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두 경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어버이들의 긴 싸움을 그린 다큐멘터리, 의 한 장면이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씨가 건강도 안 좋은데 고되지 않으시냐는 질문에, 최우혁(1987년, 22살의 나이로 강제 징집되어 부대 쓰레기장에서 불에 탄 채 발견됨)씨의 아버지를 가리키며 말한다.
“우리는 지가 죽였든 누가 죽였든 죽은 것은 알잖아. 의문사 엄마 아버지들을 보면 너무나 불쌍해. 너무 불쌍해 갖고 집에 가야겠다 싶었다가도 저 사람들 놔두고 어떻게 발이 떨어져 집으로 가겠나. 우혁이가 강제징집 가면 나는 죽는다고 피해 다녔어. 그 엄마가 군대 안 가면 안 된다고 세상에 온 동네 사람들 출동해 갖고 잡아다 놓았어. 우혁이가 잡혀가면서 그랬어. 어머니 오늘 못 보면 나는 못 봅니다. 어머니가 원한다면 가서 죽어주지요. 그렇게 강제징집 가서 죽었다고. 그래 그 엄마가 자기가 죽였다고 자기가 죽였다고 하다가 정신이 돌아버려 갖고 물에 빠져 죽었어.”
오늘 우리는 흔히들 말한다. “군사독재의 폭압 속에 신음하던 국민들.” 그러나 그 말은 낯간지런 거짓말이다. 대개의 우리는 “군부독재의 폭압 속에 신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늘 대개의 우리에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알다시피, 오늘 우리는 “군사독재의 폭압 속에 신음”한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만든 역사에 편승해 살고 있다. 희한한 일은 우리가 그런 `편승한 삶’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우리 가운데 어떤 이들은 부끄러워할 줄 모를 뿐 아니라 방자하다.
며칠 전 (빌어먹을, 정말이지 이 신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만)에 실린 홍사중씨의 칼럼이 그런 경우다. 내용은 이렇다. 홍사중은 박정희 시절 가요에 금지 조처가 많은 걸 보고 `황성옛터’는 왜 금지하지 않느냐는 글을 썼다.(황성옛터는 박정희의 애창곡이었다.) 홍씨는 남산에 잡혀가 “공포교육”을 받고 “겉으로는 멀쩡해서” 돌아왔다. “그런 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또 몇 해가 지났다. 돌이켜 볼 때 교묘하게 얼굴을 숨기며 불법의 폭력이 다가오는 요즘 상황보다는 차라리 폭력이 노골적으로 제 얼굴을 보여주던 그때가 견디기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후에 그곳의 `아주 높은 분’으로부터 저녁대접을 받았다. 너털웃음을 짓던 그에게는 적어도 꾸밈만은 없어 보였다.”
“교묘하게 얼굴을 숨기며 불법의 폭력이 다가오는 요즘의 상황”이라는 말은 몹시 구리긴 하나, 홍씨에게 스토커라도 나타났을 수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그러나 “차라리 폭력이 노골적으로 제 얼굴을 보여주던 그때가 견디기 쉬웠을 것”이라는 방자한 말은 도무지 그냥 넘길 도리가 없다. 결론은 간단하다. (“겉으로는 멀쩡해서” 돌아와 “얼마 후 저녁 대접을 받는” 폭력도 홍씨 같은 귀족풍 지식인에겐 심각한 고통일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홍씨가 오늘 그런 방자한 `폭력의 미학’을 내뱉을 수 있는 건 단지 그가 당한 폭력이 경미했기 때문이다.
폭력에 미학은 없다. 폭력의 미학이란 폭력을 감상하거나 가상 체험할 뿐인 유한계급의 말장난일 뿐,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그 세기에 정비례하는 구체적인 고통일 뿐이다. 아니할 말로 물고문이나 전기고문 같은 “노골적으로 제 얼굴을 보여주는” 폭력을 당했어도, 아니할 말로 제 자식이 그런 몹쓸 일을 당했어도, 홍씨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추정할 것 없이 홍씨에게 묻도록 하자. “선생, 그 얘기 최우혁이 아버지 앞에서 다시 할 수 있습니까?”
(99년 12월28일 민주화운동 희생자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15년에 걸친 유가협의 싸움은 일단락되었지만, 여전히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는 여전히 그들 가족들의 죽음으로 만든 역사에 편승해 살고 있다.)
김규항/출판인
* CARLITO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2-11-24 1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