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subject라는 단어는 버틀러가 지적하듯이 독특한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행위성agency을 지님, 즉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음만이 아니라 종속되어 있음being subordinated, 즉 외부 권력의 통제 아래에 있음을 의미한다. 자유주의적 정치 형태에서 우리는 권력에 대한 예속화subjection를 통해 정치에 참여하는 주체가 된다. 그러므로 버틀러는 “우리가 정체성 정치라고 부르는 것은 원고로서 그들의 지위를 구성하는 특수성에 의해 총체화된 주체들에게 인정과 권리를 배분하는 국가에 의해 생산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마치 법정에서 불만을 드러내듯이 우리의 정체성을 근거로 하여 일정 정도 상처 입었음을 주장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 근거로 우리는 국가로부터 인정 또한 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정체성들은 자유주의 정치의 조건이기 때문에 더욱더 총체화되고 환원적이게 된다. 바로 정체성을 통한 우리의 정치적 행위성이 우리 스스로를 국가에 구속시키며 우리 자신의 예속이 지속되도록 보장한다. 그렇기에 긴급한 과제는 버틀러가 이야기하듯이 “근대 국가의 훈육적 장치와 상관 있는 개인성을 거부”하는 방안들을 제시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형태의 개인성을 당연하게 여긴다면—우리가 이 개인성들을 우리의 분석과 정치의 출발점으로 받아 들인다면—우리는 이 과제를 전혀 해낼 수 없다. 정체성은 국가가 우리를 여러 개인으로 분할하는 방식과 우리가 더 넓은 범위의 사회적 관계에 대응하여 자아를 형성하는 방식에 상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은 추상abstraction이며, 정체성을 구성해 온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유물론적 탐구 양식은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즉, 우리 머리에 추상을 가져다 놓은 모든 역사적 구체성과 물적 관계를 파헤침으로써 이러한 추상을 지상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정체성 정치를 생각하는 기반이 되는 “정체성”을 거부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정체성 범주로서의 “인종, 젠더, 계급”이라는 성 삼위일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체성이라는 성령이 세 가지 동일실체적consubstantial 신성한 형태를 취한다는 이러한 관념은 유물론적 분석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인종, 젠더, 계급은 완전히 다른 사회적 관계를 지칭하며, 그 자체가 구체적인 물질적 역사의 관점에서 설명되어야 할 추상이다.

아사드 하이더 지음, 권순옥 옮김, 『오인된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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