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고대문화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와 있던 교수신문의 기획기사를 다시 퍼온 것입니다.

 

●기획대담 길없는 시대의 길찾기

①21세기와 한국 민족주의

진보와 보수 두 얼굴 지닌 민족주의… 배타성 극복하고 열린 민주주의로 ‘21세기’라는 기표는 지식인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든 미래의 조감도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지식인 사회는 누구나 인정하듯 ‘쟁점과 전망 없는 시대’를 통과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점에서 ‘길없는 시대의 길찾기’라는 표현만큼 우리의 답답한 현실을 적시해내는  수사는 없다.

우리의 길, 우리의 대안은 어디에 있는가. 학술기획을 대담이란 형식으로 진행하는 이유는 평면적이고 시론적인 접근이 갖는 정형성을 탈피하기 위함이다. 결국 대담의 성패는 적절한 대담자의 선정, 그리고 얼마나 생생하게 현장감을 전달하느냐에 달려있다. 우리의 대담은 철저하게 논쟁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소모적인 쟁론에 빠져드는 것을 우리는 또한 경계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철저하게 지금, 우리의 삶과 밀착된 문제들로 시선을 고정시킬 셈이다. 우리는 이 기획대담 시리즈가 한국사회에서 생산적이고 열린 토론문화의 정착에 기여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첫 번째 대담주제는 ‘21세기와 한국의 민족주의’, 대담자로는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와 임지현 한양대 교수를 선정했다.

● 일시 : 9월 28일 오후 3시

● 장소 : 본사 발행인실

사회 : 두 분께서는 한국 민족주의의 바람직한 대안으로 각각 ‘개방적 민족주의’와 ‘시민적 민족주의’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상대방의 민족주의론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김동춘(이하 김) : 임선생이 주창하는 ‘시민적 민족주의’는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적 가치가 존중되는 국가공동체를 전제합니다. 대체로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시민혁명을 경험한 나라들에서 발견되는 민족주의의 한 형태지요. 그런데 저는 시민성과 민족주의는 상호모순적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민족주의가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제3세계가 아닐까요? 민족주의는 실패한 근대화의 산물입니다. 그것의 핵심 역시 개인주의가 전제되지 않는 정서적 공동체성이지요. 시민적 민족주의에서의 민족주의란 엄밀히 말해 국민주의나 국가주의, 혹은 시민사회의 동의어입니다.

임지현(이하 임) : 저는 ‘시민적 민족주의’나 ‘개방적 민족주의’ 모두 일종의 형용모순이라고 봅니다. 김선생이나 제가 굳이 그러한 개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의 특수한 상황이 존재합니다. 알다시피 민족주의란 폐쇄성과 배타성을 불가피하게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힘, 그것이 상상의 힘이건 실재의 힘이건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요. 어떤 사람들은 제게 왜 민족주의를 폐기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저로선 민족주의 담론을 특정 집단이 독점하게될 경우에 초래될 수 있는 파괴적 결과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민족주의는 억압적인가

사회 : 임선생님은 제3세계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시더군요. 저항적 민족주의 안에도 억압성과 배타성이 내장되어 있다는 이야긴데, 김동춘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김 : 모든 민족주의 안에는 억압의 싹이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소외와 억압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 다시 말해 억압이 개별화되지 않고 민족단위로 집단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자칫 억압적인 질서를 용인하게될 위험성도 있습니다.

임 : 저라고 식민지시대에 저항적 민족주의가 가졌던 진보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제가 있습니다. 우선 식민지 시대라고 민족적인 억압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계급적인 억압이나 사회문화적 코드로서 존재하는 신분적인 억압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죠. 성적인 억압도 있습니다. 결국 식민지의 모순은 중층적입니다. 따라서 이때의 해방이라는 것도 중층적인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어야 합니다.

김 : 제 생각은 다릅니다. 식민지 말기의 정신대문제를 예로 들어볼까요? 정신대로 끌려간 여성들 대부분은 힘도 없고 못사는 여성들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민족문제와 계급문제, 여성문제가 중첩됩니다. 유념할 점은 민족주의란 대단히 정치적인 운동이라는 것이죠. 다양한 억압과 모순들이 중층적으로 존재하긴 했지만, 결국 일차적 규정력은 일제의 강점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항상 ‘주적’의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민족주의가 갖는 자기관성에 의해 해방이후에도 담론의 폐쇄성과 억압성은 재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1917년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처럼, 1945년 이전에 그러한 방식의 저항이 아니라 복합적 실천이 필요했다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고 봅니다.

