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준익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간 제대로 본 영화도 없다. 가끔 TV를 돌리다 우연히 ‘황산벌’이나 ‘라디오 스타’ 따위가 나올 때면 잠시 보다가는 바로 한숨이 나온다. 그의 영화가 표현하는 감정들은 항상 과잉이고 키치적이며 마초적이다(이 조합은 정말 좋지 않다).
님은 먼 곳에’ 역시 그랬다. 약간 옹호의 여지는 있지만 벗어나지 못한다. 세트 제작 스탭으로 참여한 순근이를 생각해 극장에서 봤지만 사실 극장에서 돈 내고 보지는 않을 참이었다.
3대 독자에게 시집을 간 시골 처자 순이가 시어머니의 요란에 남편 찾아 베트남까지 간다. 그런데 영화 내내 그녀는 왜 베트남까지 가는지에 대해 아무 말이 없다. 그리고 극은 정만, 정진영이 다 끌고 간다. (엄태웅은 제발 연기 좀 해라. 눈만 까 뒤집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한 움큼도 들려주지 않고 묵묵히 베트남까지 와서 위문공연 가수가 된 순이는 백치의 주체다. 온통 남성들뿐인 세상에서.
쟁점은 이 백치의 주체를 영화가 다루는 방식을 옹호할 것인가 하는 것인 것 같다. 옹호할 여지는 순이가 가부장제적 질서를 누구보다 지독하게 고집하려는 것에서 새어 나오는 것 같다. 순이는 영화 중반부터 이미 써니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부(從夫)를 고집한다. 나는 써니와 순이에서 근본적으로 변화, 단절된 주체라는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써니는 당연히 가부장제적 가치를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영화는 표면적으로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순이는 써니가 되고 나서 비로소 가부장제를 악에 받쳐 지켜 내려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 볼 단 하나의 역설은 이것이다. 그녀는 춤추고 노래하면서 피폐해진 남성들을 위무하는, 그리고 급기야 미군 장교에게 몸을 바치는 지경에까지 가면서도 남편을 찾아내겠다는 가부장제적 임무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가부장제적 임무를 위임한 순이는 이 임무를 ‘실제로’ 수행함으로써 가부장제적 질서가 스스로를 위배하는 실패의 순간을 드러낸다. 안티고네 신화를 떠올릴 법도 하다.
나는 이게 옹호론을 펴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논지는 다른 디테일을 모두 눈감아 준 결과다. 이 영화는 라스 폰 트리에의 골든 하트 3부작이 아니다. 희생과 고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여성 주체가 이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순이는 이 영화에서 시어머니에게 ‘제가 갈게요, 베트남’, 정만에게 ‘호이안으로 가요’, 미군 장교를 찾아가 몸 러시를 할 때, 그리고 남편 상길을 만나 뺨을 치는 등등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주체인 적이 없다. 그녀는 이 영화의 화자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객관화된 대상이지도 않다. 화자는 여전히 이준익스러운 좌충우돌 루저 정만과 정만의 또하나의 정서적 대변인인 순이 남편 상길이다(‘이렇게 고통스러운 나를 위로해 줘’).
순이는 어디서나 남성의 순수한 주관적 대상일 뿐이다. 나는 많은 순간들을 참으면서 영화를 봐야 했지만 밴드 일당이 공연으로 번 돈을 불 태우는 장면에서는 인내심이 무너져버렸다. 써니가 정절을 바쳤음이 암시된 후 돈을 목적으로 베트남까지 온 밴드 일당들이 비장하게 돈을 태우다니. 이건 이 영화가 순이와 써니를 대하는 뉘앙스의 상징적인 클라이막스다.
남편 찾아 베트남까지 간 순박한 선이가 써니가 되어서도 가부장제적 질서를 지킨다. 이건 사실 80년대까지 한국영화가 많이 다뤄 온 역설이다. 그리고 여전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역설이다. 질서를 냉소하되 고집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주체들이 종종 질서에 대한 냉소와 고집 사이에서 이중적인 한계와 충돌 같은 것에 부닥치는 것과 닮은 느낌이다. (촛불집회의 비폭력에 대한 고집도 생각해 볼 만 하겠다.) 문제는 영화가 이 역설을 다루면서 질서가 보여주는 실패의 순간을 드러내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야 영화 내내 생고생한 순이, 써니가 억울하지 않다. (또한 극중 남성들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것이기도 할테고.) 그러지 못하는 것이 이준익의, 한국 대중 문화의 한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