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는 왜 투표하지 않게 되었나
[특집] 계급과 투표의 고차방정식
[18호] 2010년 03월 05일 (금) 18:30:21
엄기호 info@ilemonde.com
속물주의, 탈정치화 아닌 정치적 계몽의 산물
좌파 언어 탁월해져야 세대의 계급화 가능
세대는 계급을 대체했는가? 요즘 사회과학에서 유행하는 담론을 찾아본다면 확실히 세대는 계급을 대체한 듯이 보인다. ‘88만원 세대’라는 담론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비정규직이나 실업이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한 세대 전체의 운명을 적나라하게 상징하고 있다. 마치 한 세대 전체 혹은 절대다수가 ‘잉여인간’이라는 동일한 운명 공동체가 되어버린 듯한 강렬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현실 투쟁에서도 계급을 대체하는 듯한 세대 담론이 가진 물리적인 힘은 세계 곳곳에서 검증되고 있다. 2006년 프랑스 청년들의 대규모 노동법 개악 반대 시위에서부터 2008년 그리스의 반정부 시위는 명백하게 청년층이 주도했으며 시위의 주제 또한 청년실업과 직결됐다. 서구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이 징후는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 홍콩의 거리에 갑자기 나타나, 중국 본토와 연결하는 초고속열차 때문에 삶터에서 쫓겨나는 사람들과의 강력한 연대를 주장하며 비타협적 시위를 주도한 것도 ‘80년후’ 세대라고 불리던 청년들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적대의 전선이 분명히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세대의 문제로 전이된 것처럼 보인다.
세대는 저절로 투표하지 않아
그러나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흔히 불러일으키는 오해처럼 경제적 영역에서 세대가 계급을 대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 영역에서 ‘노동 없는 가치 창출’ 혹은 ‘노동의 일회성화’라는 자본 축적 방식의 변화에 따라 한 세대 전체가 졸지에 노동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될 위기에 봉착함으로써, 적대 전선이 자본과 조직화될 수도 없는 잠재적 노동으로서 청년 세대 사이의 문제로 전환한 것이다. 문제는 이 경제적 적대가 바로 정치적 투쟁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계급이 자동적으로 투표하지 않는 것처럼 세대도 저절로 투표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가 한국의 20대다. 지난 촛불 시위에서도 고등학생까지 거리에 뛰쳐나오는데 왜 20대와 대학생들은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 많았다. 이 때문에 20대에 대한 고전적 탈정치화론에서부터 보수화론까지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다. 20대들은 자신이 언제든 잉여인간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프랑스나 그리스, 홍콩에서처럼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88만원 세대론이 보수주의 언론에 의해 왜곡되어 쓰이는 것처럼 자본과 세대 간의 적대가 세대 ‘간’의 대립으로 전환되어 나타날 수 있다. 이때 작용하는 것이 ‘문화’이다. 경제는 문화를 관통할 때만 정치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88만원 세대가 처한 삶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감각이다. 세대가 계급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세대가 계급을 사유하고/사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감각이 만들어진 것이다. 스펙터클의 사회와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지금의 20대가 인간의 본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속물’이다. 그리고 이 ‘속물’들이 도덕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세상에 대한 태도는 ‘냉소주의’인 것이다. 인간 모두가 속물인 사회에서 무한경쟁은 인간의 숙명이 되어버린다. 만약 무한경쟁이 인간의 본성이며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에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를 반대하는 이른바 ‘가치’라는 것은 냉소의 대상이 될 뿐이다.
대학생이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지난 학기에 강의를 하던 한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본 <브이 포 벤데타>라는 영화에 대한 토론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국가는 미디어를 완전히 장악하고 진실을 왜곡하며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 통치하려고 한다. 이런 통치는 언제나 완벽할 수 없으며 진실은 누군가를 통해서 밝혀지며 우매한 것처럼 보이는 대중은 진실에 감응되고 행동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의외로 이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 학생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 학생이 만든 엔딩 크레디트 이후의 시나리오였다. 독재의 붕괴 이후 민주정부가 곧 들어서지만 정책적 무능으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진다. 때맞춰 미디어에서는 독재를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브이’라는 영웅의 사생활을 캐고 온갖 스캔들을 경쟁적으로 보도한다. 혼란을 틈타 종적을 감춘 것처럼 보였던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고 대중 사이에서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다. 결국 사회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 학생의 주장에서 만나게 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정치에 냉소적인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변화라는 것이 어떤 실체적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에 냉소했다. 진보니 보수니 싸우는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인 상황이며, 어느 놈이 되더라도 내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이었다. 독일의 문제적 철학자 슬로터다이크의 논법을 따르자면 이들은 정치적으로 미각성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정치에 대해 계몽된 존재인 셈이다. 이들은 정치를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무감각해졌고 모든 가치에 대해 냉소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냉소주의만이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본 장비(1)가 되는 셈이다. 냉소적 주체들은 절대적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새로운 가치가 단명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로 도덕의 냉소주의가 만들어내는 속물의 정치이다. 가치의 종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속물이 아닌가? 바로 여기에 이명박이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이명박을 지지한 20대 대부분은 그가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서 지지한 것이 아님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가치를 이야기하면 오히려 냉소한다.
