를 찍고 있다. 그는 아주 멀리 왔지만, 그러나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나는 그것을 지아장커에게 배운다. 이것이막 시작하는 가을에 세 번째 배움이다. 오늘 밤에는 그에게 축하 메일을 쓸 생각이다. 그렇게 이 수다스러운 일개 영화평론가의가을밤이 깊어가고 있다. 당신은 오늘 밤 누구에게 메일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후렴) 지금은 가을이니까.

글: 정성일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가을 영화 산책 – 씨네21”에 대한 2개의 댓글

  1. 두번째 문단은 제 생각과 똑같네요..^^
    하지만, 오만과 겸손의 판단을 내리고 있는 적당한 기준이란게 저급할만큼 모호하죠. 따지고 보면 어설프다고 할까요.

    • 그 객관적인 기준을 얘기하는 건 모호할 뿐만 아니라 소모적일 수도 있겠지요.
      이건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그 양극단에 대한 판단은 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 판단을 들고 서로의 진실에 대해 얘기해 볼 수 있는 거겠지요.
      (첫 방문이시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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