임 : 글쎄요. 주요모순과 부차적 모순을 구분하는 것도 타당합니다만, 그러다 보니 한국의 민족주의가 정신대 여성들에 가한 억압이 간과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요? 저는 문제를 좀더 현재주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왜 정신대 피해여성들이 해방후 50년 동안 그 문제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여전히 일본제국주의가 힘을 행사하고 있어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맥락에서 저항 민족주의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근대성과 민족주의의 문제입니다. 이화여대에서 있었던 김활란 기념관 논쟁을 떠올려 봅시다. 김활란은 친일파였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근대적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여성들이 전통적 속박에서 벗어나는 데 기여한 사람입니다. 제 말은 민족이라는 틀 안에 여타의 문제들을 종속시켜왔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한국사회의 결’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아무리 혁명적인 변화라 하더라도 사회의 미시적인 결이 바뀌지 않는다면 피상적인 변화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이죠.

사회 : 그렇다면 임선생님은 해방이후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더욱 비판적이겠군요. 김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김 : 저는 흔히 지적되는 한국인들의 폐쇄성이나 자민족 중심주의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의 소산이라고 봅니다. 임선생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죠. 국가주의는 권위의존적 인간형을 만들어냄으로써 시민의식의 성숙을 가로막습니다. 이것은 결코 역사문화적인 차원으로 거슬러 올라갈 문제가 아닙니다. 임선생 시각으로 본다면,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양면성, 요컨대 정치권력에 노예적으로 굴종하면서 한편으로는 대단히 폐쇄적인 한국인들의 이중성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습니다.

임 :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경계가 그렇게 뚜렷한 것인지 저로선 의문입니다. 저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하나의 담론구성체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이나 북이나 혈연과 같은 원초론적·객관적 요소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민족을 역사적 변수가 아닌, 초역사적 상수로 보고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핏줄이라는 요소가 개입하면, 민족주의는 필연적으로 배타적인 성격을 띠기 마련입니다. 핏줄이 다른 사람, 언어가 다른 사람은 같은 민족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대단히 위험한 논리입니다. 한국에서 국가주의적 동원기제가 가능했던 것도 결국엔 담론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김 : 저는 핏줄 같은 원초적 요소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부분적 자원일 뿐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동원의 기제로 활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권력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동포’라는 개념입니다. 이것이 사회적 동원의 수사로 등장한 것은 60년대 박정희에 의해서입니다. 북한에서 ‘핏줄론’이 등장한 것도 70년대입니다. 이러한 예들은 혈통이라는 민족주의의 특정한 자원을 동원하고 강화한 것이 다름아닌 국가권력이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내줍니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경계는 무엇인가

임 : 그렇다면 저항 민족주의에서 발견되는 억압적 성격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일본의 예를 살펴보죠. 일본의 좌파 지식인들이 제국주의 잔재 청산에 미온적인 이유는 자신들도 미국이라는 서구제국주의의 피해자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들의 과거는 서방의 제국주의에 대한 일종의 저항민족주의인 셈이죠. 이것은 저항민족주의 역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그 정당성을 검증받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저항민족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 남한의 저항 민족주의가 줄곧 화제가 되는군요. 이번엔 북한의 민족주의에 대해 얘기해 볼까요?

임 : 정치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남북은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에 대한 인식틀을 양자는 공유합니다. 몇 해 전 북한의 개천절 행사에 남한의 진보인사를 제쳐두고 극우인사인 안호상씨가 초청받은 적이 있습니다.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죠. 최근 김정일은 새마을 운동과 천리마 운동이 같은 것이라고 얘기했다죠? 비록 정치적 입장은 다를지라도 양자 모두 민족주의를 동원과 권력유지의 기제로 활용하고 있음을 예증한 셈입니다.