속물인가, 속물이 돼야만 하는가
실로 우리는 속물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 미디어에서 성공하고 있는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은 대부분 우리가 얼마나 속물인가를 과장해 까발리는 내용이다. 얼마 전까지 선풍적 인기를 끌어모은 tvN의 <재밌는 TV 롤러코스터>를 생각해보자. 남성의 전형으로 나오는 정형돈은 쉽게 말하면 찌질이 혹은 진상이다. 머리에 든 것이라고는 예쁜 여자와 축구뿐이며 나머지에 대해서는 귀찮아할 뿐이고 제대로 일처리를 하는 것 하나 없다. 이에 반해 여성의 전형으로 제시된 정가은은 생각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멍청한 남자친구를 여우 짓을 통해 후려 처먹는 것이나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명품백’밖에 없는 된장녀다. <개그콘서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남성인권보장위원회’나 리얼리티쇼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 모두는 속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속물주의의 이면에서 발견하는 것은 20대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 노력이다. 역설적으로 속물이 되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다. 우리는 누군가 자신의 허벅지를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꿀벅지’라고 불렀을 때 자신의 존엄이 침해되었다고 항의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이런 호명은 자신이 이 사회에서 상품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야 한다. 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에 자신은 사회에서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는 쓰레기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꿀벅지’에 이어 ‘말벅지’가 등장했다. 송일국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말벅지’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하며 아쉬워했다. 내 스스로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드러내고 스펙터클로 치장해야 한다. 스펙터클의 바깥은 없다. 심지어 이번 중학생들의 졸업식 알몸 사건처럼 내가 남을 때리는 것조차도 인터넷에 올려 자랑을 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나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는 속물인 것이 아니라 속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국 좌파가 가장 패착하고 있는 부분이다. 한국의 좌파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상식의 싸움에서 보수주의자들에게 지고 있다. 이 문화 전쟁에서 실패한다면 그 결과가 어떠할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영국의 사례다. 1972년 11월 5일 영국 버밍엄의 빈민가 핸즈워스에서 유색인종 청소년 3명이 백인 노동자 1명을 구타하고 돈을 빼앗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언론에서 ‘강도 사건’으로 대서특필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영국이 도덕적 위기에 빠졌으며 법과 질서의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부각시켰다. 질서의 적은 바로 이주노동자였으며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옷차림과 언어를 즐기는 청소년이었다. 위기를 관리하지 못하는 노동당의 무능이 고발되었다. 한편 미조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다수의 노동자가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이 장악한 노동당에 등을 돌렸다. 대신 그들은 국가를 도덕적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대처주의의 언어에 동의했다. 이것이 영국에서 전후의 합의에 바탕을 둔 조합주의적 정치가 강압적인 법과 질서 중심의 대처주의로 넘어가는 배경이었다. 노동당은 투표에서 진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상식의 싸움에서 대처에게 진 것이다.
여기가 우리의 로두스다
현재 한국의 상황은 이때의 영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 좌파들이 구사하는 대다수 언어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진리’를 알아버린 20대에게는 냉소주의만을 더 강화하는 진부한 성명서 언어만을 반복하는 패착에 빠져 있다. 한국 좌파의 언어에는 정치에 지나치게 계몽된 지금 20대의 냉소적 앎을 압도할 수 있는 ‘탁월함’이 없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진보 정당이나 노동조합, 시민단체의 모임과 뒤풀이는 여전히 80년대의 계보학과 ‘깔대기 이론’으로 사람을 녹다운시키고 있다. 탁월함. 이것이 속물과 냉소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핵심어다. 희망은 이 20대가 여전히 탁월함에 대해서 감동받고 영감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김연아를 능가하는 스펙터클로서의 탁월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과 삶의 가치에 대한 탁월함은 사이버공간의 웹툰이나 아고라같이 고전적 좌파들이 거의 돌아보지 않는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20대가 ‘계급’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고전적 좌파’의 언어가 20대와 단절된 것이다. 속물주의와 냉소주의에 맞서는 좌파의 탁월한 언어가 필요하다. 좌파끼리 만나는 성명성의 언어가 아니라 좌파와 대중, 특히 20대와 만나는 좌파의 상식에 대한 언어, 그것이 우리의 로두스이다. 여기서 뛰어야 한다.
글•엄기호
연세대 문화학과 박사과정 수료. 우리신학연구소와 인권연구소 창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닥쳐라, 세계화>(당대·2008),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낮은산·2009) 등을 썼다.
<각주>
(1) 슬로터다이크의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에 대한 이진우의 발문 19~20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