김 : 저는 정치권력의 논리로서 북한민족주의가 갖는 보수성은 비판해야겠지만, 그것이 갖는 나름의 정당성은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국가주권을 상실한 데 따른 자존심의 훼손이 북한의 초민족주의(hyper-nationalism)로 나타났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북한 엘리트들이 보기에 미국과 남한의 관계는 과거 중국과 조선의 조공관계와 동일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시각은 21세기의 변화된 상황에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훼손된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죠. 이러한 점에서 박정희의 민족주의와 북한의 민족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임 : 발생론적 정당성이 현재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로선 80년대 NL의 민족주의 역시 박정희식 민족주의와 별 차이가 없다고 봅니다. 어린시절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암송하면서 형성된 국가공동체에 대한 충성이 대학생이 되면서 방향을 전환한 것에 불과합니다. 저류에 흐르는 민족주의적 인식에는 변화가 없는 셈이죠.

사회 : 화제를 돌려보죠. 6.15 정상회담 이후 형성된 남북의 화해분위기를 타고 정서적 민족주의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임 : 같은 핏줄이기 때문에 통일돼야 한다는 논리는 굉장히 위험합니다. 요즘 남북한의 동일성을 회복하자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의구심이 드는 것은 과연 그 동질성이 무엇일까 하는 점입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보수적 인사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나면,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으로 변합니다. 그 사람들 이야기가 재미있어요. 북한에도 유교적 예절이 남아있고, 여성들은 모두 다소곳하고 정숙하며 남편에게 복종하더라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남북의 동질성을 찾아나가서는 곤란합니다. 현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막대한 군비 지출, 혈육들이 만나지 못하는 끔찍한 상황, 남한의 레드 콤플렉스와 북한의 양키 콤플렉스, 이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는 것입니다. 통일이 아니라 탈분단, 탈냉전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것은 권력이 주도하는 민족주의 열기에 휘말려들지 않는 길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왜 통일이 되어야 합니까? 남북한 주민들의 보다나은 삶을 보장하지 않는 한 통일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가 민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김 : 임선생의 지적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모든 문제가 상층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 결정지어질 때, 반드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통일열기 속에서 민간인 학살문제나 북한의 정치범 문제는 거론될 여지가 봉쇄되어 버렸습니다. 분단으로 인한 최대의 피해자들이 또다시 피해를 입고 있는 셈이지요. 저는 통일문제를 인간고통의 경감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 핏줄이기 때문에 통일을 해야한다는 논리에는 저 역시 반대합니다. 하지만 임선생과는 강조점이 다르죠. 저는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 당사자화’라는 점에서 정상회담 이후의 남북한 정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지난 1백년 동안의 일그러진 역사를 되돌리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상호화해와 평화정착은 남북한 민중들에게도 복리를 가져다줍니다. 여기에 계급적 입장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쓸모 없다는 생각은 대단히 관념적인 판단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세력이나 시민운동세력이 개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죠.

사회 : 통일보다 탈분단이 중요하다는 임선생님의 입장은 동질성보다 차이의 인정이 중요하다는 논리로도 들리는군요. 그런데 과연 동질성에 대한 인정 없이 효과적인 교류와 협력이 가능할까요?

임 : 지금 남북한이 갖고 있는 동질성이 어떤 겁니까? 언어가 통한다고 동질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남북한 어디에도 동질성 같은 건 없다고 봅니다. 차라리 인권이나 민주주의, 인간적 삶을 보장하는 조건들을 구체적으로 짚어내고 이러한 사회를 공동으로 지향해 나가야한다는 주장이 더 구체적입니다. 저로선 민족적 동질성을 찾아내고 거기서부터 협력과 통일로 나아가자는 논리가 오히려 추상적으로 들리는군요.

 

동질성 전제않는 교류·협력은 가능한가

김 : 이 문제는 요즘 저의 고민거리이기도 합니다. 인권이나 민주주의 같은 보편적 가치가 서양의 근대문명이 가져다준 성과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 그러한 최소한의 진보조차 성취하지 못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것’을 강조하는 특수주의는 보수와 반동을 초래할 위험성도 농후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그 무엇은 인권이나 권리의식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것들을 제공한 것은 종교였습니다. 불행히도 진보를 주창하는 세력들은 그것을 갖고 있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그 자원을 진보세력은 어디서 이끌어내야 할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우리의 전통사회가 갖고 있는 문화적·정서적 유산들로부터 추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결국 자신이 특정한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의식이니까요. 저는 남북한의 동질성도 바로 여기서 찾아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언어와 언어 속에 담긴 사고의 원형들로부터 뭔가를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21세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민주국가의 상과도 배치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임 :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주는 무엇을 찾는 작업, 이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신중성을 기해야할 문제입니다. 흔히들 한국사회에 공동체주의적 요소가 강하다고 하는데, 최근 공기업에 대한 감사결과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집단이죠. 스위스 같은 경우는 다릅니다. 거기서는 공기업이 살아남습니다. 왜 그럴까요? 잘 정비된 지방자치제도와 정치인 소환제도가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기 때문입니다. 흔히 생각하듯 전통적인 공동체 정서가 공동체의 유지를 뒷받침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 : 그럼 임선생님은 민주주의나 인권 같은 보편적 가치가 민족주의와 양립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임 :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두에서 말했듯 민족주의는 항상 배타성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죠. 따라서 저는 논의의 초점을 민족주의로부터 개인의 자유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고전적 자유주의가 전제하는 원자화된 개인의 자유가 아닙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개성주의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이것은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를 전제로 한 개인주의. 혹은 공동체성이 내면화된 개인주의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위험은 따릅니다. 내면화된 공동체성이라는 것도 밑으로부터의 자발적인 참여나 사회에 대한 고민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해 위로부터 주어진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김 : 저는 민족주의의 내용 자체가 계급적이라고 보는 편입니다. 민족주의는 결국 이 땅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이민을 갈 수 없는 사람들, 이중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의 저항 속에 자리잡게 되니까요. 오늘날 그들의 대부분은 파산직전에 와있는 농민들, 그리고 50%가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입니다. 민족주의와 인권이라는 가치가 결합되는 것도 결국 이들의 저항운동을 통해서입니다. 세계화가 야기하는 삶의 황폐화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은 비록 민족주의적 외형을 띠고 있지만 그 내용은 어디까지나 계급적이고 생존권적인 요구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 임지현이 보는 김동춘

이론과 실천의 통일… 고민하는 완고한 공동체주의자

결점이 없다는 것. 그것이 김동춘의 단점일 수 있다. 김동춘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고민하는 모범적 지식인이다. ‘역사비평’의 편집위5년 넘게 만나오면서 나는 항상 그의 균형감각이 부러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와 나는 철학적 세계관이 다르다. 내가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입장이라면 김동춘은 완고한 공동체주의자다. 이러한 차이는 성장환경의 상이함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는 경상북도 촌사람이지만 나는 도회적인 사람이다. 공부하는 분야도 다르다. 그는 한국사회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자요, 나는 유럽사회를 공부한 서양사학자다. 김동춘은 내가 문화라는 상부구조적 현상에 관심을 쏟는 것에 비판적이다. 하지만 나는 문화를 토대라고 본다. 따라서 진지전에 대한 그람시의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내가 볼 때 우리사회 진보세력의 오류는 기동전적인 전략에 지나치게 매달려왔다는 것이다. 물론 기동전이 전적으로 그른 전략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진지전의 문제의식을 갖고 기동전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우리 안의 파시즘을 강조한다고 해서 우리 밖의 파시즘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파시즘에 안과 밖이 어디 있단 말인가.

 

▶ 김동춘이 보는 임지현

물질적 기초보다 상부구조 관심많은 문화주의자

성장환경의 차이가 학문적 차이를 낳았다는 임지현의 지적은 옳다. 학문이란 논문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업 아니겠는가. 내가 볼 때 임지현의 한계는 사회의 물질적 기초보다는 상부구조적인 요인들에 관심을 많이 쏟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학자들은 항상 자기 한계 속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그 한계를 어설프게 극복하는 것보다 그것을 지속적으로 밀고 가는 것이 장점이 될 수 있다. 나는 임지현에 대한 일각의 비판에 동의하는 편이다. 현실의 억압과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다루는 데 있어 지나치게 삶의 결이나 미시적인 요인들에 주목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해결을 더 어렵게 만드는 측면도 없지 않다. 임지현은 문화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문화에 대한 관심은 항상 역사의 패배국면에서 출현한다. 대표적인 예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다. 한국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이 우리 안에 내면화된 권위주의나 미성숙한 시민의식의 탓으로 돌려질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임지현의 시각이 지금의 정치사회적 국면을 헤쳐나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현실주의적 세계인식의 고리를 놓칠 공산이 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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